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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그 눈들을 밤의 창이라 부른다] 손진은 시집

나에대한열정 2022. 2. 2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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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은 <그 눈들을 밤의 창이라 부른다> 2021

 

 

 

 

 <그 눈물을 밤의 창이라 부른다>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1~12
허기 충전

수년째 성업 중인,
그 묘한 허기가 떠오를 때마다 가는
밥집이 내 일터 가까운 곳에 있다

'허기 충전'이란 상호를 내건
저 카운터의 흰머리 사낸 알고 있다는 걸까
한 끼의 식사 같은 거로는
원기가 충전되지 않는다는 걸
아니 충전된 허기가 더 검게 빛난다는 걸

밤새 달빛이 어루만지다 간 알 같은
부화를 기다리는
둥근 지붕의 저 식당에는

아닌게 아니라
펄럭이던 검정 비닐에 구멍 뚫어
마늘을 심던 벌건 얼굴들의 담배 연기와
인근 공사장 인부들 발꼬랑내 나는 군화와
막걸릴 마시다 시비가 붙어
막 씩씩거리는 짧은 머리의 롱 패딩들

허기의 사촌쯤인 불만과
불만의 양아들뻘인 분노와 상처들이
연탄난로 위 주전자가 흘린 물방울처럼
따그르르, 츠잇츠잇 굴러다닌다

삶에 대한 계획 같은 건 아예 없는,
성실한 것이 아름답다고만 믿지 않는 눈빛의,
부시지 않은 빛 두르고 있는,
음지식물 같은

저들은
먹을수록 충전되는 단단한 허기
맷집처럼 키우러 집요하게
소슬한 저녁들을 찾아오는 게 틀림없다

 

 

p. 17~18
점박이꽃

발을 헛디뎠을까
차가 향기의 벼락 속으로 뛰어든 걸까
지품에서 진보로 넘어가는 국도변에
만삭의 노루가 앉은 듯 누워 있다

금방 어린것이 나올 듯 황갈색 배 꿈틀거리며
기품 있는 목은 든 채
하트 모양 발굽 향기를 찍으며

저 순한 어미는 알까
어룽이는 빛살 속에 찬 기운 섞이고
화사한 생 거두어 갈 것을
가장 먼저 알아볼 개미가 몰려들 것을
쿡쿡 독수리가 발톱으로 찔러 볼 것을

귓볼 도톰한 상수리 잎도 읽지 못하는
구름이 놀고 있는 가랑가랑한 눈의 호수
아지랑이의 현기증 일으키는 젖은 코
저 일렁이는 꽃 시간

아무것도 모르고 까치는 날아와
발끝에 향기 찍어 상수리나무 어깨로 날아간다
건듯거리는 바람이 왜 그래, 어깰 툭툭 치며
부신 햇살에 타는 털 오래 만진다
빤히 쳐다보는 저 눈동자가 사라질 거라곤
곧 이곳을 방문할 죽음의 그림자도 생각 못 할 것이다

생의 아른한 둘레가 한 획 쉼표로 편안해질
한 마리 순한 짐승이 만드는 눈의 경전 앞에
내가 지은 경계가 사정없이 무너진다

이제 곧 길 가던 농부가 꽃향기를 수습해 갈 것이지만
저곳의 햇살은 노루가 떴던 눈을 감는 속도로 저물어 갈 것이다
둘레도 풍경도 될 수 없는 난
조각구름만도 못한 안부를 던져 놓고 갈 뿐

 

어룽이: 어룽어룽한 점이나 무늬 또는 그런 점이나 무늬가 있는 짐승이나 물건.(어룽어룽하다: 여러 가지 빛깔의 큰 점이나 줄 따위가 고르고 촘촘하게 무늬를 이룬 데가 있다)

가랑가랑한-가랑가랑하다: 액체가 많이 담기거나 괴어서 가장자리까지 찰 듯하다.

 

 

p. 25~26
물의 설법

일기예보가 어긋났나,
피서 온 가족은 숫제 물의 지배 아래 들었다
폭풍우의 멱살잡이에 제 성질 못 이긴 창이 덜컹거린다
쿵쿵 우둥퉁 쳐들어오는 물기둥은
햇살에 수런대는 나뭇잎 기척이며
지저귀는 새소릴 작살내고
배음으로 흐르는 시냇물 아예 감옥으로 처넣는다
손을 넣어 만질수도
벌컥 삼킬 수도 없는
저 돌멩이가 다 된 물은 무엇 때문에
혁명처럼,
쿠데타처럼 깡패처럼
세상을 온통 찢을 듯한 훈계로
도회의 더위와 피로 피해 찾아든 식솔들에게
막무가내 가르치려 드는가?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오도도 떠는 몰골로 들으라고만 하는가?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습한 이불 끌어 덮어도
꿈속 몸을 불리는 불길한 새끼 원숭이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밤
딱딱한 공기를 더 딱딱하게
음울한 것을 더 음울하게
우리 간까지 슬슬 보는 손아귀에 가슴을 잡힌
세찬 급류의 며칠

돌로 핀 험상 궂은 물의 말씀, 그와 맞닥뜨리기 전엔
생이 그리 놀라운 것도 두려운 것도 알지 못했다

 

수런대는-수런대다: 여러 사람아 한데 모여 수선스럽게 자꾸 지껄이다.

배음: 연극에서 대사나 해설을 할 때, 그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뒤쪽에서 들려주는 음악이나 음향

 

 

p. 43~44
못, 에 대하여

잔잔한 줄 알았던 몇 년
우리들 사이엔 못,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건 또 꽝꽝 언 강이기도
그동안 연락을 못,드렸네요
쓰려다 섬뜩해서 지우고 못,받았네요
다시 쓰다가 상처 헤집을까 이내
못,을 부러뜨린다
그이와 나의 얼음장 같은 시간이
흔들리는 뼈를 주고받는
삐딱하게 박힌 녹슨 틈새였다니!
나는 찔렀던가 찔렸던가, 그이의 무언에 피를
냈던가 그 피는 붉었던가 퍼렇던가
고요한 아침과 밤들은 엉켜서 부러졌던가
번질번질한 녹물 같은 몇 날 며칠 또 못,먹고
뒤챈다 그래 피칠갑을 해도 싸지 유령처럼
올라오는 그놈의 못,에 박혀
부러진 못,의 대궁처럼 박혀
울지도 빼지도 못하고 뼈가 다
꺽꺽댄다 못,은 내 몸에 소화되지
못,하고 뚫고 나올 것 같다 이러다
"야! 못, 제발 일어나자" 말 대가리도
쏘옥, 들어간 채

못,이 된 몸으로 이른 봄 풀린
못,물과 눈 맞춤할 수는 있으려나?

 

뒤챈다-뒤치다: 엎어진 것을 젖혀 놓거나 자빠진 것을 엎어 놓다 / 유의어: 몸부림치다

피칠갑: 온몸에 피를 칠할 것처럼 피가 많이 묻는 있는 것(=피철갑)

꺽꺽댄다-꺽꺽대다: 숨이나 말이 목구멍 쪽에서 자꾸 막히는 소리가 나다. 숨이 막힐 정도로 우는 소리가 나다.

 

 

p. 114~115
그 눈들을 밤의 창이라 부르겠다

자정이 넘은 설산의 휴양림
깊은 골 따라 랜턴을 비추다
씨앗처럼 심긴 눈동잘 기어이 캐내고야 만다
신음처럼 켜져
무겁게 숨소리마저 보내는
내 몸에도 흐르는 저 살별들을 나는
밤의 창이라 부르고 싶었다
허나 맞부딪는 두 빛이
현 위에 닿는 활의 설렘일 거라는 예감을 이내 뉘우친다
어떤 빛은 파닥이는 지느러미 같은 불씨를
찌르기도 하는 것이어서
날갯죽지나 뱃가죽 아래 두근거리는
여린 뼈와 가슴이 내는 저 흐르는 빛의 발광發光
소심하거나 격렬한 영혼에 더 가깝다
어둠의 옆구리에 손 질러 볼 필요도 없이
못 보던 빗줄기가 그 영혼을 간섭할 때
머루알처럼 또렷이 켜지는 구멍은
때론 표정 감추기 위해 초조를 절반쯤 깨물고 웅크린 창窓이다가도
피로가 더해지면 찌를 태세로 불붙는 창槍

 

살별: 가스 상태의 빛나는 긴 꼬리를 끌고 태양을 초점으로 긴 타원이나 포물선에 가까운 궤도를 그리며 운행하는 천체.

발광發光: 쏠 '발'. 빛 '광' / 빛을 냄

창窓: 창문 '창'

창槍: 창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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