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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못다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2016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6~17
갱년기
이번 역은 6호선으로 갈아탈 수 있는
삼각지역입니다
삼각지역입니다
내리실 분은 오른쪽으로
우르르 달려온다
열리는 출입문을 향해
사람들이 통로를 필사적으로 달려온다
다시는 오지 않을 열차라도 되는 양
놓치면 큰일이라도 나는 양
이런, 이런,
그들을 살짝 피해
나는 건들건들 걷는다
건들건들 걷는데
6호선 승차장 가까이서
열차 들어오는 소리
어느새 내가 달리고 있다
누구 못잖게 서둘러 달리고 있다
이런, 이런,
이런, 이런,
건들거리던 내 마음
이렇듯 초조하다니
놓쳐버리자, 저 열차!
p. 55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하얗게
텅
하얗게
텅
눈이 시리게
심장이 시리게
하얗게
텅
네 밥그릇처럼 내 머릿속
텅
아, 잔인한, 돌이킬 수 없는 하양!
외로운 하양, 고통스런 하양,
불가항력의 하양을 들여다보며
미안하고, 미안하고,
그립고 또 그립고
p. 70
문
뒤틀려 쇳소리를 낼지
달콤한 콧소리를 낼지
당최 열리기나 할지
문이여, 닫힌 문이여
닫혀서 모를 사람의 문이여
달처럼 멀구나
그 언저리를 맴돌다
문
바로 앞은 말고
좀 떨어져
긴 의자에 앉아 바라본다
문만, 그야말로 대문짝만 하게
확대해서 본다
벽 없이 홀로 비석처럼 서 있는 문
열릴 일도 닫힐 일도 없는 문
문이 아닌 문
평생을 소란스레 여닫힌 문의
어리둥절한 꿈
p. 74~75
꽃에 대한 예의
유독
꽃을 버릴 때가 되면
곤혹스럽다
재활용은 안 될 테고
일반쓰레기 봉투랑 음식물쓰레기 봉투
어느 쪽에 버리는 게 마땅한지
망설이다 종종
동네 화단 덤불에 슬쩍 얹어 놓곤 했다
때가 되어간다
이미 지났을지도
꽃병은 바닥까지 말랐을 것이다
물을 부어주는 게
왠지 계면쩍었던 때가
그때였을까?
꽃병 속에서
시든 꽃이 말라간다
낱낱 꽃잎들과 꽃가루가
식탁 위와 방바닥에
우수수 떨어져 있다
전날도 아니고 전전날도 아니고
오래전 화장 얼룩덜룩
빛바랜 꽃이여
유독
꽃을 버리는 건
버릇이 되지 않는다
버릇처럼 피어나
버릇처럼 시드는
꽃을
계면쩍었던-계면쩍다: '겸연쩍다'의 변한말. 쑥스럽거나 미안하여 어색하다. (유의어: 겸연쩍다. 부끄럽다. 쑥스럽다.)
p. 134~136
그 젊었던 날의 여름밤
새벽에 전화벨이 울렸다
자냐고, Y가 물었다
아니, 전화 받고 있어
내 대답에 그는 쿡쿡 웃더니
그냥 나한테 전화하고 싶었다고 했다
무슨 일 있냐고 묻자
그냥, 그냥만 되풀이하다가
그냥······ 살고 싶지가 않아······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울고
나는 울음소리를 들었다
울다가 그는
툭,
전화를 끊었다
아직 젊었던 날의
계절은 기억나지 않지만 또 한 새벽에
전화벨이 울렸다
나, K인데······
오래 사귄 애인과 헤어졌다는 K는
어린 여자에게 가버린 애인에 대해
K를 못마땅해하던 애인의 가족에 대해
지운 아기에 대해
물거품이 돼버린 그림 같은 집과
토끼 같은 자식들에 대해
설움과 분노를 토했다
그리고 울먹이면서
죽고 싶다고 했다
잠 못 이루다 새벽에
전화롤 나를 찾았던 Y와 K는
둘 다 별 연락 없이 지내던
먼 친구였다
그 뒤 Y와 K가
어떻게 살았는지
나는 모른다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건 안다
나도 살아 있다
우리를 오래 살리는,
권태와 허무보다 더
그냥 막막한 것들,
미안하지만 사랑보다 훨씬 더
무겁기만 무거운 것들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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