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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진주 <아슬하게 맹목적인 나날> 2021
<아슬하게 맹목적인 나날>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6~17
손목
손목은 어떤 상징인가
최후의 결심이 생채기 내는 곳이거나
톡톡 뛰는 압력을 움켜쥔 손으로 보내는 곳
안으로 접으면 드러나는 몇 줄
골 깊은 주름 숨기고 있는 곳
마음 없이 끌려갔던 손목
그 경험 뿌리쳤던 손목
개인용 시간을 불러내는 곳
또는 소매 덧대고 걷어 올리던 곳
한 십 년쯤 된 가출이 돌아와 서성거리던
골목 어귀 같기도 하고
헛기침 등에 업고 가는 아버지의 뒷짐 같은 것
생의 박동이 또박또박한 지점
이쪽과 저쪽의 날씨 짚어주기도 한다
부질없이 걷어붙이다가 오해사기도 하고
철들면 여지없이 공손해지는 곳
손목 비틀리기 전까지 실토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빠짐없이 손목으로 모이고
두 손목이 묶이면 발목까지 엉키는 자리
대체로 가늘어서 만만하게 다가가게 되는 곳
어떤 우악스러운 손에 잡힌
내 두근거리던 처녀적 같은 손목
p. 28~29
애인처럼 순두부
몽글몽글 뭉쳐지기는 하겠지만
굳어지지 않겠다, 는 확고한 내용이다
간수하겠다는 뜻이다
순순한 콩물에
밀물 들듯 뭉쳐지는 모양
이제야 간을 만났다는 환호성이다
보드라운 한 입맛이 되었다는 선언이다
말랑하면서도 울렁거리는
풍랑이 건네준
믿지 못할 수심이다, 순두부 한 숟가락
양념장 얹어 푹 퍼먹으면
울돌목 소용돌이와 달의 재잘거림
머리 끄덕이면 알 수 있다
조목조목 씹으면 저 먼 빙하 맛이 난다
굳이 숟가락 필요 없이
훌훌 들이마셔도
아무런 뒤탈 없는 두부들 세계에서
순하디순한 애인 같아 보여도
모 안에 엉키거나 엉기지 않으려는
순두부, 연한 꿍꿍이가 말캉말캉
살갑다
조목조목: 한 조목 한 조목 마다 다 (조목: 법률이나 규정 따위의 낱낱의 조나 항. 하나의 일을 구성하고 있는 낱낱의 부분이나 갈래)
p. 30~31
속속들이와 곳곳들이
일에는
몇 가지 종률 나뉘겠지만
그중 앉은 일과 선 일이 주종을 이룬다
앉은 일에는 손과 눈 상반신이 바쁘고
선 일 중에는 나무처럼 흔들리는 일이 다수다
앉고 서는 차이에 의자와 서성거림이 있다
한쪽만 집중적으로 응시해야 한다면 의자에 앉은 일이다
저녁 늦은 칼라로 굳은살 박였다면
혹사당한 것이다
서서 하는 일에는 흥겹고 즐거운 일이 많은데
부모님은 대부분 앉은 일을 선호한다
앉아서 서 있는 사람, 부리라 한다
결연하게도 오늘 나는 시각이 없는 스키 선수를 위해
시선을 안내하는 사람이었다
앉아서 하는
서 있는 일이었다
쓸모없는 일 부질없이 한 것 같아도
무용한 일이 아닐 때 많다
일의 도리와 형식에는 곳곳들이와 속속들이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곳곳들이 두드려보다
노장사상의 한 예처럼 허무할수록 부지런해진다
만능 도구와 다름없이 하루를 풀고
닦고 조인다
p. 34~35
아슬하게 맹목적인
달리고
달려도
달리는
차량의 뒤만 나타나는 고속도로를,
아슬아슬한 속셈을 추격한다
전속력으로 뒤따라가는 길의 끝엔 환한 감나무 한 그루 있을까 아무렴, 이층집 서릿발 지나치고 거울 지나치고 선두라고 착각하면서 선두의 뒤를 쫓고 옆으로 스치고 코너 돌아도 끊임없이 나타나는 뒤, 들
꽁무니 빼는 후미들
앞뒤 가리지 못할 때가 맹목의 가파른 시기라는 것
아무리 전망을 노려봐도
백미러에는 뒤가 도사려 있다
민낯으로 도는 무한궤도에서
뒤는 그 무엇의 선두
따라잡히는 건 언제나 시간문제
추월과 추월 삽입하면서 바들거리는 바늘 속으로, 계기판 속으로 무분별하고 아찔아찔하게 스스로를 내몬다
경적과 비상등, 그 숨 가쁜 관계 앞지르고 싶은 마음 눈앞에 두었다면 가속페달 내려놓아야 한다
급정거의 성화에도 줄행랑처럼
앞만 보고 달렸다는 말
깡그리 거짓말이다
달리는 선두 앞에는 언제나 뒤가 있다
p. 56~57
허술한 집요
혈연이 엇갈렸다
집에서 보자고 한 아버지
집에 안 계신다
뜻밖에도 아버지는
수십 년 전 폐가로 가서
푸른 시절 한 페이지 뒤적이고 계셨다
삐걱대는 기둥마다 백발의 윤활유치고
현역이라는 듯 빡빡 닦고 계셨다
아버지 입에서 풀려나온
우리 집은
나팔꽃 피어 있었고
혈기왕성한 밀짚모자 놓여 있었다
가자,
늙음에서 해제된 아버지
나는 벌써 늙어 있는데
어린 날의 목요일로
자꾸 젊은 속으로 되돌아가자고 하신다
추진체가 없는 종착지를 향해
길도 놓아버리고
차편도 모르면서
어서 가지고 보채신다
원래 있던 자리는 어디에도 없고
제자리라는 것도 대가 끊긴 혈연일 뿐
바닥난 잔고
수혈받고 싶은 아버지
푸른 귀환이 울먹울먹
멀다
p. 78~79
오려진 대답
눈 뜨면 당시로 바로 소환되는
치욕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팔목 잡고 귀를 빨거나
허벅지에서 부친의 함자 더듬었던 일
야욕으로 산간의 날씨 주무르면서
공모의 답변 요구했던 일
입 다물고 있다가 삼십 년 되짚어
오독오독 쥐어뜯은 대답
때를 만나 피의(被疑)의 질문으로 바뀐 것이다
머뭇거림 없이
망자의 넋을 받는 종이 인형 마땅히 불태워져야 했다
밤이 키운 실물처럼
어둠의 눈치와 변명으로 닮아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종이 인형들
더는 두고 보지 말아야 했다
잘 오려진 대답이 뒤늦게
나타났다
세상에서 가장 예의 없는 것들 중에
느닷없는 대답도 포함되어 있다
잘못이란 없는,
뾰족뾰족한 대답과 구불구불한 질문은
타가수정의 결과물이다
피의(被疑): 입을 '피', 의심 '의' / 혐의나 의심을 받음
타가수정: 서로 다른 개체 사이의 수정. 같은 나무의 다른 꽃이나, 다른 나무의 꽃으로부터 꽃가루를 받아 수정하는 현상.
p. 94~95
마지막 오후 다섯 시
오후 다섯 시까지 가면 돼? 이 말은 너의 마지막 말
리모컨 날아가고 화분 날아가고 선풍기 날아가는 방향은 일제히 다섯 시 쪽을 향해 있다 저녁을 시작하기에는 아직 이르고 너 버리기에는 만만한 시간대 너는 다섯 시가 있어?
기다리고 있으면 헐레벌떡 달려올 것 같은 오후 다섯 시
비둘기 몰려다니고 공연이 시작되고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 비눗방울처럼 흩어지는, 어쩌면 내가 아는 다섯 시는 지붕의 오후였을지도 모른다 물론 다섯 시를 번갈아 오고 가는 동안 오전을 놓쳐버렸을 수 있다
몽고반점으로 남겨진 기록은 지워지지 않아, 너는 누구의 다섯 시였나? 보이지 않는 차이가 보이는 그늘에 앉는다 다섯 시간째 앉아 있으면 사라지기 좋은 시간이 되고, 시간 밑에서의 약속이란 얼마나 위험한지 오후를 잃고 오후를 간직한다
결국 다섯 시만 되면 멀뚱해지지
시간에서 만나고 시각에서 헤어진 시계탑은 구겨진 연륜이 들어 있는 호주머니 같은 것, 끄집어내도 언제나 똑같은 5와 12, 부서진 다섯 시 주섬주섬 챙긴다 광음을 추궁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 리모컨 다시 줍고 화분 바로 세우고 선풍기 돌려놓는다
어중간한 말미,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턱받이 달고 들어오는 다섯 시
p. 110~111
모퉁이 점유권
그가 살던 케케묵은 대문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사면을 가진 모퉁이
지어졌다
모퉁이의 역할이란 오전과 오후로 햇살을 나누는 것
등교와 하교의 풍경 목담하는 것
오후의 모퉁이로 밀려난 그는
이월에 꺾어진 물소리
삼월 어느 무심결에야 듣는다
명암이 낮은 모퉁이와 높은 모퉁이는 불화한다
몇 번씩 급선회했던 모퉁이
낮은 명암에 등 기대고 있다
외딴곳으로 내몰리면서 발 달린
온갖 개성은 떠났지만
두 개의 정면을 가진 모퉁이 돌아가면
숨어 있던 독방의 곡예도 만날 수 있다
가로수 온기 꺾이는 지점에서는 살굿빛 충고
마주 보는 연습에 맛 들인 벚나무와
늘 푸른 당부의 샛길
순무 같은 개천은 여전히 그의 수유다
모퉁이밖에 없는
컨테이너 한 모퉁이 지켜내려고
풍경에 짓눌린 발목을 씻긴다
삐죽하게 튀어나온 봄
맨손으로 만진다
방긋, 혹은 방금 솟아난 봄의 잎사귀는
모퉁이가 없어서 좋겠다
목담: 버력으로 쌓은 담(버력: 하늘이나 신령이 사람의 죄악을 징계하려고 내린다는 벌. 광석이나 석탁을 캘 때 나오는, 광물 성분이 섞이지 않은 잡돌. 물속 밑바닥에 기초를 만들거나 수중 구조물의 밑부분을 보호하기 위하여 물속에 집어넣는 허드레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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