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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말끝에 매달린 심장] 이지호 시집

나에대한열정 2022. 2. 2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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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호 <말끝에 매달린 심장> 2017


<말끝에 매달린 심장>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3
신기루

어떤 풍경은 제 몸피를 기억하지 못한다

검은 눈동자만을 향해 조각조각 자르는

배경으로 만나는 옆과 옆

검은 곳에서 한 생명이 흘러내린다

염분으로 절여져 얌전한 숨결

뒤척이는 두 겹에 맺히는

함께하자는 말

눈은 불현듯 비어 가고

물음표를 던진다


p. 30~31
한계령풀

한해살이 여러해살이
풀을 가르는 말은 계절이 아닌데
간절함 속에서 풀이 흔들리며 피면
어느새 산에서는 한 계절이 조립된다

뒤울림에 따라 꽃이 되고 풀이 되는 이름
숲이 되지 못하는
기록되지 않은 물의 시간은 계약직이다

출근했던 공장의 소리가 들리는 산
푸른 교대를 마친 침엽수들이
깊숙한 곳으로 물러앉을 시간이다

흔들림으로 모든 꽃과 열매는 만근에 다다른다는데
근근이 버티고 있는 언니는 흔들리지 않겠단다
오월에 핀다는 한계령풀이 눈 속에서 피었다
칡덩굴 옆이었으니 그 쫄밋거림이야 말 없어도 알겠다

세세한 틈마다 한 해 한 해를 견디는 풀들로 가득하다
숲의 밀도가 견고한 계절을 만든다
뿌리도 없이 제 씨앗을 탈탈 털어 허기진 산을 채우는
풀씨들은 비정규직

백과사전에는 풀에도 꽃이 핀다고 나와 있지만
끝내 꽃을 피우지 못하는 언니
해가 지면서
한해살이도 여러해살이도 함께 어두워지고 있다


쫄밋거림-쫄밋-쫄밋거리다: 저린 듯하게 자꾸 떠들렸다 가라앉았다 하다. (떠들렸다: 떠들다)

p. 52~53
별의 거울

작은 웅덩이에도 하늘은 담긴다

빗방울이 먼저 떨어지고 뒤이어 파문이 인다
꽃이 지는 저수지
어느 때에는 바람이 일가가
주변 버드나무로 살다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별의 거울에 오늘은 비가 내린다 은하에 모여드는 별자리가 수면에 떠 있다 오래전 청룡이 날아간 뒤로 곡식의 마디나 키우고 있는 저수(氐宿)˚ 작은 파문이 모여 쓴 파문이 되기도 했다

물 고인 곳마다 은하계다
그곳에 사람 하나 없겠는가
아침부터 저수(貯水)를 빼고 있는 양수기 몇 대

마을의 어린 행방이 궁금할 때면 두꺼운 물의 뚜껑을 열곤 했다 낚시꾼이 앉았던 의자며 기물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함께한 하늘과 별과 빗방울은 어디로 갔을까

하늘이 통째로 사라진 물속
사람 하나 사라지는 건 일도 아니다

물을 먹은 것들은 모두 별자리 모양
어제와는 다른 각도록 물푸레나무가 서 있다


˚저수(氐宿): 근본 '저', 별자리 '수'(잘 '숙'이기도 하다)
책 하단에 각주로 표시되어 있는 설명 - 동아시아의 별자리인 28수(宿)의 하나로 동방 청룡 7수 가운데 세 번째에 해당된다. 하늘나라 임금이 지방(28수)을 순시할 때 머무르는 궁전이자 휴게실에 해당하는 곳.
저수(貯水): 쌓을 '저', 물 '수' / 물을 인공적으로 모음 또는 그 물
양수기: 물을 퍼올리는 기계

p. 58~59
견인차 기다리는 동안

산길은
이미 오래전에 시동이 꺼져 있다
갑자기 차는 산언덕 하나 넘지 못하고
평평한 그늘을 차지했다
비포장의 떨림이 끊어 놓은
먼 곳의 부위
길 한쪽에 나뭇잎으로 붙어서
어떤 속도는 지금 편안하다

바람이 점점 어두워져 간다
어스름이 쓰다듬는 나무와 새집은
여기서 오랫동안 평안했으리라
지붕이 없는 숲에
검은 물소리만 둥지를 품고
그사이 오후가 밤으로 견인되고 있다
휴대 전화 액정만 밝다

끊어진 길

지연된 시간은 깊은 저녁에 들어서야
어둠의 품에 치유되는 것일까
바스락거리는 불안마저도 방전된다

멀리 견인차 오는 소리
구불구불하다


p. 84~85
몸에서 지친 것은 어디에서 흔들리고 있을까

왜소한 등허리에 하루 종일이 들어앉아 있다
중얼중얼 안에서 흔들리는 것을 키우는 숙주의 입
가벼워서 흔들리는 거라면
엄마는 아직 뿌리가 있는 것이겠다
두고 온 곳이라는

오전에 한 무리 아이들이 놀다 갔고
지금은 낯모르는 할머니가 앉아 계신다
불러올 영혼이 많아 바쁜 무녀다
오래전 흘려 버린 말로 대신하고 있는 부재의 시간
인사도 나누지 못한 영혼과
휘어진 길에서 자꾸 앉아 쉬는 기억
거친 말들을 집어던지다 잠든 엄마
얼굴도 모르는 이들, 다녀간 집 안이 조용하다

그릇이 깨지는 것은 그릇이 지쳤기 때문이고
비는 구름이 지쳐서 내리는 것이라는데
불안한 균열의 지친 생은
어느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일까

조금 전으로조차도 돌아가지 못하는
시간
잠이 든 엄마의 늦은 월(月)에 걸려서
일어나라 일어나라 흔들리고 있다


p. 88~89
다행이다

놀다 들어온 아이 몸에서 비린내가 난다

계절의 수심은 치어가 놀기에 좋을 만큼 얕아졌다 잔물결이 이끄는 수심 아이들의 좋은 놀이터 지느러미 같은 겉옷 자락 펄럭이며 한동안 안부가 궁금했던 느티나무 갈대밭 넘어 징검다리까지 헤엄쳐 간다 눈이 온몸을 끌고 다니는

두꺼운 옷의 계절은 다 녹았다
비늘은 흔들릴 만큼 무성해지고
꼬리가 점점 무거워질 것들아
네 어깨의 겨울을 떼 내어 주고 싶구나
봄의 풍광을 끌고 몰려다니는
비린내 나는 웃음을 까르르 엎지르고 온 것들

수초 사이에서 꼬리잡기가 한창인 치어들
봄 햇살은 숨어 있는 무늬도 틔우고
파릇한 냄새는 덤이다

봄 비늘 같은 웃음
눅눅한 물때 한 벌 벗어 놓았다
물주머니 달고 와서 다행이다


p. 97~98
엄마의 바탕

언제부터 엄마라는 말에
밝은 바탕이 생겼다
보이지 않는 엄마라는 별
창문을 열어 별을 키우고 싶은 환한 바탕에서
새봄을 앞둔 꽃씨 엄마, 궁금하시다
씨앗을 부어 북극성을 틔우고도 싶은 봄
반짝반짝 돋아나는 싹

기억에도 흘러내리는 길이 있다
캄캄한 곳에서만 또르르 흐르며 울었던 엄마
링거 병에서 똑똑
몸으로 떨어진 별
점점 비어 가는 바탕과
그럴수록 가득 차 무거울 엄마의 저쪽

그 길은 따끔한 길이었을 것이다
낯선 빛이 가슴에 들어와 있다
별의 일생

바라보는 눈빛들은 실핏줄이다
엄마의 바탕은 더 밝아져 간다


p. 116~117


역마살 낀 사내
출렁이는 파도 한 자락 챙기고 있다

질주했던 젊음의 기억
청계산 백운산 한 귀퉁이
늘 마음 설레게 한 바람의 입김도
차곡차곡 넣는다
이렇게 넣어야 할 것들이 많았던가
물과 체관 오르는
어미의 힘찬 심박동 소리가
커다란 입 앞에서 들릴 듯 말 듯하다
싱싱했던 무르팍
포식자의 크르릉크르릉 식탐에
골다공증 걸려
배낭 한 구석에 넣어야 한다
섬이 된다는 것이 훌훌 털어 버리는
먼지인 줄 알았는데
들숨 날숨 가쁘다

물방울이 먼저 떠난다
ㅡ 내일은 지금이고 오늘이다 떠나라
어미는 무거운 팔 흔들어 바람 한 줌 뿌려 준다
가슴우리를 단단하게 할게요
사내는 정처 없이 발길 옮긴다
사내가 떠난 자리
화려한 간판이 영업 중이다

어미 가슴에 섬 하나 생긴다


가슴우리: 가슴만을 둘러싸는 뼈대. 허파와 심장 등을 보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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