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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내가 모르는 한 사람] 문성해 시집

나에대한열정 2022. 3. 1.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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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해 <내가 모르는 한 사람> 2020

 

 

 

유랑: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돌아다님

 

 

p. 17~18
나의 거룩

이 다섯 평의 방 안에서 콧바람을 일으키며
갈비뼈를 긁어 대며 자는 어린 것들을 보니
생활이 내게로 와서 벽을 이루고
지붕을 이루고 사는 것이 조금은 대견해 보인다
태풍 때면 유리창을 다 쏟아 낼 듯 흔들리는 어수룩한 허공에
창문을 내고 변기를 들이고
방속으로 쐐애 쐐애 흘려 넣을 형광등 빛이 있다는 것과
아침이면 학교로 도서관으로 사마귀 새끼들처럼 대가리를 쳐들며 흩어졌다가
저녁이면 시든 배추처럼 되돌아오는 식구들이 있다는 것도 거룩하다
내 몸이 자꾸만 왜소해지는 대신
어린 몸이 둥싯둥싯 부푸는 것과
바닥날 듯 바닥날 듯
되살아나는 통장잔고도 신기하다
몇 달씩이나 남의 책을 뻔뻔스레 빌릴 수 있는 시립도서관과
두 마리에 칠천원 하는 세네갈 갈치를 구입할 수 있는 
오렌지마트가 가까이 있다는 것과
아침마다 잠을 깨우는 세탁집 여자의 목소리가
이제는 유행가로 들리는 것도 신기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닦달하던 생활이
옆구리에 낀 거룩을 도시락처럼 내미는 오늘
소독 안 하냐고 벌컥 뛰쳐 들어오는 여자의 목소리조차
참으로 거룩하다

 

어수룩한 - 어수룩하다: 겉모습이나 언행이 치밀하지 못하여 순진하고 어설픈 데가 있다. 제도나 규율에 의한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아 매우 느슨하다.

둥싯둥싯: 굼뜨고 거추장스럽게 잇따라 움직이는 모양

닦달하던 - 닦달하다: 남을 단단히 윽박질러서 혼을 내다. 물건을 손질하고 매만지다. 음식물로 쓸 것을 요리하기 좋게 다듬다.

거룩하다: 뜻이 매우 높고 위대하다. / 유의어: 고결하다, 고귀하다, 귀중하다

 

 

p. 30~31
두 시간

두 시간은 육신을 태우는 데 걸리는 시간
활화산 같고 천둥 같고 불가사의한 기척이었던 몸이 소실되는 게
하루도 아니고 반나절도 아니고 겨우 두 시간이라니
서럽고 애닯다가도

두 시간이면 영화 한 프로가 끝나기에 적당하고
애인과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영영 헤어지기에도 딱 좋고
목욕탕에서 때를 불려서 씻기에도 충분하더라

한 사람 앞에 억만 시간이 펼쳐져 있어도
몸이 받아들이는 시간은 두 시간이면 족하다는 거

수업도 두 시간이 넘으면 벌써 뒤틀거나 딴생각을 하고
한창 사춘기의 사내아이는 그 시간이면 벌써 수염이 돋아나지

두 시간이면 여자가 배를 뒤틀며 아이를 쏟아내고
꽝꽝 얼었던 냉동고의 고기가 혈관과 살로 되돌아오지

삼촌의 화장이 진행되는 동안
슬픔도 잠깐 간이역에 들르는지
숙모와 사촌들은 몸을 뒤틀며 울다가도

두 시간쯤 지나자
숨도 혈색도 돌아오더니
밥도 떡도 먹고
메시지 확인도 하는 거였다

 

 

p. 45~47
학원들

스무 살 무렵 복장학원 다닐 때
자크를 안감과 함께 꿰맨 채 그만두고 말았지만
만일 그때 학원을 야무지게 잘 다녀
밤에도 형광등 빛 환한 의상실 하나 차렸다면
나는 너의 옷을 철마다 만들어 입혔을 테지
언제 또 자랄지 모르는 너를 위해
단마다 넉넉히 시접도 넣었을 테지

마냥 흘러가는 구름도 하늘에 잘 시침질 해 주었을 거야
가을의 나무에겐 떨어지지 않는 나뭇잎을
저울에겐 일관성의 추를
날뛰는 말에겐 점잖은 짐을 매달아 주었을 거야
민들레에겐 날아가지 않는 홀씨를
담벼락에겐 사라지지 않는 할머니들을
아이들에겐 끝나지 않는 키를
무덤에겐 시끌시끌한 횃불의 무리를 선사해 주었을 텐데
밤다다에겐 환한 오징어 배의 집어등 불빛을
매달아 주었을 텐데
외롭지 않게

그러면 이별은 없고 영원만 있을 텐데
그러면 밤낮도 계절도 없을 텐데
작년 이맘땐 ······ 하는
회고주의자들도 사라질 텐데

내가 복장학원을 관두고
요리학원 운전학원 공인중개사학원을 전전할 동안
그리하여 내가 요리사도 택시기사도 공인중개사도 못되고 정처 없는 동안
그 언던 위의 복장학원은 문을 닫았다 하고
그곳에서 밤새 환하게 오바로크˚ 치거나 감침질하던
줄자며 대자며 가위 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하고

밤낮으로 들들들 시냇물 같은 재봉틀 소리가 멎자
실이 풀린 듯 건물들은 저녁이면 제 그림자를 놓쳐 버렸네

땅바닥에 축축한 뱃가죽이 흘러내리는 개들과
지친 열매를 떨어뜨리던 여름 나무들

마음의 끝단이 풀린 채
이웃들은 뿔뿔이 이사를 가고
심장에서 솟구치는 노래 하나 몸에 접붙이지 못한 채
나는
그때의 아이들은
너무 크거나 작은 옷 속에서 빠르게 늙어 갔네

 

집어등: 야간에 물고기를 잡을 때에, 어류를 모여들게 하려고 배에 켜는 등불. 불빛을 따라 모여드는 물고기의 성질을 이용하여 고등어, 오징어, 정어리, 전갱이 따위를 잡는 데 사용한다. 수상 등과 수중 등의 두 가지가 있다.

정처: 정한 곳 또는 일정한 장소

˚ 오바로크: 옷감 끝단의 올이 풀리지 않게 고정시켜 주는 스티치 기법

 

 

p. 56~57
사랑의 법칙

가고 있었다
양철지붕을 두드려 대는 비의 벗은 발로
언덕을 떠가는 민들레 씨앗의 촘촘한 섬모
담장을 오르는 고양이의 탄력으로

강물 위를 홀로 떠가는 뗏목의 투명한 방향키를 들고
첫꿀을 따러 가는 햇벌들의 웅웅거림과
그 꿀벌들에게 문을 여는 봄 풀밭의 상냥함으로

가고 있었다
한 반짝을 가면
언제나 두 발짝 뒷걸음질 치는 너에게로

너는 건기의 물기와
태풍 전의 먹구름과
하지 끝난 낮의 길이로 한 뼘씩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우체부를 기다리는 새 우체통의 심장인 내게로부터
오래된 사진관의 환한 쇼윈도가
어둑한 저녁의 셔터를 단숨에 내리듯이

 

섬모: 가는 털. 세포의 표면에 돋아나 있는 가는 실 모양의 구조. 

단숨에: 쉬지 아니하고 곧장 / 유의어: 곧, 곧장, 단걸음에

 

 

p. 96
처서

나는 오늘
가을볕 속으로 빨래가 물기를 털어 내는 걸 바라보면서
그러고도 내 습진을 내다 말릴 수 있게 넉넉함이 남아 도는 이 볕이 좋고
헛헛한 위장 속으로 수제비를 같이 흘려 넣을 가난한 식구가 있어 좋고

볕이 처마를 오지게 지지는 오후가 되어서는
늙은 염소처럼 우물거릴 수 있는 햇고구마가 있어 좋고
오늘은 큰놈에게 안경 해 줄 돈이 품에 넉넉히 있으니 더욱 좋고

그러고도 더 좋은 건
일생에서 가장 높고 맑은 날 중의 하나인 오늘이
아직도 이마 위에 두둑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처서: 이십사절기의 하나. 입추와 백로 사이에 들며, 태양이 황경 150도에 달한 시각으로 양력 8월 23일이다. (이십사절기: 태양의 황도상의 위치에 따라서 정한 절기. 입춘, 우수, 경칩, 춘분, 청명, 곡우, 입하, 소만, 망종, 하지, 소서, 대서, 입추, 처서, 백로, 추분, 한로, 상강, 입동, 소설, 대설, 동지, 소한, 대한이다)

헛헛한 - 헛헛하다: 배 속이 빈 듯한 느낌이 있다. 채워지지 아니한 허전한 느낌이 있다.

오지게 - 오지다: 마음에 흡족하게 흐뭇하다. 허술한 데가 없이 알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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