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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일 <연애의 뒤편> 2020
<연애의 뒤편>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63~65
연애의 뒤편
뒷문을 연다.
뿌리 깊지 않은 하늘 끝이 붉게 물들어 있다.
비행운이 어지럽게 풀어지고 몸이 서쪽으로 기운다.
열하루 상현달이 떠 있다.
밟지 않고 오른 달의 아홉 계단을 내린다.
계단에 새겨진, 골목 안쪽에서 들려오던 낡은 오토바이 소리
천 개의 시린 손을 가진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 위로 가부좌를 튼 회색빛 구름
낮게 떠 흐른다.
등불이 먼저 켜지는 그림자 짙은 저층의 집들
표정 없던 서쪽 창문에 피가 돈다.
실어증 앓는 변압기가 침묵의 위쪽에 겨우 매달려 있다.
물 흐르는 소리 들리지 않아도
뒤란에 서 있는 나무는 침묵으로 제 키를 조금씩 키운다.
주름을 제 몸에 새김으로 나무들은 뿌리의 시간을 펼쳐 보인다.
주름보다 내 뒤편에 서성거리던 생명들이 깃들어 있다.
뿌리를 갖고 건널 수 있는 길은 많지 않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뿌리를 내릴 뻔한 날이 있었다.
그때마다 텅 비어 있던 내 방
그림자 없이 오고 가는 바람처럼 네가 멀리서 걸어온다.
저녁의 네 그림자를 깊게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이미 네게 없는 사람
제 그림자를 오래 들여다 볼 때 뿌리 깊은 밤은 열린다.
달의 초단 아래 새겨진 적요의 마른 등짝이 보인다.
뒷문을 닫지 않는다, 실뿌리 없는 문의 아랫도리가 흔들린다.
되짚을 것 더 있다는 듯
창백한 나비 떼로 떠돌다 빈방 깊숙이 들어와
박히는
······무수한
달빛 파편들.
비행운: 차고 습한 대기 속을 나는 비행기의 자취를 따라 생기는 구름
가부좌: 부처의 좌법(坐法 앉을 '좌', 법 '법')으로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왼쪽 발을 오른쪽 넓적다리 위에 놓고 앉는 것을 길상좌라고 하고 그 반대를 항마좌라고 한다. / 유의어: 책상다리
뒤란: 집 뒤 울타리의 안
초단: 계단의 첫 번째 단
적요: 적적하고 고요함
p. 74~75
신발
이름만 부르며 짜디짠 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정월 열엿새엔 부적이 있는지 집 안을 뒤지고, 당뇨 개선에 좋다며 옆집 형님이 준 가시투성이 음나무도 내다 버린다. 목에 걸리지 말라고 마음에 묵혀 두었던 가시도 제거한다.
정월 열엿새 오후엔 귀신이 따르라고 먼 길 돌아 수산(水山)형 찾아간다.
귀신이 놀라지 말라고 한밤에 콩을 볶지도 않고, 있지도 않은 목화씨나 고추씨를 구해 현관 앞에서 태우지도 않는다.
살아 보지 않은 시간조차 미리 검속 당해 짐칸에 실려 섯알오름으로 향하던 마지막 밤길을 신짝으로 알렸던 백 서른두 명의 사람들 신고 가라고 엎어져 있던 내 신발들도 정돈해 가지런히 놓는 정월 열엿새, 하나둘 서둘러 흘러가던 흐린 창불들보다 먼저 집 안의 모든 불을 끈다.
국경을 넘던 발자국 이미 푸른 물결 따라 다 흘러갔지만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을 향해 등 굽은 모습으로 얼어 붙은 채 서 있던 두만강 변 신발 한 짝, 짐칸에서 어둠속으로 내던져진 그 신발짝 이국 땅 도문에서도 본 적 있다.
잘못 볼지라도 딱 한 번, 허깨비로라도 보고픈 얼굴들이 있다.
검속: 예전에, 공공의 안전을 해롭게 하거나 죄를 지을 염려가 있는 사람을 경찰에서 잠시 가두던 일.
도문: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있는 도시.
허깨비: 기(氣)가 허하여 착각이 일어나, 없는데 있는 것처럼 또는 다른 것처럼 보이는 물체. 생각한 것보다 무게가 아주 가벼운 물건. 겉보기와는 달리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몸시 허약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p. 130~131
창가
창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있는 곳에 창가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창이 아닌 창가에서 부러져 속살을 드러낸 나무를 닮은 제 生을 반추하며 마지막 남은 시간을 보낸다.
자다가 느닷없이 일어나 싸우는 소리들을 창가에 기대어 듣고 달려오고 달려가는 새벽 바퀴 소리들도 창가에서 듣는다.
앞 시대를 잃어버린 망각의 달만 떠오르는 세상을 거꾸로 세워 두던 일과 바람과 밤의 문장들을 제 몸에 새긴 나무들에게로 전향한 일이 모두 창가에서 이루어졌다.
설거지 끝난 그릇들의 빛나던 침묵도 창가에서 혼자 지켜보았다.
누군가의 자리를 비워 놓은 채 마냥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오래도록 혼자 기다리던 모퉁이에서 막 돌아온 것 같은, 내 마음에서 몇 발자국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창가라는 말이 좋다.
지금도 창가에 서 있다. 미열로 들떠 있던 밤이 막 지나가는 중이다.
p. 134~135
길 잘 찾아가는 법
걸어왔던 길을 되짚어가는데도 자꾸만 길을 잃는다.
어젯밤에도 아침에 집을 나설 때 보이지 않았던, 태풍에 꺾인 팽나무를 오래도록 쓰다듬고 나서야 간신히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제대로 집에 돌아갔다면 나는 걸어왔던 길을 되짚어간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길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걸어왔던 길을 되밟아 가면 영원히 집에 도착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진작 알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다가 클린하우스 옆 전봇대 아래에서 달을 올려다보는 늙은 고양이의 눈빛을 바라본다. 오늘 밤 저 늙은 고양이의 눈빛에 고인 열나흘 달빛을 제대로 바라보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 길을 잃어버릴 것이다.
고양이가 달을 올려다보는 눈빛으로 고양이의 눈빛을 바라본다. 오늘, 내가 제대로 길을 찾아간다면 그것은 저 늙은 고양이의 눈빛 덕이다.
오늘 밤 집을 제대로 찾아온 누군가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봐라. 혹 달을 올려다보는 늙은 고양이의 눈빛이 보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걸오온 길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모습일 수도 있다.
p. 156~157
꽃
시퍼런 무청 삶은 냄새 물컹 풍겨 오던
저물 무렵, 누군가 곡진히 보내 주신
붉은 꽃봉오리 몇 송이
본 적 있네
금남로(錦南路) 한참 벗어나
환하게 뚫린 4차선 도로 한복판에
쉬잇!
먼 길 끌고 와
저 혼자 덜렁 떨어져 있던
낡은 운동화 한 짝
제 속이 붉다는 걸
모로 누운,
안팎이 뒤바뀐 몸으로 보여 주고 있었네.
저물 무렵, 누군가 곡진히 보내 주신
붉은 꽃봉오리 몇 송이
본 적 있네.
p. 162~163
투명에 대한 명상
-각주(脚註)로 가득한 날들
병실 깊숙이 들어온 햇빛,
의자에 앉아 오래도록 들여다보다
투명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다
투명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하다
가을 햇빛에 대해 다 모르다
모노륨 깔린 병실 바닥의 배후에 대해서도 잘 모르다
몸 깊숙이 들어온 햇빛에 흠뻑 젖다
선잠 들어서조차 마음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다, 그리고 햇빛에 젖은 잠에서 깨다
투명한 여자와 불투명한 여자의 지난 시간에 대해
비유로 누워 있지 않은,
비유로 살아오지도 않은 어머니에 대해 한참을 생각하다
발끝까지 번져 온 햇빛에게 어머니에 대해
오래도록 명상하라고 맡기다
선잠 들었다 다시 빠져나오다
의자에 앉아 병실 더 깊숙이 들어온 햇빛을
몸이 어둠에 흠뻑 젖을 동안에도 들여다보다
p. 166~167
골목을 빠져나온 바람
손차양이 필요 없는 날처럼 바람이 골목을 빠져나온다. 펼쳐진 책장(冊張)같이 살아와서 골목 안에서 나오는 것들이 궁금하다.
골목을 막 빠져나온 바람이 오른쪽 뺨을 스친다. 따닥따닥 걸어가는 여자의 차가운 아랫도리를 지운다. 봄은 차가운 발자국들을 지우고, 바람은 길 위의 발자국들을 공평하게 지운다.
골목을 빠져나온 바람이 달리고 달려 산토리니의 모난 하얀 지붕들을 다스리고, 카라코람산맥의 절벽을 향해 내달린다.
일 년 내내 겨울 표정으로 서 있는 절벽, 웃는 아버지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내 눈만 종일 들여다본다.
소리도 없이 나는 너무 자주 웃는다.
종아리 검게 탄 아이들 소리가 바람을 뚫고 골목 안에서 돋움체로 뛰쳐나온다.
제 몸에 눌려 하얗게 갈라진 뒤꿈치처럼 딱딱하다.
골목 안에서 나오는 것들이 더욱 궁금하다.
손차양: 햇볕을 가리기 위하여 이마에 손을 댐. 또는 그때의 손 모양.
책장(冊張): 책 '책', 베풀 '장' 책을 이루고 있는 낱낱의 장 / 유의어: 쪽
카라코람산맥: 중앙 아시아, 파미르고원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티베트고원으로 이어지는 산맥. 높이가 8,611미터인 케이투봉(K2奉)을 비롯하여 7,000미터 이상의 높은 산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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