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문학반

[시] [무구함과 소보로] 임지은 시집

나에대한열정 2022. 3. 5.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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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은 <무구함과 소보로> 2019

 

 

 

 

 <무구함과 소보로>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50
느낌의 문제

느낌은 내 앞에 남자처럼 앉아 있다 할 말이 있다는 듯 오른손 위에 왼손을 올리고 느낌이 말하고 움직이는 걸 본다 느낌에게 잘 보이고 싶어 목이 마르다 느낌은 컵에 담긴 물보다 차갑다 느리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맛이다 느낌은 하얀 탁자 위에 물을 엎질렀다 물이 탁자를 적시는 동안 느낌은 더욱 진해졌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 거리를 까맣게 물들였다 우리는 손을 잡고 어둠이 전부인 거리를 걸어갔을 뿐인데 이 시간에 아직 문 연 가게가 있어요,라며 들어왔을 뿐인데 물 한 잔이 우리 앞에 놓였고 우리를 적셨고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을 뿐인데 아마 이 느낌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p. 62~63
궁금 나무

궁금함은 나뭇가지처럼 자랐다
가지를 하나 잘라서
물음표를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른 이후에 뭐가 오는지
궁금하지 않으니까
한숨처럼 말할 수도 있으니까
애완동물같이 무럭무럭 질문을 길렀다

왜 나를 뱉었어요?
나와는 다른 것이 될 줄 알았거든
주워 담을 수 없는 말들이 늘어났다

계단은 나를 뛰어넘은 물질이에요?
엄마는 하지 마와 그만해를 섞은 문장이에요?

나를 뚫고 나온 질문들을
하나씩 나무에 걸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몰라보게 가벼워지고
나무가 자랐다, 대답보다 거대하게

나는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아무도 다음으로 건너갈 수 없도록
왜 사람이 사람인지 움켜쥘 수 없도록

손끝에 돋아난 질문을 떨어뜨리자
복숭아와 오이와 오렌지가 동시에 열렸다
서로 엉켜 있어 잘라낼 수 없는 대답이었다

햇빛이었다

 

 

p. 78~79
모르는 것

이 작고 주름진 것을 뭐라 부를까?
가스 불에 올려놓은 국이 흘러넘쳐 엄마를 만들었다

나는 점점 희미해지는 것들의
목소리를 만져보려고 손끝이 예민해진다
잠든 밤의 얼굴을 눌러본다

볼은 상처 밑에 부드럽게 존재하고
문은 바깥을 향해 길어진다
엄마가 흐릿해지고 있다
자꾸만 사라지는 것들에게 이름표를 붙인다

미움은 살살 문지르는 것
칫솔은 관계가 다 벌어지는 것
일요일은 가능한 헐렁해지는 것

비에 젖은 현관을 닦은 수건은 나와 가깝고
불 꺼진 방의 전등은 엄마와 가깝다
오래된 얼룩을 닦는다
엄마 비슷한 것이 지워진다

나는 리모컨을 시금치 옆에서 발견한다
쓰다 만 로션들이 서랍 속에 가득하다
며칠째 같은 옷을 입고 텔레비전을 켠다

채널을 바꾸려는데 엄마가 보이지 않는다
엄마의 이름도 떠오르지 않는다
엄마를 방 안에 넣고 다음 날까지 잊어버린다

 

 

p. 101~102
론리 푸드

식초에 절인 고추
한 입 크기로 뱉어낸 사과
그림자를 매단 나뭇가지
외투에 묻은 사소함

고개를 돌리면
한낮의 외로움이 순서를 기다리며 서 있다

나는 이미 배가 부르니까
천천히 먹기로 한다

밤이 되면 내가 먹은 것들이 쏟아져
이상한 조합을 만들어낸다

식초 안에 벗어놓은 얼굴
입가에 묻은 흰 날개 자국

부스러기로 돌아다니는
무구함과 소보로
무구함과
소보로

나는 식탁에 앉아 혼자라는 습관을 겪는다
의자를 옮기며 제자리를 잃는다

여기가 어디인지 대답할 수 없다
나는 가끔 미래에 있다

놀라지 않기 위해
할 말을 꼭꼭 씹어 먹기로 한다

 

 

p. 122~123
그럴 겁니다

오래 걷기 위해서는 말을 아껴야 합니다

휴일 한 모금을 천천히 삼키며
이 길고 긴 뜨거움을 지나가야 합니다

머릿속이 간지러워도 긁지 않는다면
좋은 은유가 떠오를 것입니다

플라스틱 컵 하나를 머리 위에 올려놓습니다
꼭 이만큼의 사소함이 나를 짓누르고

밤공기를 쐬고 싶지만 아무래도 참는 것이 낫겠지요
날씨를 알고 싶지만
티브이는 켜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으면
너는 참 좋겠다,라는 말을 듣습니다

나는 멀리뛰기를 연습하는 중입니다

시간 속을 걷다 보면 언젠가 밟아본 적 있는 것 같아 자꾸 멈춰 서게 됩니다

당신은 얼마만큼 왔나요?

미래는 잘 닦인 유리창으로 존재합니다
부딪쳐서 멍든 곳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나는 내 미래에 잔뜩 손자국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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