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문학반

[시] [찬란] 이병률 시집

나에대한열정 2022. 3. 3.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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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찬란> 2010

 

 

 

 

 <찬란>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9~11
기억의 집

기억을 끌어다 놓았으니 산이 되겠지
바위산이 되겠지
여름과 가을 사이
그 산을 파내어 동굴을 만들고 기둥을 받쳐 깊숙한 움을 만들어
기억에게 중얼중억 말을 걸다 보면 걸다 보면

시월과 십일월 사이
누구나 여기 들어와 살면 누구나 귀신인 것처럼 아늑하겠지
철새들은 동굴 입구를 지키고
집이 하나로는 영 좁고 모자란 나는
해가 밝으면 동굴을 파고 파고
그러면 기억은 자꾸자꾸 몰려와 따뜻해지겠지

그 집은 실뭉치 같기고 하고 모자 같기도 하며
어쩌면 심장 속 같기도 하여서
겁먹은 채고 손을 푹 하고 찔러 넣으면

보드랍고 따스한 온기가 잡혀와 아찔해진 마음은
곧 남이 되겠다고 남이 되겠다고 돌처럼 굳기도 하겠지

그 집은 오래된 약속 같아
들여다보고 살고도 싶은 여전히 저 건너일 것이므로
비와 태양 사이
저녁과 초저녁 사이
빛이 들어와 마을이 되겠지

그렇게 감옥에 갇혔으면 하고 생각한다
감옥에 갇혀 사전을 끌어안고 살거나
감옥에 갇혀 쓸데없는 이야기나 줄줄이 적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기억하는 일 말고도
무슨 죄를 더 지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성냥을 긋거나
부정을 저지르거나
거짓말이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세상을 끊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태어나야 할 거라고 생각한다

 

 

p. 20~21
거대한 슬픔

사실 하나의 주스 팩만 한 감정

박혀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
오후의 정원 얼굴 가득한 여인네의 인상이나
벽을 뚫고 자라는 나무의 건장한 뿌리
칸칸이 기둥을 오르는 개미 떼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고 털어지지 않는.

죽음의 기미를 받아들인 꽃의 허리
핏기와 살기
사랑의 숨을 받치고 있는 팔뚝

분침의 나사가 풀려 축 늘어졌는데도
하염없이 움직이는 시침
그림의 맨살 속에 감춰둔 은유

이 심해를 버릴 수가 없다

숨기고 싶다면
또 꺼낼 수 있을지를 판단해야 하겠지만

녹은 쇠가 한번 붙으면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불로 지져 붙어 떨어지지 않는 이 슬픔
나는 조금 뒤로 물러설 차례가 되었으니
누가 내 형제들에게 술을 좀 나눠주라

 

 

p. 34~35
찬란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처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이다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

 

걸쇠: 대문이나 방의 여닫이문을 잠그기 위하여 빗장으로 쓰는 'ㄱ'자 모양의 쇠

 

 

p. 40~41
사랑은 산책자

마음이 마음을 흠모하는 것
줄 서는 것 떠드는 것
시간이 시간을 핥는 것

서서히 차오르는 것
그러고도 모른 체하는 것
소멸하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

그러니까 뼈를, 그것도 목뼈를 살살 븐질러뜨리는 것
서서히 떨어지는 속도를 보이는 것

새를 참견하는 것
주책없이 경치에 빠지는 것
장막 하나를 찢어 지독하게 덮어버리는 것
견딜 수 없이 허우적대는 것이 스스로의 요구인 것

의욕하자니 힘이 되는 것
왼쪽으로 갈까 오른쪽으로 갈까
방향을 얼버무리는 것

모퉁이를 돌기 위해 짐을 꾸리거나
주변을 무겁게 하지 않는 것
주소를 버리고 눈을 감는 것

사랑은 산책하듯 스미는 자,
산책으로 젖는 자

 

 

p. 86~87
기억의 우주

고개를 든 것뿐인데
보면 안 되는 거울을 본 것일까

고통스레 관계를 맺은 기억들.
기억의 매혹들이
마지막인 것처럼 몰려오고 있다
이제 쓰거운 것이 돼버린 파문들을
단숨에 먹어치우고 끝내버리자는 것일까

하나의 지구를 녹이고
또 하나의 지구를 바꾸게 되었다
기억하고 있다면 기억하지 말라는 듯
우주는 새들을 풀어놓았다
무엇으로 다시 천지를 물들일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한 듯

소멸하지 않는 기억의 우주를
쌓이고 쌓이는 외부의 내부를

어쩌자고 여기까지 몰고 와서는
안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해를 보면 어두워지는
달을 보면 환해지는 기억들은
왜 적막하게 떠돌지 못하고
우주에 스미는 것일까

 

쓰거운 - 쓰겁다: 쓴맛이 있다. 마음에 달갑지 않고 언짢다.

파문: 수면에 이는 물결. 물결 모양으로 이루어진 무늬. 어떤 일이 다른 데에 미치는 영향.

 

 

p. 114~115
불량한 계절

ㅡ 준이가 나보고 연락하지 말라더라.

그도 그렇게 말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ㅡ 근데 너는 왜 내가 전화를 하면 아무 말도 안 하냐.

네가 나에게 그렇게 묻는 데 이유가 있는 것처럼

얼마 동안 그는 아무 데서나 전화를 걸어왔다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기도 하고
지방의 먼 어디이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모르는 사람의 전화를 빌려 전화를 걸어 달라고 했다

ㅡ 이 분이, 친구 분께서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요, 잠시만요

그렇게 연결이 되어도 나는 고약하게도

어, 어, 어, 하고만 전화를 받았다
응, 응, 응, 하지 않은 건
귀로부터 멀리 전화기를 떼어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 할 수 없었던 것은
그 소리에
사박하게 아무 말도 없이 전화를 끊을까 봐서

그 뚝 하는 소리를 듣고도 내가 다시 전화 걸 수 없게,
너는
불량한 계절의 어느 곳을 지나고 있어서

 

사박하게 - 사박하다: 독살스럽야멸차다. (독살스럽다: 성품이나 행동이 살기가 있고 악독한 데가 있다 / 야멸차다: 자기만 생각하고 남의 사정을 돌볼 마음이 없다.)

 

 

p. 118~119
봉지밥

봉지밥을 싸던 시절이 있었지요
담을 데가 없던 시절이었지요
주머니에도 가방에도 넣고
가슴팍에도 품었지만
어떻게든 식는 밥이었지요

남 몰래 먹느라 까실했으나
잘 뭉쳐 당당히 먹으면 힘도 되는 밥이었지요

고파서 손이 가는 것이 있지요
사랑이지요
담을 데 없어 봉지에 담지요
담아도 종일 불안을 들고 다니는 것 같지요

눌리면 터지고
비우지 않으면 시금시금 변해버리는
이래저래 안쓰러운 형편이지요

밥풀을 떼어 먹느라 뒤집은 봉지
그 안쪽을 받치고 있는 손바닥은
사랑을 다 발라낸 뼈처럼
도무지 알 길 없다는 표정이지요

더 비우거나 채워야 할 부피를
폭설이 닥치더라도 고프게 받으라는 이 요구를
마지막까지 봉지는 담고 있는지요

바람이 빈 봉지를 채간다고
마음 하나 치웠다 할 수 있는지요

밥을 채운 듯 부풀려
봉지를 들고 가는
저 바람은 누군지요

 

가슴팍: 가슴의 판판한 부분을 속되게 이르는 말 (무르팍: 무릎을 속되게 이르는 말)

까실했으나 - 까실하다: 까슬하다의 비표준어 / 까슬하다: (성질이) 사납고 까다롭다. (살결이나 물체의 거죽이)윤기가 없고 거칠다.

시금시금: 여럿이 다 깊은 맛이 있게 조금 신 맛이나 냄새가 있는 느낌. 맛이나 냄새 따위가 깊은 맛이 있게 매우 신 느낌.

채간다고 - 채다: 갑자기 세게 잡아당기다. 재빠르게 센 힘으로 빼앗거나 훔치다. 재빠르게 센 힘으로 움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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