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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눈앞에 없는 사람] 심보선 시집

나에대한열정 2022. 3. 1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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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선 <눈앞에 없는 사람> 2011

 

 

 

 

 <눈앞에 없는 사람> 심보선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34~35
텅 빈 우정

당신이 텅 빈 공기와 다름없다는 사실.
나는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당신의 손으로 쓰게 할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투명한 손이 무한정 떨리는 것을
견뎌야 할 것입니다.

나는 주사위를 던지듯
당신을 향해 미소를 짓습니다.
나는 주사위를 던지듯
당신을 향해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 우연에 대하여
먼 훗날 더 먼 훗날을 문득 떠올리게 될 것처럼
나는 대체로 무관심하답니다.

당신이 텅 빈 공기와 다름없다는 사실.
나는 고백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당신의 입으로 말하게 할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투명한 입술이 하염없이 떨리는 것을
견뎌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신비로운 일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 날.
내일은 진동과 집중이 한꺼번에 멈추는 날.
그다음 날은 침묵이 마침내 산이 되는 날.

당신과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동시에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처럼.

당신과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동시에 끝날 것입니다.

 

 

p. 38~39
호시절

그때는 좋았다
모두들 가난하게 태어났으나
사람들의 말 하나하나가
풍요로운 국부(國富)를 이루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이지
무엇이든 아무렇게나 말할 권리를 뜻했다
그때는 좋았다
사소한 감탄에도 은빛 구두점이 찍혔고
엉터리 비유도 운율의 비단옷을 걸쳤다
오로지 말과 말로 빚은
무수하고 무구한 위대함들
난쟁이의 호기심처럼 반짝이는 별빛
왕관인 척 둥글게 잠든 고양이
희미한 웃음의 분명한 의미
어렴풋한 생각의 짙은 향기
그때는 좋았다
격렬한 낮은 기억이
평화로운 밤으로 이어졌고
산산이 부서진 미래의 조각들이
오늘의 탑을 높이높이 쌓아 올렸다
그때는 좋았다
잠이 든다는 것은 정말이지
사람이 사람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며
사람이 사람의 여린 눈꺼풀을
고이 감겨준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그때는

 

국부(國富): 나라 '국', 부자 '부' / 나라가 지닌 경제력

 

 

p. 73~75
'나'라는 말

나는 '나'라는 말을 썩 좋아하진 않습니다.
내게 주어진 유일한 판돈인 양
나는 인생에 '나'라는 말을 걸고 숱한 내기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아주 간혹 나는 '나'라는 말이 좋아지기도 합니다.
어느 날 밤에 침대에 누워 내가 '나'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지평선처럼 아득하게
더 멀게는 지평선 너머 떠나온 고향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나'라는 말이 공중보다는 밑바닥에 놓여 있을 때가 더 좋습니다.
나는 어제 산책을 나갔다가 흙길 위에
누군가 잔가지로 써놓은 '나'라는 말을 발견했습니다.
그 누군가는 그 말을 쓸 때 얼마나 고독했을까요?
그 역시 떠나온 고향을 떠올리거나
홀로 나아갈 지평선을 바라보며
땅 위에 '나'라고 썼던 것이겠지요.
나는 문득 그 말을 보호해주고 싶어서
자갈들을 주워 주위에 빙 둘러 놓았습니다.
물론 하루도 채 안 돼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어서
혹은 어느 무심한 발길에 의해 그 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요.
나는 '나'라는 말이 양각일 때보다는 음각일 때가 더 좋습니다.
사라질 운명을 감수하고 쓰인 그 말을
나는 내가 낳아본 적도 없는 아기처럼 아끼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나'라는 말을 가장 숭배할 때는
그 말이 당신의 귀를 통과하여
당신의 온몸을 한 바퀴 돈 후
당신의 입을 통해 '너'라는 말로 내게 되돌려질 때입니다.
나는 압니다. 당신이 없다면.
나는 '나'를 말할 때마다
무(無)로 향하는 컴컴한 돌계단을 한 칸씩 밟아 내려가겠지요.
하지만 오늘 당신은 내게 미소를 지으며
'너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지평선이나 고향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나는 압니다. 나는 오늘 밤,
내게 주어진 유일한 선물인 양
'너는 말이야' '너는 말이야'를 수없이 되뇌며
죽음보다도 평화로운 잠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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