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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오늘 밤에는 별 대신 그리움 하나] 채만희 시집

나에대한열정 2022. 3. 15.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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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희 <오늘 밤에는 별 대신 그리움 하나> 2020

 

 

 

 

 

 <오늘 밤에는 별 대신 그리움 하나> 채만희 시집에서 추천하고 싶은 시

 

 

 

p. 12
바람에 관하여

바람을 쐬러 나간다고 하면
왜 집에는 바람이 안 부는가 하겠지만
사실 바람은 부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지
날아다니다 보면 부딪치는 일이 많지
부딪칠수록 힘은 커지지
풀잎 같은 것들은 살랑거리지만
전선 같은 것들은 윙윙거리며 큰 소리를 내지
소리는 소리끼리 부딪쳐 오해의 조각들로 쪼개지지
이름도 제 각각이어서
해풍, 육풍, 골바람, 산바람, 높새바람으로 불리지만
이름도 날아간다는 것도 진실은 아니야
이름은 중요하지 않아 바람은 부딪치며 소리를 만드니까
타자를 매개로 은밀히 술렁거리는 소문처럼
어디로 뛸지도 몰라
그러다가 바람은 허공에 뜨고 말지
각각의 이름으로 불리는 바람처럼 처음부터
나란 없었던 거지 그러니
소멸할 것도 없지

 

 

p. 15
회룡포 뿅뿅다리

회룡포에는 뿅뿅다리가 있다
퐁퐁이란 다리 이름이 뿅뿅으로 변한 것은
오랜 세원 밟히다 보니 사람들이 디딜 때마다
퐁퐁으로 나던 소리가
뿅뿅으로 나기 때문이리라
사람들은 다리를 통하여 강을 건너가고 건너온다
뿅뿅소리를 들으면서 뿅뿅다리를 건넌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을 데리고 이쪽으로 오는 것이다
이쪽과 저쪽을 오갈 수 있는 것은
다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리에는 관심이 없다
이쪽에서 저쪽에만
혹은 저쪽에서 이쪽만 카메라렌즈를 맞출 뿐이다

돌아보니 다리 같은 삶이었다

나를 밟고 지나간 많은 사람들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널 때마다
퐁퐁 소리를 듣다가
어느 땐가 뽕뽕 소리를 들었으리라
나는 이제 내 몸에서 나는 뽕뽕 소리를 듣는다

 

 

p. 51


밭에 자라는 풀은
그런대로 쉽게 뽑히지만
야생에서 자라는 풀은 쉽게 뽑히지 않는다
완력으로 잡아당기면
풀은 팔다리가 문드러지고 몸이 뒤틀릴지라도
땅을 물고 완강하게 버틴다
버티고 버티다가 극점에 이르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줄기를 끊어주고
뿌리는 남긴다

풀은 내 마음에 풀물을 들이며 비꼬듯이
빈 손으로 죽을 때까지
쟁취해서 악착같이 움켜쥐라며
나를 윽박지른다

 

 

p. 58
등나무

문경 제일병원 앞
장미공원에서 등나무 열매를 한 움큼 주웠다
새까만 그 씨앗에서
얽히고설킨 줄기의 틈을 느낀다
그 까만 손을 언젠가 심어
그들의 손이 움켜잡으려는 광활한 틈을
내 밖에 두고 바라볼 생각이다
그 틈과 틈 사이에서
쉼 없이 휘감거나 움켜쥐는 것만이 진실로 알고
집념의 손은 무성해질 것이다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이
휘청거리는 바람이 쌓이고
어둠이 녹아내릴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전전긍긍 꼭대기를 향해 오르고 올라
그 틈에 허무를 채우는 일이다
내 삶의 의식을 일깨워주는
열매 한 움큼

 

전전긍긍: 戰戰兢兢 싸울 '전', 삼갈 '긍' / 몸시 두려워서 벌벌 떨며 조심함.

 

 

p. 79
그리움

반달이 있는 곳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반쪽이 함께 있기에
그리움이 없다

인간이 사는 곳에는
항상 보이는 그의 반쪽이 함께 있어도
그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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