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문학반

[시] [그 세계의 말은 다정하기도 해서] 박숙경 시집

나에대한열정 2022. 3. 10. 06:30
반응형

박숙경 <그 세계의 말은 다정하기도 해서> 2021

 

 

 

 

 

 <그 세계의 말은 다정하기도 해서> 박숙경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13
시(詩)

쓸모없이 자라는 오지랖과
한쪽으로만 기울어지는 외고집과
필요 이상의 변명과 이유를 잘라냈다

하얀 비명이 떨어진다
끈적한 울음이 손가락 사이사이 들러붙는다

손금이 뚜렷해지기까지는
얼마의 시간과 얼마의 햇빛이 필요한지

생명선이 길어질 때쯤
겨드랑이 밑으로 곁가지가 돋아난다

저, 눈물겨운 균형

자꾸 혼잣말이 늘어난다

 

 

p. 35
맛있는 소리

병아리 등에 내리는 봄 햇살 소리
어미 보채는 아기 제비 소리
석 잠 잔 누에 뽕잎 갉는 소리
그 소리 사이사이 소낙비 소리
사립문 여닫는 소리
아침을 끌고 오는 바람 소리
구름을 밀어 올리는 암자의 목탁 소리
청설모 지나간 뒤 꿀밤 떨어지는 소리
한 뼘씩 줄어드는 늦가을 햇볕 스러지는 소리
휘영청 달 그림자 골목골목 스미는 소리
수숫대 베는 소리
밀가루 풀 쑤는 소리
추녀 끝 매달린 옥수수 말라가는 소리
아궁이 청솔가지 타는 소리
그믐 밤 책장 넘기는 소리
얼른 자거라 아버지 걱정 소리
마음의 문 열리는 소리

 

 

p. 36~37
눈동자에 갇힌 별

석양이 다녀가자 당신의 눈동자에서 바다가 사라졌다

한껏 번진 노을은 흰 구름을 밀어 올렸고
밤안개는 저녁을 밀쳐내고
달빛을 낳았다

컹컹 어둠이 짖는 소리에
개밥바라기별이 눈을 뜨고
소쩍새는 소나무 숲을 헤치고 내려와
물고 있던 일곱 개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사라진 고양이처럼
카시오페이아가 사라져버린 밤
비행기가 자주 행성을 물어 나르면
당신의 눈동자에 갇힌 별이 글썽거렸다

빛나는 것들의 움직임에는 이유가 있는 법

그 여름의 사랑처럼
숨을 오래 참으면
별빛은 물결무늬로 심장을 향하고
초승달을 기다리는 당신의 눈동자는
다시 푸른 바다로 출렁거렸다

 

 

p. 40
치자꽃과 꽃치자

저 하양을
꽃이라 하자
향기라 말하자
새콤달콤 걸려 있는
꽃이라 치면 꽃이 되고
향기라 말하면 향기가 되는
치자 꽃이라면 치자꽃이 되고
꽃이라 치자 하면 꽃치자가 되는
저, 창백해진 잎사귀의 불안을
저, 반짝이는 꽃잎의 궁리를
저, 아물다 만 노란 상처를
저, 별빛의 두근거림을
저, 햇살의 여백을
저, 둥근 미소를
향기라 치자
저 순수를

눈물이라 하자

 

 

p. 41
기억에 대하여

과거형일 것

늘 그 자리엔 우물이 있을 것

사라졌어도 있을 것이지만 영원은 바라지 말 것

수면에 닿은 두레박 소리로 깊이를 가늠할 것

흔들린 만큼 쏟아졌다고 원망은 하지 말 것

반의반쯤을 반복하여 키보다 더 높은 물독을 채울 것

문고리에 들러붙던 손가락으로 발가락을 만져볼 것

지워진 기억에겐 11월처럼 가지런한 위로나 해줄 것

빠알갛고 동그랬던 시절이 과거형으로 날아오를 것

 

 

p. 42~43
물구나무딱정벌레

불가능 앞에서
가능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목이 말라
영원이라는 말이 생겨나요
가령, 그늘을 꿈꾸는 일은 아주 쉽다는 말과
아직 아무것도 도착할 것이 없어
내 손은 가볍죠, 라는 말 사이에서
당신을 만나는 방법은 간단해요
바람을 등지고 물구나무서기를 하면 되죠
살아내기 위해서
미명을 해치고 사구(沙丘)를 오르는 일에 비하면요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는 말을 믿어요
죽을힘을 다하면 살 수 있다는 말처럼요
세상에서 제일 처절한 풍경이라고는 말하지 말아요
살다가 길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나처럼 거꾸로 서든지 무너져 봐요
어제와 다른 세상이 나타날 수도 있어요

꽃과 잎의 순간은 너무나 짧아요
오르다 무너지고
내리다 무너지며
다시 눈을 뜨면 또 다른 하루가 열려
살아 있는 나를 느껴요

모래의 완성은 늘 멀어요

 

미명: 날이 채 밝지 않음 또는 그런 때

사구(沙丘): 모래 '사', 언덕 '구' / 해안이나 사막에서 바람에 의하여 운반, 퇴적되어 이루어진 모래 언덕

 

 

p. 58~59
염전

예감의 묘미는 어긋나거나 비껴가는 것

먼 산은 일찌감치 소금밭으로 뛰어들었고
나문재는 다시 붉어졌다

짜디짠 인내 앞에서는 갈잎마저 울고 싶어져
바람 없이도 흔들렸다

뙤약볕 아래 반짝인다는 건
할 말이 많지만 참고 있다는 것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에 갇혀야 되고
뜨거운 말에 귀 기울여야 하는 법

낡은 소금 창고를 점령한 거미가
거꾸로 매달려 염천(炎天)을 건너고 있었다

전깃줄에 걸터앉아 석양은
예감을 비껴가는 중이었고

다시 소금꽃이 활짝 필 것이므로
오늘은 바다와 잠시 어긋나도 괜찮겠다

 

나문재: 명아줏과의 한해살이풀. 

염천(炎天): 불꽃 '염', 하늘 '천' / 몹시 더운 날씨

 

 

p. 84
봄밤

목련 가지 끝에 백열등 여럿 내걸렸다

오리온자리와 초승달 사이를 빠져나가는 저 비행기의 순간은 얼마나 먼가 밤의 색깔이 짙어질수록 탄생의 속도가 빨라지는 저 별빛의 향기는 또 얼마나 아득한가 이소라의 노래를 흥얼거리면 나는 왜 서러워지는가 이 쓸쓸함은 어디에서부터 밀려오는가

나를 에워싼 너에게 마음을 허락하노니

저 깊고 푸른 어둠 속으로 사라져도 괜찮겠다, 봄눈처럼 그렇게 당신이 왔으면 좋겠다

 

 

p. 85
내일은 맑음

너에게로 가고 싶다는 말은
아랫목에 묻힌 밥그릇의 뜨거움이 생각났다는 말

한 그리움이 한 그리움에게로 옮겨졌다는 말

수색 지나 행신
자주 말고 가끔

뙤약볕 등에 지고 방음벽에 매달려도
꽃노릇에 열중인 능소화

내일은 맑음에 손가락을 걸고
너에게로 달려가리라

인생 황금기를 지났다는 말
오늘부터 믿지 않기

 

 

p. 98~99
지금은 연결되지 않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지금 연결되지 않는 파도는 과음 탓이라는 변명을 꺼내겠지
구름이 달을 가뒀는지
달이 구름 속에 숨었는지
속눈썹만 깜빡이지 말고 잠깐 나타나 볼래
1분 후에 돌아오겠다는 이상한 나라의 말처럼 흔한 말을 믿지 않기로 하면
사라진 파도가 돌아올까
지금은 통화 중이어서 연결이 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를 참고하라는 그 오묘함이 어지럽게 만들기도 해
어둠이 들면 세상의 높낮이가 사라지는 거야
감격의 탄성이 새어나기도 하지만 그건 순간이야
우리는 살아가면서 필요 없는 말을 많이 하지
지금은 전원이 꺼져 있어
오래된 사랑이 그래
사랑이 꺼지면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자동 연결되며 통화료는
부서진 사랑으로 줄게
당신이 통화 중이거나 전화를 받지 않음으로 연결은 음성사서함에 기대지만
삐소리 이후 통화료가 부과되는 관계는 매우 불편해
지금은 연결되지 않아
좀 울어도 되지?
반응형
BI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