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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 <상처적 체질> 2010
慕月堂(모월당): 사모할 '모', 달 '월', 집 '당'
<상처적 체질> 류근 시집에서 추천하고 싶은 시
p. 12
獨酌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 사람은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사람은
진실로 작별과 작별한 사람이 아니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과 작별할 때에는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이승과 내생을 다 깨워서
불러도 돌아보지 않을 사랑을 살아가라고
눈 감고 독하게 버림받는 것이다
단숨에 결별을 이룩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아
다시는 내 목숨 안에 돌아오지 말아라
혼자 피는 꽃이
온 나무를 다 불지르고 운다
獨酌(독작): 홀로 '독', 술 부을, 따를 '작' : 술을 따라 주거나 권하는 상대가 없이 혼자서 술을 마심
p. 14~15
법칙
물방울 하나가 죽어서
허공에 흩어진다
물방울 하나가 죽어서
구름에 매달린다
물방울 하나가 죽어서
빗방울 하나로 몸을 바꾼다
빗방울 하나가 살아서
허공에 흩어진다
빗방울 하나가 살아서
잎사귀에 매달린다
빗방울 하나가 살아서
물방울 하나로 몸을 바꾼다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인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한 몸
우주 안에서
도망갈 데가 없다
p. 18~19
그리운 우체국
옛사랑 여기서 얼마나 먼지
술에 취하면 나는 문득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선량한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우표 한 장 붙여주고 싶으다
지금은 내 오랜 신열의 손금 위에도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시절
낮은 지붕들 위로 별이 지나고
길에서 늙는 나무들은 우편배달부처럼
다시 못 만날 구름들을 향해 잎사귀를 흔든다
흔들릴 때 스스로를 흔드는 것들은
비로소 얼마나 따사로운 틈새를 만드는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이별이 너무 흔해서
살아갈수록 내 가슴엔 강물이 깊어지고
돌아가야 할 시간은 철길 건너 세상의 변방에서
안개의 입자들처럼 몸을 허문다 옛사랑
추억 쪽에서 불어오는 노래의 흐린 풍경들 사이로
취한 내 눈시울조차 무게를 허문다 아아.
이제 그리운 것들은 모두 해가 지는 곳 어디쯤에서
그리운 제 별자리를 매달아두었으리라
차마 입술을 떠나지 못한 이름 하나 눈물겨워서
술에 취하면 나는 다시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거기 서럽지 않은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사소하게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안부 한 잎 부쳐주고 싶으다
신열: 병으로 인하여 오르는 몸의 열. '신열하다'의 어근(신열하다: 사물의 분석이나 비평 따위가 매우 날카롭고 예리하다)
p. 24~25
폭설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온밤 내 욕설처럼 눈이 내린다
온 길도 간 길도 없이
깊은 눈발 속으로 지워진 사람
떠돌다 온 발자국마다 하얗게 피가 맺혀서
이제는 기억조차 먼 빛으로 발이 묶인다
내게로 오는 모든 길이 문을 닫는다
귀를 막으면 종소리 같은
결별의 예감 한 잎
살아서 바라보지 못할 푸른 눈시울
살아서 지은 무덤 위에
내 이름 위에
아니 아니, 아프게 눈이 내린다
참았던 뉘우침처럼 눈이 내린다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사나흘 눈 감고 젖은 눈이 내린다
p. 42~43
칠판
당신이 알아볼 수 있도록
세상에서 가장 큰 글씨로 내 이름을 써두곤 했다
당신만 알아볼 수 있도록
세상에서 가장 깊어진 글씨로
내 이름을 써두곤 했다
나 혼자 노을 속에 남겨져 길이 보이지 않을 때에는
당신 맨 처음 바라보라고
서쪽 하늘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청동의 별 하나를 그려두기도 하였다
때로는 물의 이름을
때로는 나무의 이름을
때로는 먼 사막의 이름을 쓰기도 했다
지붕이 자라는 밤이 와서
하늘이 내 입술과 가까워지면
푸른 사다리 위에 올라가 가장 깨끗한 언어로
당신의 꿈길을 옮겨 적기도 하였다
내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물고기 한 마리
우산을 쓰고 지평선을 넘어오는 자전거 하나
밤과 새벽을 가르는 한 올의 안개마저
돌아와 아낌없이 반짝이곤 했다
아무도 그 이름 부르지 말라고
세상에서 가장 작은 글씨로 당신 이름을 쓰기도 했다
아무도 그 이름 알아보지 못하도록
세상에 없는 글씨로 당신 이름을 쓰기도 했다
날마다 뼈를 허물어 등불을 매달았으나
당신 한 번도 내가 쓴 말들 보지 못했다
빈 정거장에 나아가 눈이 먼 은행나무처럼
그토록 가깝고 먼 자리에
무성히 가지를 뻗은 지우개가 늘 있었다
p. 48~49
상처적 체질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내가 쓰러져 새벽까지 울던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
p. 50~51
독백
차마 어쩌지 못하고 눈발을 쏟아내는 저녁 하늘처럼
내게도 사랑은 그렇게 찾아오는 것이다
밀린 월급을 품고 귀가하는 가장처럼
가난한 옆구리에 낀 군고구마 봉지처럼
조금은 가볍고 따스해진 걸음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오래 기다린 사람일수록 이 지상에서
그를 알아보는 일이 어렵지 않기를 기도하며
내가 잠든 새 그가 다녀가는 일이 없기를 기도하며
등불 아래 착한 편지 한 장 놓아두는 것이다
그러면 사랑은 내 기도에 날개를 씻고
큰 강과 저문 숲 건너 고요히 내 어깨에 내리는 것이다
모든 지나간 사랑은 내 생애에
진실로 나를 찾아온 사랑 아니었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새처럼 반짝이며 물고기처럼 명랑한 음성으로
오로지 내 오랜 슬픔을 위해서만 속삭여주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깨끗한 울음 한 잎으로 피어나
그의 무릎에 고단했던 그리움과 상처들을 내려놓고
임종처럼 가벼워진 안식과 몸을 바꾸는 것이다
차마 어쩌지 못하고 눈발을 쏟아내는 저녁 하늘처럼
젖은 눈썹 하나로 가릴 수 없는 작별처럼
내게도 사랑은 그렇게 찾아오는 것이다 새벽별
숫눈길 위에 새겨진 종소리처럼
숫눈길: 눈이 와서 쌓인 뒤에 아직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길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p. 60~61
중독
내게 아무런 기쁨 없으니 나무들은 너희끼리
한 시절의 잎사귀를 불렀다 흩어놓고
몇 번씩 비가 내리는 저녁이 와서
더욱 캄캄해진 귀를 막게 했을까 세상에 오지 않는
노래와 약속들은 아프고 아무 데서나
쓰러지고 싶었던 나날들은 내게도 고통이었을 테지만
이젠 어쩔 수 없고 어쩔 수 없음으로 하여
나는 더 멀리 길 바깥으로 떠밀려간다
아무도 살지 않는 곳에서는 모든 것들이 뚜렷해서
귀를 막지 않아도 내 고통이 잘 들리고
잘 자란 벌레처럼 울 수도 있었을 것이므로
점점 더 깊은 곳에 나는 나를 버려두는 것이다
불타지 않는 기억들을 집으로 지은 사람답게
함부로 생애의 알 수 없는 힘들을 견디는 것이다
그러나 바람의 길과 빗방울이 오는 길과
시간이 흘러가는 길을 그 바깥에서
파랗게 볼 수 없다는 것이 무슨 괴로움이 되리
생에는 그런 것들과 영혼을 바꾸지 않아도 멀리 흐르고
아주 가까운 곳에 상처들은 무궁한 뿌리를 드리운다
거기 몸 박고 꽃을 피우면 이윽고 어쩔 수 없는
나날들이 오고 저녁이 와서 눈 뜰 때마다 더 멀리
더 멀리 떠밀려 가 있는 잎사귀와 만나고 나는
구름의 생멸보다 잦고 흔한 고통과 만나게 될 것을
p. 66~68
도망간 여자 붙잡는 법
도망간 여자가 아직 지구 안에 머물고 있다면
그녀를 붙잡는 것은 아주 쉬운 일
우선 몸의 부피부터 부풀려야 한다
태양계보다 커야 한다
지구 밖으로 물러나 좀 살펴보다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지구의 속도를 가볍게 제압한 후
태양 가까이 가져가서 자세히 관찰하도록 한다
그래도 도망간 그녀는 쉽게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도망간 여자가 채석장에서 돌을 깨고 있지는 않을테니까
집어등 밝힌 어선을 타고 오징어를 잡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강물과 바닷물을 비워낸다
너무 예리하지 않은 칼로 지구의 껍데기를 벗겨낸다
아, 지붕들만 살짝 벗겨내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핀셋으로 남자들을 골라낸다
좀 작업이 더딜 것 같으면 도처에 싸움을 일으키면 된다
남자들은, 어쨌든 무엇을 위해서든 뛰쳐나가지 않고선
배겨내지 못할 테니까 그게 남자들이 주로 하는 일이니까
이번엔 동네 구멍가게든 백화점이든 모든 상점마다
폭탄세일을 벌이도록 한다 도망간 여자가
설마 그 비좁은 틈바구니에서 구두를 고르고 있진 않을 테니까
홍당무와 감자의 무게를 달고 있진 않을 테니까
이제 좀 정리가 됐는가
그때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준다
한사코 귀를 막고 다시 도망가는 여자가 있다면
그녀를 주시하라 그녀는 아직도 그 노래를 기억하고 있고
내가 되었든 당신이 되었든 결코 다시 듣고 싶어하지 않을 테니까
도망간 여자가 아직 지구 안에 머물고 있다면
그녀를 붙잡는 것은 아주 쉬운 일
그러나 도망간 여자를 붙잡는 일은 너무나 어리석어서
제발 그만두라고 말리고 싶다
그건 지구를 괴롭히는 일이니까
태양계를 비좁게 만드는 일이니까
p. 104~105
머나먼 술집
요 몇 달 사이에 나는 피해서 돌아가야 할
술집이 또 두 군데 더 늘었다
없던 술버릇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갈 수 없는 술집들도 하나씩 늘어난다
그저께는 친하게 지내오던 사채업자와 싸우고
어젯밤엔 학원 강사 하는 시인과 싸우고
오늘은 술병 때문에 일요일 하루를
낑낑 앓는 일에 다 바친다
억울하다 갈 수 없는 술집이 늘어날 때마다
없던 술버릇이 늘어날 때마다
그래도 다시 화해해야 할 사람들이 늘어날 때마다
나는 또 술 생각이 난다 맨 정신일 때
저항하지 못하는 것은 내 선량한 자존심
하지만 그들은 왜 하필 술 마실 때에만
인생을 가르치려는 것인가 술자리에서만
별안간 인생이 생각나는 것인가
억울하다 술 마실 때에만 불쑥 자라나는 인생이여
술에서 풀려나면 다시 모른 체 껴안고 살아버려야 할
적이여 술집이여 그 모든 안팎의 상처들이여
갈 수 없는 술집이 늘어날 때마다
나는 또 술 생각이 난다 슬슬
피해서 돌아가고 싶어진다
p. 112
유부남
당신이 결혼 따위 생각하지 않는 여자였으면 좋겠어 우리 그냥 연애만 하자 사랑이 현실에 갇히는 건 끔찍해 결혼은 천민들의 보험일 뿐이야 진부해 그냥 연애만 하자 서로의 눈을 바라보자구 구속하는 일 따위 구역질난다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해야지 밤에 내게 전화하는 건 구속받는 기분이어서 싫더라 주말에 약속 잡는 사람들 정말 이해할 수 없어 정서적 난민 같아 주말엔 책을 잃고 음악을 들어야지 당신은 내게 뭔가 요구하지 않을 사람 같아서 참 마음에 들어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사랑은 폭력이야 천박해 그러니 우리 쿨하게 연애하자구 참, 내가 전화 받기 곤란할 만큼 바쁜 사람이란 거 알지? 전화는 항상 내가 먼저 할게 사랑해 이런 느낌 처음인 것 같다 우리 좀 더 일찍 만날 걸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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