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문학반

[시] [귀를 씻다] 이선식 시집

나에대한열정 2022. 3. 11.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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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식 <귀를 씻다> 2020

 

 

 

 

 <귀를 씻다> 이선식 시집에서 남기고 싶은 시

 

 

 

p. 32~33
가난

당신 생각이 저렇게 두서없이 흩날려도 되는 것일까?

속절없이 또 눈발은 날리고

산골버스에서 내린 한 낯선 여인이 눈길을 걸어가네

한겨울 산간벽지에 손님이 찾아오는 일은 부귀영화보다 따사로운 호사

가난이 어찌 배고픔뿐이랴

나는 먼데 사람이 궁금해 손바닥으로 눈을 받아 눈점(卜)을 쳐 본다

손바닥에서 녹은 눈이 방울지면 그도 나를 생각하는 거라는 속설

가진 거라곤 적막뿐인 집에 산까마귀들이 내려와 왼종일 부산을 떨다 갔다

이내 뱀처럼 긴 밤이 와서 차갑게 식은 나를 삼키고 오래오래 뒤척일 것이다

 

속절없이 - 속절없다: 단념할 수밖에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다

산간벽지: 산간 지대의 구석지고 후미진 산골(산간: 산과 산 사이에 산골짜기가 많은 곳)

卜(복): 점 '복'

왼종일: '온종일'의 비표준어(온종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내)

 

 

p. 54~57
슬픔의 총량

새들은 두려움도 없이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른다
나무는 자신이 쏘아 올린 새들을 받아 주기 위해 올해도 키가 한 자씩이나 자랐다

누구나 몇 개의 주머니를 가지고 있다
오늘은 식당에서 큰 소리로 종업원을 야단치는 사람을 보았다
포용의 주머니가 아주 작은 사람이었는데
그만 그날의 용량이 넘쳐 버리고 만 것이다
어떤 작가는 남는 음식이 있으면 문을 두드려 달라는
메모를 현관문에 붙여 놓고 죽어 갔고 어느 자살자는
밀린 월세와 공과금을 메모와 함께 남기고 세상을 등졌다
그들이 가진 주머니보다 너무 큰 슬픔이 덮쳐 와서
넘치는 슬픔을 어떻게 추슬러야 할지 도무지 방법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은하의 골목을 헤매다 간신히 찾아왔을 꽃들의 성급한 낙영(落英)

갑자기 낭떠러지로 사라지는 길들
왜 사람들이 꿈꾸는 세상은 난공불락의 산 뒤에 감추어져 있는가
이 별은 나를 만나기 위해 영겁을 기다렸다
먼 미래에 나를 찾아올 이의 손을 잡아 줄 최선의 방법을 알려 다오
낭떠러지 앞에서 자신의 길을 그러쥐고 울고 있는 그대여
그대에게 오기 위해 먼 별을 떠난 빛은 길을 읽고 암흑이 되겠지
이 지상에 똑같은 꽃은 하나도 없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살아 있다는 그 단 하나의 힘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가*

백발의 노부부가 이제 다 왔다는 듯 평생이 걸린 나무그늘 밑 벤치로 느리게 걸어간다
멧비둘기 한 쌍이 인간들이 흘린 근심 부스러기를 쪼다가 산으로 돌아간다
노래와 울음 사이를 왕복해야 하는 하루의 협곡에 사람들이 다리를 놓고 있다
눈물이 차오른 강물에 더 이상 발목을 적시지 않고도 노래 부를 수 있도록
시간의 범람으로 더 자주 울어야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죽음의 불평등에 관한 신들의 토론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사람들에게 느리게 가는 시간의 향낭을 선물하고 싶다
연기가 되어 이 별을 떠난 그들은 어떤 색깔의 별이 되었을까?

새들은 지상의 슬픔을 구름 밖으로 물어다 버리느라 날갯죽지 깃털이 빠지고
구름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할 때면 산등성이에 기대 눈물을 흘리다 간다

 

추슬러야 - 추스르다: 추어올려 다루다. 몸을 가누어 움직이다. 일이나 생각 따위를 수습하여 처리하다.

낙영(落英): 떨어질 '락', 꽃부리 '영' 떨어진 꽃 또는 꽃이 떨어짐

난공불락: 難 어려울 '난', 攻 칠 '공', 不 아니 '부, 불', 落 떨어질 '락' / 공격하기가 어려워 쉽사리 함락되지 아니함

영겁: (불교) 영원한 세월

그러쥐고 - 그러쥐다: 그러당겨 손안에 잡다. 손가락을 손바닥 안으로 당기어 쥐다. 자기의 것으로 들어잡거나 자기의 영향 아래 그러모아 틀어쥐다

 

* 장 그르니에, <지중해의 영감>에서 인용

 

향낭: 향을 넣어 몸에 차는 주머니

 

 

p. 92
별빛편지

한계령의 별빛을 너에게 보낸다
편지봉투 속에서 달그락거리는 별빛들
손바닥에 쏟아 알약처럼
한입에 털어 넣어 보렴
네 안에서 달그락달그락 살아갈 나는
혼자서도 외롭지 않겠지

오후에는 굵은 비가 내렸다
사람들은 비를 맞으며 천천히 걸었다
더 많은 슬픔으로 젖어 있으므로
젖은 만큼 슬픔은 더욱 선명해지고
풀벌레가, 주머니 속 별빛처럼
달그락달그락 울자
별빛이, 누군가 엎지른 추억처럼
쏟아지는 밤이 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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