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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생활이라는 생각] 이현승 시집

나에대한열정 2022. 3. 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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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승 <생활이라는 생각> 2015

 

 

 

 

 <생활이라는 생각> 이현승 시집에서 추천하고 싶은 시

 

 

 

p. 10~11
저글링

내 손은 두개뿐인데
잡아야 할 손은 여러개다
애써 친절을 베풀면서
쉬운 사람은 아니라고 강조하는 사람처럼
내가 잡아야 할 손들은 뚱한 표정을 하고 있다.

너무 빨리 돌아가는 회전문 안에서
우리의 스텝은 배배 꼬이고 뒤엉킨다.
회전과 와류를 빠져나가지 못해
우리는 빨래처럼 잔뜩 뒤엉키며 물이 빠진다.
아무나 막 목을 조르고 싶다.

남을 웃길 수 있는 능력을
남에게 웃음거리가 됐다고 번역하면서
우리는 자존심이 상한다.
슬픔을 팔고 있다는 수치의 감정이
우리를 화나게 한다.

손안에 쥐고 있는 얼음처럼
차가움에서 시작해 뜨거움으로 가는 악수,
내 손은 두개뿐이지만
여러개의 손을 잡고 있다.

 

와류: 물이 소용돌이치면서 흐름, 또는 그런 흐름

 

 

p. 12~13
봉급생활자

우리는 나가고 싶다고 느끼면서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면서 더 간절해진다.
간절해서 우리는 졸피뎀과 소주를 섞고

절박한 삶은 늘 각성과 졸음이 동시에 육박해온다.
우리가 떠나지 않는 이유는 여기가 이미 바깥이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린 삶이 바로 망명 상태이다.
얼음으로 된 공기를 숨 쉬는 것 같다.

폐소공포증과 광장공포증은 반대가 아니며
명백한 사실 앞에서 우리는 되묻는 습관이 있다.
그것이 바로 다음 절차이기 때문이다.
저것은 구름이고 물방울들의 스크럽이고 눈물들의 결합의지이고
피와 오줌이 정수된 형태이며 망명의 은유이다.
그러므로 왜 언제나 질문을 바꾸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는가?
어제 꿈에 당신은 죽어 있었어요.
나는 당신이 살아 있는 시점에서 정확하게 그것을 보았어요.
지금 당신은 죽어 있지만요.

구름의 그림자가 도시를 뒤덮었다.
파업이 장기화될 것 같았다.

 

졸피뎀: 불면증을 치료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약

 

 

p. 16
보온보냉

보온병의 원리는 간단하다. 빛과 열이 전달되지 않도록 차단하는 것. 내용물을 진공으로 둘러 접점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보온병만 보면 왕따 생각이 나는 걸까? 속은 화끈거리는데 그걸 나눌 누군가가 없다면 틀림없이 따돌림을 받는 거다. 내가 학교 다닐 땐 병을 깨서 자기 팔뚝을 긋는 애들은 못된 놈들도 안 건드렸다. 말하자면, 이상한 놈이 못된 놈들보다 쎘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상하다는 것은 순수하다는 것과 통하고 종종 순수한 애들은 이상한 애들과 친했다. 그건 보온병 속의 내용물이 그 열을 그대로 보존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완벽한 차단이란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깥은 끓어오르는데 혼자 냉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긴 안겨 있는데 하나도 안 따뜻해지는 것도 이상하지. 보온병 말이다.

 

 

p. 24~25
빗방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밤의 도시를 바라볼 때처럼 명확해질 때는 없다.
어두운 천지에 저마다 연등을 달아놓듯
빛나는 자리마다 욕정이, 질투가, 허기가 있다.
이것보다 명확한 것이 있는가.

십자가가 저렇게 많은데,
우리에게 없는 것은 기도가 아닌가.
입술을 적시는 메마름과
통점에서 아프게 피어나는 탄식들,
일테면 심연에 가라앉아 느끼는 목마름.
구할 수 없는 것만을 기도하듯
간절함의 세목 또한 매번 불가능의 물목이다.
오늘은 내가 울고
내일은 네가 웃을 테지만

내일은 내가 웃고 네가 기도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울다 잠든 아이가 웃으며 잠꼬대를 할 때,
배 속은 텅 빈 냉장고 불빛처럼 허기지고
우리는 아플 때 더 분명하게 존재하는 경향이 있다.
아프게 구부러지는 기도처럼, 빛이 휜다.

 

물목: 물건의 목록

 

 

p. 30~31
부끄러움을 찾아서 2

고향 친구 빙부상에서 제수씨에게 습관적으로
안녕하시냐고 물었던 나도 안된 인간이지만
이즈음의 삶이라는 것도 부황 자국 같다.
살겠다고 제 피를 뽑은 자리의 피멍처럼
죽을 힘으로 살고 사는 힘으로 죽는다는 생각.

생각이 있었지만 말하지 않았을 뿐인데
결국은 생각이 없어지는 방식으로,
꽃이 피고 바람이 불고 비가 왔다.
지지도 못하고 매달린 목련의 부황 자국 같은 얼굴.

물에 빠져 죽은 나비를 애도하며 이옥(李鈺)은 썼다.
산꽃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나니, 누구를 위하여 어지럽게 붉은가?
꽃놀이 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일가족의 뉴스
흩날리는 꽃잎들 아래로 차와 함께 찌그러진 사람들 멀리
아직 꽃들은 울긋불긋하다.

한주에 세번 문상을 하고 나서
죽음이 얼마나 가까운지 깨닫는 일은 공교롭고 새삼스럽다.
죽음은 너무나 당연해서 생략 가능한 문장 같지만
생략된 것을 더듬을 때마다 가슴이 눌린다.

 

빙부상: 장인어른의 상(喪:죽을 상)을 이르는 말

 

 

p. 36~37
생활이라는 생각

꿈이 현실이 되려면 상상은 얼마나 아파야 하는가.
상상이 현실이 되려면 절망은 얼마나 깊어야 하는가.

참으로 이기지 못할 것은 생활이라는 생각이다.
그럭저럭 살아지고 그럭저럭 살아가면서
우리는 도피 중이고, 유배 중이고, 망명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뭘 해야 한다면

이런 질문,
한날한시에 한 친구가 결혼을 하고
다른 친구의 혈육이 돌아가셨다면,
나는 슬픔의 손을 먼저 잡고 나중
사과의 말로 축하를 전하는 입이 될 것이다.

회복실의 얇은 잠 사이로 들치는 통증처럼
그렇게 잠깐 현실이 보이고
거기서 기도까지 가려면 또
얼마나 깊이 절망해야 하는가.

고독이 수면유도제밖에 안되는 이 삶에서
정말 필요한 건 잠이겠지만
술도 안 마셨는데 해장국이 필요한 아침처럼 다들
그래서 버스에서 전철에서 방에서 의자에서 자고 있지만
참으로 모자란 것은 생활이다.

 

 

p. 56~57
기념일들

오늘은 결혼기념일이고 모레는 아버지 제사다.
문득 나는 전생을 믿는 심리학자의 노트처럼 복잡해진다.

십일년 전에 나는 결혼했고
그때는 네 아이 같은 것은 상상도 못했다.
결혼이란 그러므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의 시작이다.
누군가의 기원이 된다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지만
시작의 자리에 가서 보면 감쪽같아서
새삼 제 기원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가 되어 아버지를 생각해보는 것은
아버지에게도, 아버지의 아버지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후회란 그만큼 흔해빠진 것이지만
그것은 내일의 일이니 미리 해보는 후회는 어리석다.

일년에 열두번 물 주는 선인장처럼
일년에 하나씩 더하는 나이를 죽음도 두고두고 먹는다.
그러므로 오늘은 케이크 위에 양초를 켜고
모레는 향을 피우기 위해 성냥이 필요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육년 전이었다.
무언가를 준비하기에는 죽음이 이미 가까이 와 있었다.
너무 긴 칼을 가진 무사처럼 허둥대다가 당했다.
법이 그렇듯 묵묵히, 무표정하게, 그리고
간결하게 선고와 집행이 완결되었다.

따지고 보면 누가 원한을 산 것도 아닌데
어쩐지 복수심까지 들었지만
밥상을 마주하고 앉은 여섯번째 대면에는
눈물 없이도 마른 곡 없이도 슬픔이 고인다.
삶과 죽음이 이렇게 엄연하다.
아버지도, 아버지의 아버지도 그랬을 것이다.

 

엄연하다: 사람의 겉모양이나 언행이 의젓하고 점잖다. 어떠한 사실이나 현상이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뚜렷하다. 매우 급작스럽다. 

 

 

p. 102
이것도 없으면 너무 가난하다는 말

가족이라는 게 뭔가.
젊은 시절 남편을 떠나보내고
하나 있는 아들은 감옥으로 보내고
할머니는 독방을 차고앉아서

한글 공부를 시작했다.
삼인 가족인 할머니네는 인생의 대부분을 따로 있고
게다가 모두 만학도에 독방 차지다.
하지만 깨칠 때까지 배우는 것이 삶이다.
아들과 남편에게 편지를 쓸 계획이다.

나이 육십에 그런 건 배워 뭐에 쓰려고 그러느냐고 묻자
꿈조차 없다면 너무 가난한 것 같다고
지그시 웃는다. 할머니의 그 말을
절망조차 없다면 삶이 너무 초라한 것 같다고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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