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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이제니 시집

나에대한열정 2022. 3. 17.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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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니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2019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이제니 시집에서 추천하고 싶은 시

 

 

 

p. 13
나무 식별하기

그 나무의 이름을 들었을 때 나무는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일평생 제 뿌리를 보지 못하는 나무의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 눈과 그 귀와 그 입에 대해서,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에도 나무는 자라고 있었다. 나무의 이름은 잘 모르지만 밤에 관해서라면 할 말이 있다. 나는 밤의 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너도 밤의 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밤과 나무는 같은 가지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늘과 그늘 사이로 밤이 스며들고 있었다. 너는 너와 내가 나아갈 길이 다르다고 말했다. 잎과 잎이 다르듯이, 줄기와 줄기가 다르듯이, 보이지 않는 너와 보이지 않는 내가 마주 보고 있었다.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꿈에서 본 작은 나뭇잎이었다. 내가 나로 사라진다면 나는 바스락거리는 작은 나뭇잎이라고 생각했다. 참나무와 호두나무 사이에서, 전나무와 가문비나무 사이에서, 가지는 점점 휘어지고 있었다. 나무는 점점 내려앉고 있었다. 밤은 어두워 뿌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침묵과 침묵 사이에서, 어스름과 어스름 사이에서, 너도밤나무의 이름은 참 쓸쓸하다고 생각했다.

 

 

p. 44~45
돌을 만지는 심정으로 당신을 만지고

돌을 만지는 심정으로 당신을 만진다. 가지 하나조차도 제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낮이다. 두 팔 벌려 서 있는 나뭇가지를 보았습니다. 당신은 곳곳에 서 있었습니다. 사라지는 것은 사라지는 것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길가 작은 웅덩이 위로 몇 줄의 기름띠가 흐르고 있었다. 몇 줄의 기름띠 위로 작은 무지개가 흐르고 있었다. 한 방울 두 방울 번지고 있었다. 한 장면 두 장면 이어지고 있었다. 또 다른 세계의 입구가 열리고 있었다, 멈추고 싶은 곳에서 멈추면 됩니다. 끝나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반복되는 질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닥을 향하는 서늘함이다. 투명하고 빈 공간이 있는 하얀색이다. 귀를 기울여 익숙한 소리들을 걸러낸다. 어떤 말은 오래오래 잊히지 않습니다. 고요한 것들이 고요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화체의 기본적인 구조를 숙지하고 있다.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의 통합을 시도한다. 낯선 것일수록 감각을 예민하게 일깨울 수 있습니다. 내일은 달라질 수 있을까요.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연습을 합니다. 마음속에 간직해온 얼굴을 돌이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돌은 모든 것을 보고 돌은 무엇도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 말들 위로 이끼가 내려앉는다. 너와 나라는 두 개의 문이 열린다. 가지가 가지로 자라나듯 목소리가 목소리로 이어진다.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뿐입니다. 바닥에는 몇 개의 나뭇가지가 떨어져 있었다. 죽은 것은 죽은 것으로 다시 죽어가고 있습니다. 시각적으로 인지되지 않는 움직임을 따라간다. 흐르고 있는 그림자를 경계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무엇 하나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환한 빛을 필요로 합니다. 시간과 함께 둥글게 깎이고 있는 돌을 본다. 당신을 만나는 심정으로 돌을 만난다.

 

 

p. 86~87
나무 공에 의지하여

피로를 모르는 마음이 나무 공을 굴리고 있다. 지칠 줄 모르고 종이 위를 구르는 돌멩이 곁을 피로를 모르는 나무 공이 스쳐 지나간다. 나무 공은 둥글고 나무 공은 병들고 나무 공은 돌아갈 수 없다. 나무 공은 나무로부터 온 작은 방울입니까. 나무 공은 방울에 속하지 않습니다. 나무 공은 지나간 계절로부터 도망 나온 지나간 열매입니까. 나무 공은 그 무엇으로부터도 도망치지 않습니다. 나무 공에 의지하여 쓰고 있다. 한 글자 한 글자 쓰고 있다. 바닥에서는 보이지 않는 빛이 떠오르고 있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떠다니고 있다. 이곳에 너와 나 말고 다른 무엇이 있는가. 희미하게 사라지면서 드러나는 무엇이 있습니다. 종이 위에 나무 공, 나무 공위에 돌멩이. 나무 공에 의지하여 듣고 있다. 듣기 전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붉은 새의 울음을 다시 기다리듯이. 의지할 것 없는 바람이 길바닥을 떠도는 작은 나뭇잎을 제 곁으로 데려오듯이. 흘려보낸 목소리처럼 흐릿한 문장 하나를 나무 공 위에 얹어둔다. 보이지 않는 창이 열려 있습니다. 닫힌 것은 열린 것을 필연적으로 끌어당긴다. 나무 공은 비틀거리고 나무 공은 미끄러지고 나무 공은 어제의 낯빛을 기억한다. 희미한 것이 희미한 것 그대로 밝혀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종이 위에 돌멩이, 돌멩이 위에 나무 공, 나무 공에 의지하여 바라보고 있다. 잔디밭의 일요일이었다가, 이름 모를 새가 먹이를 찾는 아침이었다가, 혼자 울고 싶어 길고 긴 길을 따라 걷는 한낮이었다가, 땅 아래 너를 묻고 자꾸만 자꾸만 돌아보는 허공이었다가, 종이 위에 돌멩이, 종이 위에 돌멩이, 피로를 모르는 나무 공이 녹색 잔디밭 위를 구르고 있다. 돌멩이를 쥐고 우는 마음이 있었다. 쓰고 써도 채워지지 않는 백지가 있었다. 너와 나 외에 모든 것이 흐르고 있는 들판이 있었다.

 

 

p. 106~107
풀이 많은 강가에서

풀이 많은 강가에 너는 서 있다. 풀이 많은 강가에는 그림자가 많고, 풀이 많은 강가에는 그리움이 많다. 풀이 많은 강가에는 더듬는 되울림이 많고, 풀이 많은 강가에는 덧없는 되새김이 있다. 풀이 많은 강가에는 모래알이 많고, 풀이 많은 강가에는 조약돌이 많다. 조약돌의 표면 위로 물방울이 말라간다. 조약돌과 물방울은 해 아래 나란하다. 물방울 속에는 무지개, 무지개 속에는 어머니, 어머니는 머리가 하얗고 기도를 한다. 기도와 노래가 순간의 순간을 되살릴 때, 풀이 많은 강가에는 이름 모를 벌래들이 많고, 벌레들 속에는 울음이 가득하다. 울음이 울음일 때 풀벌레는 여럿인 채로 하나이고, 울음이 울음을 벗어날 때 풀벌레는 하나인 채로 여럿이다. 죽을 자리를 찾아들듯 벌레들은 강가로 강가로 날아들고, 공기가 차가워지면 하나둘 왔던 곳으로 사라진다. 풀이 많은 강가에 너는 서 있다. 시간 먼지 구름, 시간 먼지 구름, 자꾸자꾸 잊으면서 자주 많이 존재해야 합니다. 바람과 함께 하나둘 목소리가 불어온다. 풀과 풀 사이의 거미줄 위로 아침의 햇살이 내려앉는다. 거미줄과 거미줄 사이에는 조각조각 난 공간이 있다. 공간과 공간이 겹쳐 흐르는 곳에 어제의 조약돌이 놓여 있다. 조약돌과 조약돌이 물방울과 물방울로 맺혀 있다. 풀이 많은 강가에 너는 서 있다. 풀이 많은 강가에서 너는 조약돌과 물방울과 풀벌레와 어머니와 나란히 함께 흐른다.

 

 

p. 112~113
나무는 잠든다

나는 네가 더 이상 그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나는 네가 나무 속에서 잠자고 있다는 것을 안다. 두 손 들고 하늘 향해 잠자는 나무. 나는 나무속에 잠긴 채 감겨 있는 너의 눈을 본다. 두 발은 흙 속에 잠겨 있다. 잠겨 있는 것은 목소리가 아니다. 담겨 있는 곳은 나무가 아니다. 너는 나무속에 묻힌 채 점점이 자라나는 나무의 눈을 바라본다. 나무의 눈을 바라보면서 점점이 나무의 눈이 된다. 나무의 눈은 바라본다. 나무의 눈은 안아준다. 나무의 바깥에서는 비가 내린다. 정지된 것 위로 무언가 흐를 수 있다는 듯이. 흐르는 것 위로 무언가 정지될 수 있다는 듯이. 나무의 눈은 바깥을 바라본다. 바깥을 바라본다는 것은 이미 안을 들여다본 적이 있다는 것. 이미 안을 들여다본 적이 있다는 것은 다시 한번 더 안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 비는 바깥에서 두 손을 늘어뜨린다. 늘어뜨린 손 아래로 그림자의 바닥이 생긴다. 그림자의 바닥이 안과 밖을 데려온다. 안을 들여다보면 너는 더 이상 그곳에 잠들어 있지 않다. 더 이상 그곳에 있지 않다는 것. 더 이상 그곳에 있지 놓여 있지 않다는 것. 더 이상 그곳에서 말하지 않는다는 것. 더 이상 그곳에서 노래하지 않는다는 것. 더 이상 그곳에서 웃지 않는다는 것. 더 이상 그곳에서 울지 않는다는 것. 그곳에 있지 않다고 말하면 그것을 잊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을 잊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면 그것은 다시 다가올 것인가. 나무의 바깥은 나무의 여백으로 가득하다. 나무는 나무로 흐르면서 잠들어 있는 너를 옮긴다. 멀어진다 말하지 않으면서 멀어지는 나무들처럼, 나무는 잠든다. 너는 흐른다. 나는 안아준다. 부르지 않아도 문득 다가오는 나무들처럼. 나는 네가 더 이상 그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나는 네가 나무속에 잠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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