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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천 년 동안 내리는 비] 정한용 시집

나에대한열정 2022. 3. 2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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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용 <천 년 동안 내리는 비> 2021

 

 

 

 

 <천 년 동안 내리는 비> 정한용 시집에서 추천하고 싶은 시

 

 

 

p. 24~25
아무도 남지 않은 별에서

이틀 못 봐도 그립지 않은 당신,
두 해 못 만나도 보고 싶지 않은 당신,
이백 년 헤어지고도 하나도 아쉽지 않은 당신.

불편한 만남보다
격리된 소통이 더 편리하고 자연스런 불구의 시간들.

내일은 마스크를 살 수 있는 날,
아무도 그립지 않고 누구도 만날 수 없는 별에서
오로지 와이파이와 텔레파시의 기호들만 바쁘게 떠다닌다.

반죽처럼 부푼 우리 사랑은 폭탄이 되고
지워진 곳을 가득 채운 소리와 떨림과 냄새,
들숨과 날숨으로 주고받는 지독한 사랑의 바이러스들.

당신 어디에서 왔어?
이억 년을 뛰어넘어 배달된 카톡가 페북메시지가
우리 이마를 성스럽게 씻어준다.
지금은 유효하지 않은, 젖은 구원처럼.

 

 

p. 34~36
천 년 동안 내리는 비

오늘로 꼭 천 년이군요, 주름마다 새겼던 기록도 무뎌져
나는 어디, 당신은 또 어디? 고문서 연구자들조차 고개를 갸웃거릴 만큼
지워졌지요, 이게 뭐야, 사용하지 않게 된 기호와 의미 사이, 맥락 끊기고요.
화석을 머금은 돌조각조차 남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한 땀씩 꿰맨 기억만은 선명해요.
비가 오니까, 하루도 빠짐없이, 물길도 바람길도 다 끊기고, 드러난 허공,
낡고 헐어 못쓰게 된 맥락 틈으로 붉게 부식된 쇳가루들이 떨어져요.

밤이 고요히 부서져요, 습자지처럼 울음을 머금은 어둠을 펴 말리다, 이게 뭐야
혼자 중얼거려요, 우리는 너무 멀리 왔어, 새소리도 고양이 발자국도
낡아가고, 비었다는 생각도 바싹 말라 텅 비고, 울음의 문서들이 덜그럭덜그럭
혹시 기억해요? 단 석 줄로 된 해독 불가능의 책력,
덜그럭덜그럭, 이젠 너무 늦어 되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주해를 덧붙이고
한참 안으로만 타는 불꽃을 바라보지요, 푸르게 번지는 심연,
꼭꼭 봉인하려는 음모든, 덮이는 봉우리들, 짙은 침묵들.

우리는 둥둥 떠내려가요, 떠내려가며 인사, 오랜만이군.
더 어두워지고, 골목마다 침묵들이 분주히 오가고, 어이, 밥은 먹었어?
꼬여버린 기호가 우리 가슴을 묶을수록 어둠은 더 단단해지는데
여긴 어디, 당신은 지금 어디? 자꾸 비 내려요, 배가 고픈데
풀도 무성해 길이 끊겼는데, 자꾸 어디로, 그런데, 여기가 어디죠?
그런데 사실, 아무도 내게 질문 따위는 하지 않아요,
어디냐고, 누구냐고
밥은 먹었느냐고, 비가 오니까, 천 년 동안.

 

 

p. 76~77
숲에 대한 생각

나무는 불이 되고, 그루터기는 흙이 된다.
시간은 빠르게 늙어간다.

모두 옷을 벗고 있다. 서로 몸을 만지고 비비고 핥고 있다.
한때 살아 있던 것들은 모두 저렇게 섞이고 있다.

개미들이 시속 오 미터로 걸어가는 사이, 그 잎사귀 위로 흘러내린 햇살이 무겁게 가지를 휜다. 버섯이 났던 자리에 지금은 어둠이 고여 있다.

어제는 숲을 지나 모임에 갔더니, 모두 '헬조선'을 떠날 궁리를 하고 있다. 독한 음모가 나무 수액처럼 온몸을 적셨다. 누군가, 혁명이 필요해, 아니면 테러라도, 라고 외쳤다.

믿지 말자, 믿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수장되었다.

자작나무들이 무더기로 물구나무를 서서 사진을 찍는 장면을 연출한 적이 있다. 흰색이 가끔은 절망을 표백시키는 힘이 된다. 목숨 붙어 있다고 다 살아있는 건 아니다.

이런 건 아무리 써봐도, 변명밖에 안 된다. 그러니 ······ 안녕!

 

 

p. 94~95
사진 한 장

어버이날 페이스북 담벼락엔 뜨뜻아픈 사연이 넘친다.
아들딸과 저녁 약속했다는 사람, 치매로 기억 잃은 아버지께 꽃편지 쓴 사람, 미국으로 입양되어 이름도 모르는 친부모 찾는 사람.

나도 뭔가 쓸 말이 없을까?
그렇지, 지난달 고향 집에 갔다 오래된 사진첩을 찾아냈었다.
유품이니 내가 보관해도 되겠다 싶었는데, 일찍이 본 적 없는 어머니 처년 적 사진이 하나 툭 떨어지는 것이었다.
아주 미인이어서 자랑해도 될 것 같았다.

페이스북에 엄마 얼굴 공개해요.
승낙을 받으러 전화를 걸었지만, 어디 마실 가셨는지 통 받지를 않으신다.
교환원의 안내에 의하면, 지금은 연결이 어렵네요, 세월 조금 더 지나 만나게 되거든, 그때 직접 여쭤보는 게 어떻겠어요?

그때까지 기다리기 어려우니, 대신 좀 여쭈어 달라 했다.
천 개의 해가 지고, 만 개의 달이 떴는데요,
엄마 계신 곳에도 봄 오면 꽃 피고 가을 되면 바람 부나요? 거기, 페이스북 안 되면 카카오톡은 되나요?
여기, 아프게 그리워하는 사람 하나 있는 거, 아시나요?

 

 

p. 111
머무는 시간

눈 내렸다는 소식을 먼 환청처럼 듣습니다.
사람 사는 곳 어디에나 소리가 있고,
그 소리에 예민해진 귀를 갖은 자가 간혹 있습니다.
소리가 향기나 별빛처럼
시각과 후각을 두드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는 침묵이 더 좋습니다.
침묵 속에 배어 있는 단단한 응집이 더 좋습니다.
이제 여행 막바지,
지금껏 어둠을 향했다면 오늘은 빛을 찾아갑니다.
곧 돌아갑니다.

 

 

p. 123
빗소리를 새기다

사각사각 연필 깎듯 비가 내린다.
둥글었던 방울이 길쭉하고 얇게 저며 흩어진다.
비린내와 나무 향이 섞인다.
소복이 쌓인 소리 위에 냄새가 겹친다.

듬성듬성 검은 가루도 날린다.
규칙을 이룬 프랙털처럼 우주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래도 지금 우리가 의심하는 이 순간까지 지우지는 않는다.
소리와 냄새 사이에서 서성인다.

어디에선가는 미완이었을 것이다.
혹 절대의 신이었을지도, 다만 그 흔적이 매우 단순하다.
아프리카부터 은하수까지 흠뻑 적신 비가
지금 여기에 무던히 내리고 있다.

 

 

프랙털 또는 프랙탈(fractal): 작은 구조가 전체 구조와 비슷한 형태로 끝없이 되풀이 되는 구조를 의미한다. 이런 특징을 자기 유사성이라고 하며, 자기 유사성을 갖는 기하학적 구조를 프랙탈 구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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