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희영 《셰이커》
이 소설은, 제12회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하며 40만 독자의 뜨거운 사랑을 받은《페인트》의 작가 이희영의 타임슬립 판타지이다. 가끔은 뻔하게 보이는 클리셰에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어느 정도 답이라고 다들 생각하기에 클리셰가 되는 것일지도.
청소년문학이라고는 하지만, 정말 이 소설을 오롯이 이해하기에는 인생을 어느 정도 산 이후나 가능한 것 같다. 정말 좋을 때는 그게 좋은 시절이라는 것을 모르니까. 뭐든지 가능한 때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니까.
지금을 잘 살아야 한다는 말, 결국은 미래의 과거는 오늘이기에 미래의 나에게 덜 부끄럽거나 덜 미안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나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말은, 자주 반복해서 되내이며 실천하지 않는 한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운 말이다.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고 지나오지만, 난 늘 현재의 나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그래서 이런 타임슬립 판타지에 매력을 느낀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순간, 그 순간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면 무엇인가는 달라질까. 어릴 때에는 달라진다고 생각했다. 아니 몇년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늘 내 선택은 같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이후로는, 순간순간에 조금 더 충실해진 것 같다. 그러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정말 내가 나이가 든 순간에 후회라는 것을 하지 않을 테니까. 적어도 덜 할테니까. 정말 아무것도 새로 할 수 없는 나이에 후회라는 것이 밀려오면 너무 슬프지 않겠는가. (최근에 읽었던 제프 베조스의 이야기에도 그런 말이 나온다. 80세에 가서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할 일은 만들지 않는다고.)
소설속의 나우를 보면서, 나우의 타임슬립을 보면서 어쩌면 그게 타임슬립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에 대한 불확실한 마음을 확인하고 싶은 과정은 아니었을까 하는. 이런 경우에는 어떠했을까 상상을 해보면서 하나씩 지워나가는 과정 말이다.
그런 과정속에 제대로 된 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원하지 않더라도 조금 더 나은 답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지금 《페인트》를 읽고 있는 초딩 아들에게 이 책을 넘긴다. 그 아이는 어떤 말을 들려줄런지......
📒 p. 86
삶은 과거에서 현재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삶이란 어쩌면 그 위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는 일인지도 몰랐다. 시간은 때때로 훌쩍 건너뛰기도 하고, 한곳에 오롯이 멈춰 있기도 하니까.
📒 p. 97
평생을 오직 한 사람으로 살아간다고 믿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수많은 '나'들이 찰나에 존재했다. 덧없이 사라지고 다시 존재함을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탈피하고 그 껍질을 버리는 갑각류처럼, 인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 p. 123~124
"돌아갈 수 있다고 모든 것을 다 바꿀 수 있을까요? 어제는 오늘의 과거입니다. 내일의 과거는 오늘이지요. 내일은 그다음 날의 과거가 됩니다. 우리는 늘 과거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은 내일의 과거이니, 오늘 뭔가를 헌더면 내일이 바뀌지 않을까요? 과거는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매일매일 살고 있을 뿐입니다. 하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침은 오후가 되는 즉시 과거가 되고, 오후는 밤이 되는 순간 과거가 되니까요. 우린 과거에 살지만, 정작 그 과거를 바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손님은 뭔가 시도를 했습니다. 그렇다고 뭐든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만약 그렇다면 아마 인간에게 어려움이나 좌절, 실패나 패배도 없겠죠. 세상에나, 그건 상상만으로도 지루하군요. 사는 게 너무 재미없지 않겠습니까."
📒 p. 125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게 있습니다."
📒 p. 139
"시도해 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 p. 158~159
세상은 내 의견과는 상관없는 일들이 너무 많이, 자주 일어난다. 그리고 그 억울한 시간을 묵묵히 견디는 게 삶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전장을 누빈 장수의 몸처럼, 사람의 마음에도 수많은 상흔이 생긴다. 이런 깨달음이 하나둘 늘어 가면 세상은 비로소 그를 어른이라고 부를까. 가슴에 우물 하나가 생긴 기분이었다. 물이 모두 말라 버려 돌멩이를 떨어뜨렸을 때 찰방, 소리가 아닌 뿌연 흙먼지가 일어나는 사막 같은 곳. 아무리 물을 마셔도 가슴속 갈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 p. 198~199
"조명이 비추는 곳은 환하고 밝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텐더가 손가락을 세워 머리 위에 매달린 조명을 가리켰다.
"살아가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쁨과 행복, 감사와 평안, 아니면 불안과 우울, 좌절과 비통. 생각의 조명이 어디를 비추느냐에 따라 유독 그 부분이 도드라져 보일 수 밖에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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