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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소설] 고비키초의 복수 (나가이 사야코/은행나무 출판사)

나에대한열정 2024. 6. 9.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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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이 사야코 《고비키초의 복수》



정월 그믐날의 눈 내리는 저녁, 에도의 변두리 마을, 고비키초의 극장 뒤편에서 부모님의 원수를 갚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뒤에, 한 남자가 사건의 진상을 알고 싶다며 고비키초의 극장을 찾으며 시작된다. 남자는 당시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을 만난다. 극장의 바람잡이인 문전 게이샤 잇팟치, 무술연기 담당인 요사부로, 의상준비와 수선을 담당하는 호타루, 소도구를 담당하는 규조와 그의 부인 오요네, 각본을 담당하는 노노야머 쇼지. 이렇게 차례대로 만나면서 그날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그들의 개인사들도 함께 듣는다.

책을 읽기 전에는 복수극의 목격담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서, 영화 <라쇼몽>이 생각났었다. 하지만 결이 완전 다르다. 책을 읽다보면, 이렇게 분명해 보이는 상황에서 미스터리가 존재할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잠시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아주 잠시 말이다. 미스터리라고 하기엔 너무나 따뜻함을 안고 있는 책이다.

✏️ 책제목에 갇혀서 책을 읽어나갔다. 복수라잖아. 복수.. 뭔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첫 목격자의 이야기가 끝날때만 해도 글에서 묻어나는 잔잔함이 단조로웠다. 시시했다.
그러나 다음 목격자들의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어느새 '복수'는 잊어버리고 그들 개인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렇게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서 '복수'라는 자체는 잊어버리고 있을 때 작가는 정말 '복수의 뒷이야기'를 보여준다. 

✏️ 글 사이사이에 '속박', '족쇄', '짐' 이라는 단어들이 여러번 나온다. 복수를 해야하는 입장에서 가지고 있는 것들, 그리고 목격자들이 가지고 있던 그들만의 것들.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채우는 족쇄로 인해, 인생 자체를 결정지어놓고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적으로 묶어놓은 틀이 있다면, 사실 그 자체는 너무나 허술한 테두리일수도 있을텐데, 그것을 자신에게 옭아매는 이는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인 것이다. 나 역시 살아오면서 그랬다. 이거는 벗어나면 안돼. 이런 건 하면 안돼. 늘 가이드라인의 감독자는 나였다. 나이가 들면서 정말 이런것들이 필요했나 하는 생각들이 든다. 작가의 글속에서도 이런걸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다른 길도 있어. 다른 생각도 해봐. 너를 옭아매고 있는 족쇄가 정말 의미가 있는거야. 이런  것들 말이다.              
                                                 



p. 67
물러설 수 없는 사정이란, 그 누구보다도 스스로가 그렇게 정하는 것입니다. 길을 벗어나도 의외로 다부지게 살아갈 방법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습지요.


p. 96~97
"뜻만으로 무사가 될 수 있다는 것 또한 허황된 소리다."

"충의를 다하려 해도, 천하를 위해 일하려 해도, 신분이 없으면 너는 그 걸인과 다를 바 없다. 칼에 베여도 그저 버려질 뿐인 처지지. 억울하면 스승에게 머리를 조아려서라도 봉직할 곳을 얻어내라. 그제야 비로소 네 뜻을 내세울 수 있는 법이다. 지금 네 말은 결국 패배자의 개소리에 지나지 않아. 진정한 무사가 되고 싶다면 응석은 집어치우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두루 받아들일 각오를 다져야 해."


p. 116~117
고지로는 악행에 '눈을 감아라'라고 말씀하신 아버지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고 싶었소. 아버지를 존경하기에 할 말은 해야 했던 것이오. 그러지 않고 멋대로 아버지에게 실망했고, 실망했다는 사실에 괴로워했소. 그것은 일종의 응석 아니었을까.


p. 156
"남을 얕잡아 보는 자들도 결국은 뼈만 남는다."


p. 171
"난 너보다 심성이 좋지 못해. 세상은 계단처럼 되어 있어서 위에 선 사람은 아래에 선 사람을 내려다보지. 그러니 기어올라야 한다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몰아붙여서 여기까지 왔단다. 하지만 네 말처럼 기어오르든 미끄러져 떨어지든, 불타면 뼈만 남아.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한층 편해졌어."


p. 183
무가의 자제인 기쿠노스케 씨는 호타루 씨가 말했던 계단의 꼭대기에 있는 사람이에요. 우리같이 미천한 자와는 격이 다르지요. 하지만 그 높은 곳에서 하사받은 칼이라는 강력한 힘이, 도리어 족쇄가 되기도 한답니다. 복수를 맹세하고 고향을 떠난 것도 무가의 사내이기에 짊어져야 했던 무거운 짐이에요.
난 지금까지 살명서 남을 부러워하거나 애처로워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애초에 가진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겠지요. 탐내봤자 허무할 뿐이고, 배신당하면 괴롭기만 하잖아요. 하지만 만약 유복한 집에 태어났다면, 하고 생각해본 적이 없지는 않답니다. 그래서 나와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무사나 귀인의 따님이 나오는 연극을 재미있어하는 것이고요. 그러나 어여쁘게 생긴 기쿠노스케 씨와 함께 지내는 동안, 어디에 태어나는 괴로운 일은 있는 법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런 의미애서 사람은 다들 동등한 법이지요."


p.  185
"겉가죽도, 지위도, 태생도 불타버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 사로잡히면 사로잡힐수록 고통스럽게 조여드는 족쇄일뿐이지. 하지만 뼈만 남아도 후회 없는 삶이 있는지도 몰라. 나 같은 사람이야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뼛속까지 소신을 세워서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굴러들 곳이 있다는 사실이 조금쯤은 버팀목이 되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이렇게 보잘것 없는 나 같은 자도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마음을 위로해주지 않을까......


p. 257
세상에 밝고 즐겁기만 한 사람은 없어. 그 누구든 마음속의 짙은 어둠이며 수렁과 타협해가며 지내고 있을 뿐이야. 그런 속내를 드러낼 상대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도 정이고 말이야.




p. 266~267
"사람은 누구나 텅 비어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내일 먹을 밥이며 오늘 누울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죽을 둥 살둥 애쓰느라 알아차리지 못하지요.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것은 그만큼 도련님이 복 받았다는 뜻입니다."

"복 받았다는 것은 나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일세. 하지만 그래서는 살아 있는 기분이 들지 않아. 하릴없이 공허해지지. 복에 겨운 소리라는 것은 알지만, 더는 못 견딜 것 같은 때가 있어. 그리고 그런 식으로 느끼는 나 자신이 누구보다도 싫어. 대체 어찌하면 좋을지 늘 생각한다네."


p. 269
"재미있어하는 것에는 각오가 필요한 법입니다."


p. 284
"뭘 쓰든 상관없어. 재미는 사람의 수만큼 있으니까. 남을 위해서 써도 되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써도 돼. 그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바를 늘어놓아도 괜찮아. 그것이 누군가의 마음에 탁 전해지면 만만세야. 재미있으면 그만이라고."


p. 332
홀로 에도에 가서 깨달은 점 중 하나는, 때때로 남을 믿고 의지할 용기도 필요하다는 것이야. 뭐든지 혼자 짊어지겠다는 마음가짐은 대견하지만, 그래서는 무엇 하나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



p. 338
제자리를 맴도는 기분이었지. 스스로에게 똑같은 물음을 던졌지만, 매번 다른 답이 나왔다네.


p. 350
애당초 '신분'이란 무엇인지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어. 내가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세상의 얼개는 비뚤어지고 기묘한 것이 아닐까 싶더군.
그래도 그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어찌하고 싶은가.
그래도 무사로 살기를 바라는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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