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차가운 피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20년대, 한 남자가 남극 근처의 외딴섬에 자원해서 가게 된다. 사람도 싫고 세상도 싫고, 그랬던 그가 이곳에서 할 일은 기상관. 하지만 섬에 도착해보니 전임기상관은 보이지 않고, 유일하게 보이는 사람인 등대지기는 그에게 인간적인 호의를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알 수 없는 정체들과의 전투(?)가 시작된다. 막아내지 못하면 그가 죽을 수밖에 없는.
처음에는 아일랜드와 영국에 관한 얘기가 나와서 역사와 관련된 책인 줄 알았다. 뒤로 갈수록 SF도 아닌 것이 스릴러도 아닌 것이. 그런데 묘하게 흡입되는 무언가가 있다.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될 때, 인간이 느끼는 사랑과 미움, 고독함과 원초적 공포가 만들어내는 인간의 잔혹함, 소통되지 않는 것과 불신이 합쳐져서 빚어내는 인간의 악한 성향들.
이름 없는 주인공, 무너지는 도덕성.
어쩌면 처음부터 아무 것도 "아닌" 것,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인간 내면의 괴물이 드러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p. 5
우리는 우리가 증오하는 사람들과 결코 멀리 떨어질 수 없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진정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다. 배에 오르는 순간, 나는 이 냉엄한 진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관심을 둘만한 진리도 있고 그냥 지나치는 것이 나은 것도 있다.
p. 16
다시 돌아가야 할까? 모든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했다. 하지만 이런 경우 자신도 모르는 뭔가에 마음이 끌리기 마련이다. 내가 이곳에 남아있기로 마음을 정한 것은 어처구니 없는 이유 때문이었다. 지구를 반바퀴나 돌아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p. 18~19
하늘 중턱에 걸려있는 태양은 작은 오렌지 만한 크기로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위도상 태양은 절대로 천정에 닿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내 묘사는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다만 내가 본 것이 그랬을 뿐이다. 한 사람의 눈에 들어온 풍경은 감추어 둔 내면의 반영일 때가 많으니까.
p. 20
살다 보면 과거와 흥정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우리는 때로 외딴 바위에 걸터 앉아 실패로 얼룩진 지난 날과 한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미래 사이에서 협상점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나 역시 시간이 흐르고 반성하고 거리를 유지하다 보면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단지 그 이유로 이 섬까지 왔다.
p. 23
나는 섬의 은둔자가 아니라 내 기억속에 갇힌 은둔자였다.
p. 29
삶을 선택하느냐 죽음을 선택하느냐, 그는 세상에 이 두 종류의 태도가 있다고 말했다.
p. 31
나는 극적인 운명일수록 역설적으로 전개된다고 믿는 사람이다. 우리는 훌륭한 아일랜드인이었기에 전투에서 패할 때마다 매번 더 열심히 다음 패배를 준비했다. 결국 적군의 기운을 뺀 것은 이런 흰개미와 같은 끈기였다.
p. 32~33
우리 조국은 지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미래의 개념이었다.
우리는 영국제국의 사악함에 대해 무한한 관대함으로 맞섰다.
우리는 자유보다 더 숭고한 양심을 가지고 싸웠다. 그렇기 때문에 아일랜드의 해방은 좀 더 평등한 다른 세상의 전주곡이어야 했다.
전에는 사람들이 무기를 숨겼지만 이제는 무기아래 사람이 숨었다.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그토록 가깝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너무나 멀리 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한 가지 명분만은 버리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명분이 나를 버린 것이다. 내 마음속에서 믿음 이상의 무언가가 사라져버렸다. 희망이라는 단어의 모든 의미가 퇴색되었다. 아일랜드 역사는 언제나 반란의 역사, 빛나는 반란의 역사였다. 그토록 순수했던 아일랜드의 명분은 실패했다. 그 어떤 다른 명분도 꽃을 피우지 못하리라.
p. 34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역학의 노예다. 복제될 수밖에 없는 운명의 노예다.
p. 36~37
섬의 모든 활기는 숲에 모여 있었다. 하지만 깊이 들어갈수록 숨겨진 생명력이 느껴졌다. 예측할 수 없이 섬뜩하고 거친 생명력이.
묘하게도 우리는 선택적으로 주변 사물을 지각한다.
p. 40
고통은 언어보다 앞선 것이므로 언어로는 표현되지 않는다.
p. 46
피로가 힘겹지는 않았다. 오히려 피로가 나를 힘겨워하고 있었다.
p. 109
글로 쓸 수 있는 것은 기억할 가치조차 없다.
p. 125
삶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세상을 돌아다니다 보면 이 덧없는 여행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
p. 134
아무것도 없었다. 시야는 겨우 30 아니 40미터 정도였다. 그 보다 더 좁을지도 모른다. 오른쪽으로 고래의 시체같은 배의 바닥이 보였다. 바닷속은 엄청나게 넓었다. 알 수 없는 입자들이 까만 눈송이처럼 이리저리 떠다녔고 뱀처럼 생긴 해초들이 조금씩 흔들렸다. 탁 트인 이 거대한 공간에는 끝도 없이 펼쳐진 어둠뿐이었다. 가톨릭의 가르침과 모순되는 광경이었다. 지옥은 갑자기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빠져드는 곳이라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p. 146
철학과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서로 투쟁한다. 하지만 전쟁과 음욕은 순전히 몸의 문제다.
p. 155
나는 굳이 그와 말씨름을 하지 않았다. 늘 똑같았다. 겉으로는 대화를 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언제나 독백이었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p 173
눈이라는 것은 보는 것이지만, 관찰하는 눈은 드물고, 보고 깨닫는 눈은 더더욱 드물다.
p.194
양심의 가책이 고집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p.199
이따금 연민은 언덕 너머 풍경처럼 갑자기 찾아온다.
p. 200
여기에서 바로 인간의 나약함이 드러난다. 희망을 지나치게 믿은 나머지 나중에는 현실과 혼동하는 상황에 이르는 것이다.
2018년도에 영화로도 개봉되었다.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궁금하기는 한데,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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