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통째로 외워버리고 싶은 책. 간만에 인생책을 한 권 추가한다.
줄거리가 있으나 줄거리가 필요 없는 책. 오히려 그것에 초점을 맞추면 책의 의미가 없어지는 책.
p. 25
그가 라틴어 문장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문장들이 과거의 모든 침묵을 자기 안에 품고 있기 때문이었고, 뭔가 대답하라고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언어는 온갖 소란스러움에서 떨어져 있었고, 확고부동하며 아름다웠다.
p. 28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p. 33
오늘 오전부터 제 인생을 조금 다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문두스 노릇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새로운 삶이 어떤 모습일지 저도 모릅니다만, 미룰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흘러가 버릴 것이고, 그러면 새로운 삶에서 남는 건 별로 없을 테니까요.
p. 36
뚜렷하지 않은 심연, 인간행위의 표면 아래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비밀이 있을까? 아니면 인간은 자신이 만천하에 드러내는 행동과 완벽하게 일치할까?
p. 44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명상록>중)
"내 영혼아, 죄를 범하라. 스스로에게 죄를 범하고 폭력을 가하라. 그러나 네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나중에 너 자신을 존중하고 존경할 시간은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번, 단 한 번 뿐이므로. 내 인생은 이제 거의 끝나가는데 너는 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았고, 행복할 때도 마치 다른 사람의 영혼인 듯 취급했다......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p. 47
무엇인가와 작별을 할 수 있으려면 내적인 거리두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정체불명의 '당연함'은, 그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확실하게 알려주는 '명료함'으로 바뀌어야 했다. 전체적인 윤곽을 지닌 그 무엇인가로 응집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p. 55
소리 없는 우아함. 익숙한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이 격렬한 내적 동요를 동반하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일 것이라는 생각은 오류다.
인생을 결정하는 경험의 드라마는 사실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할 때가 많다.
경험을 하는 당시에는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인생에 완전히 새로운 빛과 멜로디를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 이 아름다운 무음에 특별한 우아함이 있다.
p. 77~78
이렇게 계속 학교로 다시 찾아오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과거는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갔으나 미래는 아직 시작되기 전이었던, 그 순간의 학교 운동장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 시간은 머뭇거리며 숨을 멈추고 있었다.
아니면 지금 내가 아닌,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었던 그 시절로 다시 가고 싶은- 꿈과 같이 격정적인- 갈망인가.
이 갈망은 약간 이상하고 역설의 냄새가 나며, 논리적으로 독특하다. 아직 미래를 경험하지 않은, 생의 갈림길에서 있는 사람은 이런 갈망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지나온, 그래서 과거가 되어버린 미래를 겪은 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돌이키기 위해 옛날로 돌아가길 원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학교로 다시 가고,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향한 그리움을 채우려는 갈망으로 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이것보다 더 정신 나간 일이 또 있을까? 존재하지 않는 대상의 갈망에 따라 움직이는 것......
p. 110
프라두 묘비 기단에 쓰여 있던 말
"독재가 하나의 현실이라면 혁명은 하나의 의무다."
p. 116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잔인함과 자비심과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으로 가득한 감독.
p. 122~123
사람들의 만남이란 한밤중에 아무런 생각 없이 달려가는 두 기차가 서로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우리는 뿌연 창문 저편의 흐릿한 불빛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시야에서 바로 사라져서 알아볼 시간도 없는 사람들에게 빠르고 덧없는 시선을 던진다.
p. 161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다." 아버지는 가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p. 182
그의 의지가 멈추었기 때문에 시간이 멈추었고, 이 세상도 멈추어 섰다.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을 만큼 조용히......
p. 183
영혼의 그림자. 사람들이 어떤 한 사람에 대해 하는 말과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 가운데 어떤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다른 사람에 대해 하는 말이 스스로에 대해 하는 말처럼 확실한가? 스스로의 말이라는 것이 맞기는 할까? 자기 자신에 대해 사람들은 신빙성이 있을까? 그러나 내가 고민하는 진짜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정말 고민스러운 문제는 이런 이야기에 도대체 진실과 거짓의 차이가 있기나 할까 라는 것. 외모에 대한 이야기에는 물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길을 떠날 때는? 이 여행이 언젠가 끝이 나기는 할까?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가?
p. 184~185
지금의 내가 아닌,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그 시절로 다시 가고 싶은...꿈과 같이 격정적인 갈망...
이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길 원하면서 그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겪은 나를 이 여행에 끌고 가려고 하는 것, 이는 모순되는 갈망이 아닌가.
그때와 같으면서도, 동일하지 않으므로 더 이상 같지는 않은 감정이었다. 더 이상 같지 않다는 것, 다른 감정임을 깨닫고 나니 마음이 아팠다.
p. 202
"천박한 허영심은 우둔함의 다른 형태죠. 우리의 모든 행위가 우주 전체로 봤을 때 얼마나 무의미한지 몰라야 천박한 허영심에 빠질 수 있어요. 그건 어리석음이 조야한 형태로 나타난 거에요."
p. 207
이름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입히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다.
p. 215~221
프라두의 졸업연설
이 부분은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무언가 부끄러웠다.
p. 260~261
그가 바로 철저한 무신론자이자 현실적인 낭만주의자 조르지, 프라두가 완전해지기 위해 필요했던 친구 조르지였다. 탁월한 프라두가 자기보다 체스 실력이 나았다고 그렇게나 존중해준 사람, 불경스러운 프라두의 연설이 끝나고 개가 짖어대자 제일먼저 웃음을 터뜨린 사람, 음악적 재능이라곤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고 활이 부러질 때까지 콘트라베이스를 긁어댄 사람, 그리고 에스테파니아 에 스피노자를 죽여야 한다고 판단했다는 데서 프라두와 의견이 달랐던 사람, 바르톨로메우 신부의 짐작이 맞다면 그로부터 몇 년 뒤 묘지에서 눈길을 주지 않은 채 그녀에게 다가갔던 사람.
p. 264
조르지가 고개를 저었다.
"난 지금 내 인생이 완전해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경험을 하지 못했다고 후회하는 게 아니야. 현재 완성되지 못한 자기 인생에 대한 의식 자체가 불행이라면 누구나 평생 필연적으로 불행할 수밖에 없지. 반대로 완전하지 못하다는 자각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인생을 위한 조건이야. 그러니 불행을 만드는 요소는 분명히 이와는 다른 그 무엇이지. 그건 바로, 완성되고 완전한 경험을 하는 건 앞으로도 불가능하다는 인식이야."
p. 284
조르지가 가지고 온 종이는 위에 '신의의 이유'라는 제목이 붙은 목록이었다. 프라두와 오켈리는 신의가 생길 수 있는 이유를 제목 아래에 적었다.
"타인의 잘못, 발전을 향해 함께 가는 발걸음, 함께하는 고통, 함께하는 즐거움, 죽음이 주는 결속감, 같은 확신, 외부를 향한 공동의 싸움, 같은 장점, 같은 단점, 친근함이라는 공통된 욕구, 같은 취미, 같은 혐오, 나누는 비밀, 함께하는 상상과 꿈, 함께하는 열광, 함께 나누는 유머, 공통의 영웅, 함께 내린 결정, 함께한 성공과 실패, 승리와 패배, 함께한 실망, 함께 저지른 실수.
p. 284~285
"아마데우는 사랑을 믿지 않았소. 유치하다고 생각하며 그 단어를 피했지. 그는 사랑에는 욕망과 만족과 편안함밖에 없다고 말하곤 했소. 이 모두가 헛된 것이라고 했지. 제일 허무한 건 욕망이고 그다음이 만족이며, 누군가에게서 보호를 받는다는 편안한 느낌도 언젠가는 결국 부서지는 것이라고 했소. 삶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고 힘들어서 우리 감정을 다치지 않고 그 일들을 견디어내기는 힘들다는 것이었소. 그래서 신의가 중요하다고 했지. 그의 신의란 감정이 아니고 의지요 결정이며, 영혼의 견해 표명이라고 말했소. 우연한 만남과 감정을 필연으로 바꾸는 그 무엇이라고, 영혼의 숨결이라고 했지. '그저 낮은 숨결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영혼의 한 부분이리'라며.
그는 잘못 생각한 거요. 우리 둘 다 잘못 생각했지.
우리가 다시 리스본에 왔을 때, 그는 혹시 자기 자신에 대한 신의라는 것도 존재할까 자주 생각했소. 생각으로든 행동에서든, 스스로에게서 도망치지 않을 의무 말이오. 자신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편을 들 준비 자세."
p. 292~293
실망이라는 향유. 실망은 불행이라고 간주되지만, 이는 분별없는 선입견일 뿐이다. 실망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고 원했는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으랴? 또한 이런 발견없이 자기 인식의 근본을 어떻게 알 수 있으랴? 그러니 실망이 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명확함을 어떻게 얻을 수 있으랴? 그러므로 우리는 실망을, 없으면 우리 인생에 더 도움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한숨을 지으며 할 수 없이 견뎌야 하는 그 무엇이라고 취급해서는 안 된다.
자신에 대해 정말 알고 싶은 사람은, 쉬지 않고 광신적으로 실망을 수집해야 한다. 실망스러운 경험의 수집이란 그에게 중독과도 같을 것이다.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중독, 그에게는 실망이 뜨겁게 파괴하는 독이 아니라 서늘하게 긴장을 풀어주는 향유임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의 진정한 윤곽이 무엇인지 눈을 뜨게 해주는 향유...
p. 300
영원한 젊음. 젊은 시절 우리는 우리가 불멸의 존재라고 생각하며 산다. 죽을 운명이라는 인식은 종이로 만든 느슨한 끈처럼 우리를 감싸고 있어 피부에 거의 닿지 않는다. 인생에서 이런 상황이 바뀔 때는? 이 끈이 우리를 점점 휘감아 오고 마지막에는 목을 조일 듯하는 건 언제인가? 절대 느슨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부드러우면서도 굽히지 않는 압박을 느끼는 때는 언제인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서 이런 압박을 깨달을 수 있는 징후는 무엇인가?
p. 315
내적인 넓이. 우리는 지금 여기서 산다. 예전에 다른 곳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과거다. 대부분은 잊어버렸고, 남아 있는 작은 부분들도 무질서한 기억의 파편들일 뿐이다. 단편적인 우연 속에서만 빛을 내다 사라지는 기억들......
p. 317
중단된 삶. 온갖 약속으로 가득한 그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것보다 더 흥분되는 일이 또 어디에 있으랴? '지금'과 '여기'가 본질적이라는 확신으로 이것에 집중하는 행위는 오류이며, 또한 불합리한 폭력이다. 중요한 것은 확실하고 느긋하게, 알맞은 유머와 멜랑콜리로 '우리'라는 시간과 공간상의 내적인 경치 속에서 움직이는 일이다.
p. 322
친근함과 거리의 문제에서 왜 난 갑자기 문맹자가 된 걸까? 아니면 느끼지 못했을 뿐 지금까지 늘 그랬던가? 왜 나에게는 프라두의 친구 조르지 오켈리와 같은 사람이 없었을까? 신의와 사랑에 대해, 그리고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p. 356
계획된 것도 아니고 겉으로 드러나지도 않지만,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남기는 불가피하고도 쉴 새 없는 부담의 흔적-절대 없애지 못하는 화상의 흉터처럼
p. 360
"사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으면 그동안의 규정들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지요. 그러면 머리가 어떻게 된 듯이 보이고, 정신병원에 가야 할 듯하지요.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정신병원에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가야 하지요.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사는 사람들 말입니다."
p. 362~363
사람들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정도로만 자기를 결정합니다.
어떤 사람이 상상을 통헤 받는 이미지에 대해 알지 못하면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과연 무엇을 알 수 있을까?
p. 384
그러나 다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길을 떠날 때는? 이 여행이 언젠가 끝이 나기는 할까?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가?
p. 387
이따금 나는 인간의 약점보다 '생각없음'이 더 많은 잔인함을 초래한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들이 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루만, 단 하루만이라도 내 고통을 똑같이 느껴보길 원한 적도 있다.
p. 434~435
유치함은 모든 감옥 가운데 가장 악질적이다. 창살은 단순하고 비현실적인 감정으로 도금되어 있어, 사람들은 이를 궁전의 기둥으로 착각한다.
p. 436
누군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어떤 일을 할 때, 그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수백만 명이 지켜보며 유치하다고 웃어댄다면 우린 이런 일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p. 481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로 표현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p. 485~489
움직이는 기차에서처럼, 내 안에 사는 나. 내가 원해서 탄 기차는 아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아직 목적지조차 모른다.
기차가 절대 멎지 않기를 바랐다. 어디선가 영원히 멈추어버리지 말기를, 그런 일은 절대 없기를.
이 기차에서 절대로 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았다. 내가 기차의 궤도와 방향을 바꿀 수 없다는 것, 속도도 정할 수 없다는 것, 기차가 보이지 않고, 누가 기차를 운전하는지, 기관사가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도 전혀 알 수 없다.
내가 타고 있는 칸의 불 빛이 바뀐다. 불빛은 내가 결정할 수 없다.
어쨌든 내 칸은 생각과 많이 다르다. 그것도 아주 많이......
기차 칸에는 시간표가 놓여 있다. 난 우리가 어디에서 정차하는지 보려고 애쓴다. 그러나 종이는 텅 비어 있다. 정차한 역에는 이정표가 없다.
난 갑자기 일을 바로 잡아야겠다는 욕구에 사로잡힌다. 그런데 유리창이 뻑뻑하여 열리지 않는다. 난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지른다. 터널을 호흡을 힘들게 한다.
가끔 기차가 언제든지 탈선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깜짝 놀라기도 한다. 그렇다. 나를 놀라게 하는 생각은 대부분 이거이다. 그러나 가끔 작렬하는 어떤 순간에는 이 생각이 마치 복을 내리는 번갯불처럼 나를 뚫고 지나간다.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밀려 온 힘을 다하여 정신을 집중한다. 한 번만, 단 한번만이라도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다. 나에게서 금방 다시 멀어지지 않도록 진정으로 이해하기. 그러나 이 시도는 성공하지 못한다.
난 터널을 좋아한다. 터널은 희망의 상징이다. 지금이 밤만 아니라면 이제 곧 터널 밖으로 나가 밝아지리라는 희망......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 구속력이 없으며, 잊혀질 운명이다.
여행은 길다. 이 여행이 끝나지 않기를 바랄 때도 있다. 아주 드물게 존재하는, 소중한 날들이다. 다른 날에는 기차가 영원히 멈추어 설 마지막 터널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p. 496~497
분노라는 들끓는 독. 타인 때문에 -그들의 뻔뻔함과 부당함,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태도- 우리가 화를 낸다면 우리는 그들의 권력 아래에 놓인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영혼을 갉아 먹고 자란다.
우리가 입은 피해에만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가 오로지 우리 안에만 퍼져간다는 사실에도 분노한다.
분노를 올바르게 다스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만나도 상관없는 무정한 존재, 차갑고 냉철한 판단만 내리는 존재, 진정으로 신경을 쓰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그 무엇도 흔들어 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가 분노라는 경험을 전혀 알지 못하고, 메마른 무감각과 구별할 수 없는 태연함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기를 진심으로 원할 리는 없다. 분노도 우리가 누구인가에 관하여 어느 정도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우리가 분노를 인식했을 때 그 독에 빠지지 않으며 분노가 우리에게 득이 되도록 하려면 우리 자신을 어떻게 교육하고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이다.
이것이 임종 순간에 마지막 대차대조표의 한 부분으로 남으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p. 507
인간이 상처를 떨어낼 수 있기는 한 걸까? 우리는 과거로 깊숙이 들어간다. 프라두가 남긴 글이었다. 이런 일은 깊은 감각, 다시 말해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라는 느낌은 어떤 것인지를 결정하는 감각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 감각은 시간을 초월하고, 시간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p. 513
이별은 자기 자신과도 관계가 있어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의 편에 서는 것이지요.
p. 537
우리 인생은 바람이 만들었다가 다음 바람이 쓸어갈 덧없는 모래알. 완전히 만들어지고 전에 사라지는 헛된 형상.
사람의 정체성은 언제 유지되는가. 늘 그래왔던 그 모습일 때? 스스로를 바라보았을 때처럼? 아니면 들끓는 생각과 감정의 용암이 온갖 거짓과 가면과 자기기만을 묻어버릴 때? 달라졌다고 불평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사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우리가 원하는 그 모습이 아니라는 뜻인가? 그러니까 타인의 안녕에 대한 걱정과 염려라는 가면을 썼을 뿐, 결국 익숙한 것이 흔들릴까봐 대항하는 투쟁문구의 일종인가?
p. 554
대답이 지극히 간결한 것으로 보아, 대답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런 일도 있는 법이다. 오래된 과거의 일에 대해서는 온 마음을 열지만, 그 뒤의 일과 현재 일에 대해서는 문을 닫는 것, 친근함에도 시대 구별이 있다.
p. 559
열린 시선이 이렇게 어려운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우리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게으른 존재다. 일상적인 대지에서 호기심이란 희귀한 사치일 뿐......힘차게 발을 딛고 서서 매 순간 솔직하게 연주할 수 있다면 그런 삶은 예술일 것이다. 우리는 모차르트여야 한다. 열린 미래의 모차르트.
p. 564~565
"한계가 없는 솔직함이란 불가능한 거요. 그건 우리의 능력 밖이오. 침묵해야 하기 때문에 고독한 경우도 있는 법이오."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가? 프라두가 했던 질문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이 물음이 눈빛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눈빛은 없었고, 읽혀질 뿐이었다. 눈빛은 언제나 '해석된 눈빛'이었다. 해석된 눈빛만이 존재했다.
과거가 그의 시선아래에서 얼어붙기 시작했다. 기억은 과거를 고르고, 조절하고, 수정하고 속일 것이다. 기억 말고는 다른 근거가 없으므로, 누락과 비틀기와 거짓을 나중에 인식할 수 없다는 점이 소름 끼쳤다.
영화로 만들어졌고, 영화 자체도 좋다. 제레미 아이언스와 잭 휴스턴의 연기도 좋았으나, 어느 정도의 사건이 필요한 영화이기에 책이 전하고자 하는 느낌을 살릴 수가 없다. 영화에서는 삶의 철학보다 로맨스와 살라자르 독재체제에 반기를 들었던 레지스탕스의 활동들이 더 중심에 있는 듯하여 뭔가 좀 아쉬웠다. 아마 책보다 영화를 먼저 봤다면 책은 보지 않았을듯한. 다행이다 책이 먼저여서.
'북리뷰 > 문학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버지니아 울프 <올랜도> (16) | 2020.12.04 |
---|---|
시몬느 드 보부아르 <위기의 여자> (16) | 2020.11.25 |
비톨트 곰브로비치 <페르디두르케> (18) | 2020.11.21 |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차가운 피부> (4) | 2020.11.20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10) | 2020.1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