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시오 키로가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오라시오 키로가(1878~1937)는 우루과이 소설가이다. 근대 단편소설의 거장이자 라틴아메리카 환상문학의 선구자라고 하는데, 사실 난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는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작가였다.
작가나 작품에 대한 정보없이 그냥 제목에 이끌려 일단 읽기 시작했는데, 단편 하나를 읽었을 때는 "뭐 그럴 수 있지." 다시 다른 거 하나를 읽었을 때는 "잘못택했다"였다. 영화도 스릴러나 공포는 잘 보지 않는데, 이 단편들은 뭐라고 할까. 소설속에 표현되는 장면들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 생각이 반복되어 움찔하게 만든다. 그런데 다른 단편 제목들을 보고 그것들의 내용마저 궁금해지게 한다. 내 취향이 전혀 아님에도 불구하고.
15편의 단편과 부록으로 3편을 더 보여주고 있는 이 소설집은 사랑, 굳어버린 과거로 인한 불가능한 사랑, 인간 내면의 광기, 그리고 연결되는 죽음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 중 두 편만 맛보기로 쓰자면...
<목 잘린 닭>의 시작은 "마시니페라스 부부에게는 아이가 넷 있었는데 모두 백치였다."로 시작한다. 뭔가 불안하다 싶었는데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그것도 더 강렬하고, 끔찍하게.
p. 77
그들의 마음속에는 아직 성취하지 못한 희망의 불꽃이 살아 있었다. 아무런 결실을 거두지 못하자 그들의 갈망은 더 뜨겁게 타올랐고, 그럴수록 마음이 더 쓰라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부부는 아이들의 불행에 대해 각자가 감당해야 할 몫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 몸으로 낳은 짐승 같은 자식 넷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사라지자. 부부는 그 모든 운명을 남의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태도는 열등한 존재의 고유한 특성이다.
호칭부터 달라졌다. "당신 아이들 말이야......"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p. 78~79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베르타는 네 아들을 보살폈지만, 딸아이가 태어난 후로는 거의 내팽개치다시피 했다. 네 아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마치 끔찍한 일을 저지르기라도 한 듯 소름이 끼쳤다. 정도는 덜했지만 마시니도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부는 좀처럼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했다. 혹시라도 아이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딸아이가 조금만 아파도 모자란 자식들 때문에 생긴 마음의 응어리가 일시에 터져나왔다. 그사이 그들의 가슴에 켜켜이 쌓인 응어리가 얼마나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던지 살짝만 건드려도 분노와 한이 밖으로 쏟아졌다. 처음 가시 돋친 말을 주고 받은 후로 그들 사이에는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는 마음이 싹 사라져버렸다. 누구든 묘하게 끌리는 것이 있다면, 그건 다른 이를 무참하게 짓밟으면서 느끼는 잔인한 쾌감이리라. 예전에는 두 사람 모두 간절히 원하던 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들어도 꾹 참고 넘어갔다. 하지만 그토록 바라던 바를 이루자, 그들은 서로 자기의 공으로 돌리며 상대의 결함 때문에 백치로 태어난 네 명의 아이를 제일 큰 수치로 여겼다.
p. 81, 83
유난히 햇빛이 눈부시던 그날, 무슨 이유에서인지 백치 아이들은 항상 죽치고 앉아 있던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녀가 부엌에서 닭의 목을 자르고 조금씩 피를 뽑아내고 있는데(이 방법은 베르타가 친정어머니에게서 배운 것인데, 이렇게 하면 닭고기를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었다.) 별안간 뒤에서 숨결 같은 것이 느껴졌다. 하녀가 뒤를 돌아다보니, 네 백치 아이가 다닥다닥 붙어선 채 넋을 잃은 듯 멀거니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시뻘게......시뻘게......
"엄마!엄마!......!" 더는 소리칠 수가 없었다. 아이들 중 하나가 베르티타의 목을 누르더니, 닭털이라도 되는 양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그러는 사이, 다른 아이들은 베르티타의 다리 한쪽을 잡고 부엌으로 질질 끌고 갔다. 그날 아침에 잡은 닭의 피가 여전히 고여 있는 부엌에서 아이들을 베르티타를 꽉 붙잡은 채, 몸에서 서서히 생명의 기운을 빼냈다.
<깃털 베개>는 이제 막 신혼 생활을 시작한 부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차갑고 엄격한 남편, 그리고 을씨년스럽게 온통 하얀색으로 되어 있는 집. 그곳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그녀는 다른 할 일도 없이 잠만 자고, 이유도 없이 점점 여위어 간다. 그러다가 독감에 걸렸는데, 아예 일어나지를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의사들은 그녀가 병들어가는 이유를 찾지 못하고 처방도 하지 못한 채 그녀는 죽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방을 정리하던 하녀가 그녀의 깃털 베개에 벌레에 물려서 난 핏자국 같다며 베개를 들어올리다가 놀래서 떨어뜨리는데......
p. 102~103
호르단이 베개를 들어 올렸는데, 정말 엄청나게 무거웠다. 그들은 베개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베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베갯잇과 속을 단칼에 갈랐다. 윗부분에 있던 깃털이 공중으로 날아오르자 겁에 질린 하녀는 입을 벌린 채 바들바들 떨던 손으로 눈을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베개 바닥을 채운 깃털 사이로 털이 부숭부숭 난 다리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 베개 안에 끈적거리는 공 모양의 괴물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괴물의 몸이 얼마나 탱탱하게 부풀어 있던지 입이 어디 붙었는지조차 분간이 어려웠다.
알리시아가 병석에 누운 후, 이 괴물은 밤이면 밤마다 자기 입, 아니 주둥이를 그녀의 관자놀이 부분에 몰래 갖다 대고 피를 빨아 먹었던 것이다. 괴물에게 물린 자국은 너무 작아서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였다. 처음만 하더라도 그녀가 매일 베개를 이리저리 움직인 덕분에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꼼짝도 할 수 없게 된 때부터, 괴물은 놀랄 만큼 빠르게 피를 빨아 먹기 시작했다. 결국 괴물은 닷새 만에 그녀의 피를 몽땅 다 빨아 먹었다.
일반적으로 새의 몸속에 기생하는 이 벌레는 대개 매우 작지만, 특정한 조건 하에서는 몸집이 엄청나게 불어나기도 한다. 인간의 피가 그 벌레에게 특히 좋은 모양인지 그런 벌레들이 깃털 베개 속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이 단편들은 정말 읽어봐야 느낌을 제대로 알 수 있다. 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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