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문학반

서머셋 모옴 <인생의 베일>

나에대한열정 2020. 12. 8.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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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셋 모옴 <인생의 베일>


원제는 the painted veil이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퍼시 셸리가 1818년에 발표한 소네트 "Lift not the painted veil..."을 소설의 모티브로 삼았고, 소설의 제목으로 했다.


'사람들이 인생이라 부르는 페인티드 베일', 번역에 따라 오색의 베일, 유색의 베일이라고 하고 있으나, 이 책에서는 '인생의 베일'이라고 하고 있다. 베일로만 가려져도 선명하게 인식하기 어려운데, 거기에 채색까지 되어 있으니 베일 너머를 제대로 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까. 또한 베일 너머의 사람은 자신을 (의도한 것이 아니더라도) 얼마나, 어떤 가식으로 보여주려 하고 있을까.


그리고 이 이야기는 단테의 <신곡>중 2부 연옥편의 제5곡 마지막 구절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단테의 <신곡>

p. 52

나를 기억해 주세요! 내 이름은 피아라고 합니다.

시에나가 내게 생명을 주었고 마렘마가 날 죽인 사실은 보석으로 먼저 반지를 끼워주며 나와 결혼했던 그자가 잘 알고 있어요.


(피아라는 여인에 대해서는 옛 주석가들은 그녀가 시에나의 톨로메이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볼테라와 루카의 집정관이던 넬로 데이 판노키에스키와 결혼하여 마렘마에서 남편에게 살해되었다고 보았다. <신곡 연옥편>, p. 309)




소설의 서두에 퍼시 셸리의 소네트 첫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셸리의 이 시는 구약성서의 <전도서>의 염세주의를 모티브로 삼고 있는데, 삶의 베일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절망감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헛되고 헛되도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는 '헛되다'로 시작해서 결론 직전까지 37회에 걸쳐 '헛되다'로 계속된다. 셸리는 옥스포드에서 <무신론의 필요성>이라는 팸플릿을 발간하면서 퇴학을 당하게 되는데, 적어도 그의 입장에서는 <전도서>는 염세주의로 여겨지는게 당연하다고 본다.



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 1792~1822)


잠시, 퍼시 셸리에 대한 여담을 하자면,

20세에 16세의 헤리엇과 결혼을 하는데, 5년뒤 임신한 상태에서 헤리엇은 강물에 투신자살을 한다. 바로 (나중에 두 번째 아내가 되는) 메리(<프랑켄슈타인>의 저자)와 사랑에 빠진 것을 알고 비관투신자살을 한 것인데, 우연인지 여자의 한인지, 30세에 요트전복사고로 퍼시 셸리는 요절하게 된다.



다시 <인생의 베일>로 돌아가서,


여주인공 키티는 상황에 떠밀려 사랑하지도 않는 월터와 결혼을 한다. 월터는 키티를 사랑하지만, 제대로 된 표현도 없고 키티입장에서는 조금은 지루한 남자이다. 그런 상황에서 키티는 찰스 타운센드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월터는 자신과 함께 콜레라가 한창인 메이탄푸로 가던지, 이혼을 하던지 선택하라고 한다. 조용하게 이혼해 주는 조건은 하나, 찰스가 본인의 가정을 깨고 키티와 일주일내에 결혼을 하는 것이다. 키티는 당연히 찰스가 그럴거라 생각하고 찰스에게 말하지만, 그는 꽁무늬빼기도 바쁘다. 


키티는 월터를 따라 메이탄푸로 가고, 그곳 생활에서 월터의 다른 모습들을 본다. 사람들이 존경하는 남자. 헌신적인 남자. 그러면서 월터와 대화를 시도하고 관계를 개선해나가는데...


그러나, 인생은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관계가 조금 나아지는 상태에 접어들자, 키티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임신 개월수를 확인하니 그때는 키티가 다른 남자, 찰스 타운센드를 사랑하던 시기. 



그 다음은...? 궁금하면 책으로...


P. 174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를 경멸하도록 만드는, 인간의 가슴에 존재하는 그것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P. 205

모든 것이 덧없고 아무것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때 사소한 문제에 터무니없이 집착하고 그 자신과 다른 사람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인간이 너무나 딱했다.



p. 209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인생은 너무나 이상해요. 평생 오리 연못 근처에서 산 사람이 갑자기 바다를 구경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약간 숨이 차지만 사기가 충천해 있죠. 난 죽고 싶지 않아요. 살고 싶어요. 새로운 용기가 솟아나는 걸 느껴요. 미지의 바다를 향해 출항하는 늙은 선원이 된 것만 같아요. 내 영혼이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는 것 같아요."



p. 235

"도(道). 우리들 중 누구는 아편에서 그 '길'을 찾기도 하고 누구는 신에게서 찾고, 누구는 위스키에서, 누구는 사랑에서 그걸 찾죠. 모두 같은 길이면서도 아무 곳으로도 통하지 않아요."



p. 238

이제 유일한 기회는 어떤 예기치 못한 사건이 그를 무장해제시킬 때였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신을 분노의 악몽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감정의 분출을 환영할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딱한 어리석음 때문에 그는 온 힘을 다해 그것에 맞서 싸울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에 잠깐 머물렀다 가는 신세로도 모자라 자신을 고문하다니 인간은 얼마나 딱한 존재인가?



p. 244

"마음을 얻는 방법은 딱 하나입니다. 자신이 사랑을 주고 싶은 대상처럼 자신을 만들면 되지요."



p. 266

"난 이런 의문이 듭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들이 한갓 환영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그들의 삶은 그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역겨움 없이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드는 유일한 것은 인간이 이따금씩 혼돈속에서 창조한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들이 그린 그림, 그들이 지은 음악, 그들이 쓴 책, 그들이 엮은 삶. 이 모든 아름다움 중에서 가장 다채로운 것은 아름다운 삶이죠. 그건 완벽한 예술 작품입니다."


"관현악단의 각 단원들이 자신의 작은 악기를 연주할 때 허공 속으로 퍼져 나가는 복잡한 하모니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요? 그들은 오직 그들 교향곡이 아름답다는 걸 압니다. 듣는 사람이 없어도 그것은 여전히 아름답고 그들도 자신의 역할에 만족합니다."



p. 284

역병의 도시는 그녀가 탈출한 감옥이었다. 파란 하늘이 얼마나 절묘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전에는 결코 몰랐다. 길 위로 너무나 예쁘고 우아하게 기운 대나무 숲에서 또 얼마나 즐거웠던가. 자유! 그게 바로 그녀의 가슴속에서 울려 퍼지는 생각이었고, 비록 미래는 아주 희미했지만 아침 햇살이 드리운 안개 낀 강물처럼 다채롭게 빛났다. 자유! 답답한 속박으로부터 자유일 뿐 아니라 그녀를 짓눌렀던 애증 관계로부터의 자유였다. 자유, 위협적인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그녀를 땅으로 끌어내렸던 사랑으로부터의 자유, 모든 정신적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유체 이탈된 한 영혼의 자유, 그리고 자유, 용기, 무슨 일이 생기든 개의치 않는 씩씩함이 그녀와 함께했다.



p. 329

과거는 끝났다. 죽은 자는 죽은 채로 묻어 두자. 너무 무정한 걸까? 그녀는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이 동정심과 인간애를 배웠기를 바랐다. 어떤 미래가 그녀의 몫으로 준비되었는지 모르지만 어떤 것이 다겨오든 밝고 낙천적인 기백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힘이 자신의 내부에 자리하고 있음을 느꼈다.




나이가 들면서, 인생에 문학이 더 필요하게 된 이유가 제대로 박히는 거 같다. 때로는 드러내고 싶지만, 표현하고 싶지만...철저한 익명이 되지 않기에 주저하게 되는 것들을 책 속의 그녀들이 나를 대신해준다. 이 여자 뭐지? 싶다가도 그녀가 내가 아니란 법이 어디 있고, 그녀의 마음이 내 마음이 아니란 법이 어디 있는지. 키티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심하고, 어이없고, 뻔뻔하고...그런데 그런 키티의 얘기를 하는 이 작가가 고마웠다. 


시몬느 베이유는 "민중은 빵과 같은 문학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민중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고, 궁핍한 영혼을 풍요롭게 할 빵.

현대에 와서 허기진 배는 아니더라도, 무언가 색다른 디저트를 찾거나, 식상하지만 다시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것을 찾는 이들에게 요즘 내가 먹는 빵들을 좀 나눠주고 싶다.



이 소설이 영화화 된 것. 

영화에서는 마지막에 키티가 임신한 상태에서 끝나는 소설을 아이가 태어난 몇 년 후의 모습으로 설정한 것을 제외한다면 거의 대부분을 담고 있다. 월터에 대한 해석부분에 차이가 좀 있고, 소설속에서는 자세하지 않은 콜레라 부분이 영상이라 좀 두드러지기도 하고. 의사였던 서머셋 모옴도 표현하지 않았던 콜레라 베드(콜레라에 걸리면 설사를 많이 하기 때문에 침대의 가운데 부분에 동그란 구멍을 내서 대변을 받을 수 있게 밑에 통을 놔둔)도 인상 깊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키티의 대사. 조금은 속이 시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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