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빗 홀, Rabbit Hole (2011)
드라마, 미국, 91분
개봉: 2011. 12. 22
감독: 존 카메론 미첼
주연: 니콜 키드먼(베카 역). 아론 에크하트(하위 역)
베카(니콜 키드먼)와 하위(아론 에크하트)는 8개월전 4살짜리 아들 대니를 교통사고로 잃었다. 대니가 집에 있는 개를 쫓아서 나가다가 10대 소년이 운전하던 차에 치이게 된 것.
영화는 처음부터 이렇게 솔직하게 표현해주지 않는다. 장면 하나하나가 지나가면서, 아이가 죽었다는 것, 4살이었다는 것, 남자아이였다는 것, 개를 쫓아가다가 그렇게 됐다는 것, 교통사고를 낸 아이가 10대였다는 것, 하지만 속도를 어긴 게 아니라서 법적으로 문제시되지 않았다는 것...퍼즐처럼 하나씩 연결될 뿐이다.
베카는 아이가 있었던 자취에서 힘들어하고 그래서 그 흔적들을 하나씩 지우고 싶어한다. 아이의 그림도 치우고, 옷도 정리하고. 그런데 반대로 남편 하위는 그 흔적들이 사라지는 걸 더 못견뎌한다. 남아있는 것들이라도 더 보고싶어하고, 떠올리고 싶어한다. 이렇게 슬픔을 이기는 방법이 다른 두 사람은 그런 서로를 이해하기가 힘들어지고 어쩔수 없는 말다툼이 일어난다.
주위에서 슬픔을 달래주고자 말을 건네는 것도 베카의 입장에서는 화가 날 뿐이다. 식사 초대도 거절하고, 심지어 가족들과의 만남에서도 순탄치 않다. 30살에 약물 중독으로 죽게 된 오빠가 있었는데, 친정 엄마가 오빠 이야기를 하면서 위로하려고 하여도, 비교하지 말라면서 화부터 낸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모여서 같이 대화하는 모임에서도, 베카는 하느님이 천사가 필요했으면 만들면 됐지, 왜 우리 자식을 데려가냐고 날 세운 말만 한다. 그래서 그 이후에는 하위 혼자만 모임에 참가하게 되고.
그러던 어느 날, 운전중이던 베카는 사고를 낸 아이, 제이슨(미일즈 텔러)이 스쿨버스에 타고 있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고 아이가 내릴 때까지 쫓아간다. 그리고 며칠을 아이를 미행하듯 쫓아다닌다. 그리고 그뒤로 그 아이랑 가끔씩 만나서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그 아이가 그리고 있던 코믹북 제목이 "레빗 홀"이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있었던 토끼 굴.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연결되는 통로의 의미인 토끼 굴. 코믹북의 내용은 평행우주를 담고 있었다. 베카는 제이슨과의 대화를 통해 무언가 알지 못할 위로를 받게 된다.
한편 베카의 행동들을 이해 못하는 하위는 부모 모임에서 알게 된 개비(산드라 오)와 두 어번 대마초를 피우면서 가까워지지만, 베카를 사랑한다는 마음에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는다.
베카와 하위는 서로 대화를 하기 시작하고, 그 동안 외면했던 사람들을 식사에 초대하기로 한다. 그리고 무엇을 할지 하나씩 이야기해간다. 이렇게 그들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아이의 물건을 지하 창고에 정리하면서 친정엄마 냇(다이앤 위스트)과 베카가 나누는 대화.
베카: 그 마음 사라지기는 해요?
댓: 아니, 사라지지 않아. 적어도 난 11년동안 그랬어.
그래도 변해.
베카: 어떻게요?
댓: 나도 잘 몰라.
슬픔의 무게가 변하는 걸지도 모르지. 어느 순간이 되면 견딜만 해져.
이제 슬픔에서 기어 나올 수 있는 거지. 그리고 슬픔의 벽돌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거야.
게다가 가끔은 잊기도 하고. 그러다 어쩌다가 그 슬픔을 찾으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 그 자리에 그대로.
끔찍한 일이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아. 뭐랄까. 마음에 들진 않지만, 아들 대신 존재하는 거야. 그래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거지. 이 마음은 절대 사라지지 않아.
코믹북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면서, 베카가 제이슨과 나누는 대화.
정말 있을까?
평행우주요?
그냥 기본과학인거 같아요. 우주가 무한하다면 모든게 가능하겠죠.
우주 어딘가에서 난 팬케이크를 만들고 있겠네. 해양공원에 있거나.
가능하죠.
그래?
둘 다 일수도 있구요.
확률의 법칙에 의하면 이 세상엔 저도 여러명이고, 아주머니도 여러명이에요.
그래. 이건 우리의 슬픈 버전이구나.
네 그렇겠죠. 그래도 우리의 다른 버전은 어쩌면 편하게 살아갈 수도 있고.
과학을 믿는다면 가능한 일이죠.
이 이론이 좋아. 멋진 거 같아.
그 어딘가에서 난 행복할 테니까.
베카를 보면서, 너무 깊은 슬픔을 누군가 위로한다 생각하고 아는 체 해오면, 때로는 그 행동 자체가 힘들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고를 낸 제이슨과는 오히려 화를 내지 않으면서 대화를 해나간다. 원망의 소리도 없다.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해자라고만 하기도 뭐하지만, 그래도 사고가 나게 한 당사자인데,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을까. 그런데 베카의 행동을 계속 보면서 위로 받고 있구나 하는 게 느껴졌다. 오히려 그 사고 현장에 어떤 관계로든 같이 있었다는 자체가 베카에게는 무언의 위로가 되었던 거 같다. 사고를 낸 10대의 제이슨도 분명 정신적인 충격을 심하게 받았을 텐데, 서로가 그걸 감싸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존 어빙은 그의 소설에서 "나이가 들면서 나를 잘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만으로 잘 지낼 수 있다"는 표현을 썼다. 구차하게 이렇다 저렇다 설명할 필요가 없는 관계의 사람이 과거에 그 사람이 나한테 어떤 행동을 했는지와 상관없이 잘 지낼 수 있다는 것이다. 베카도 제이슨에게 느꼈던 감정이 이런 류가 아니었을까. 설명하지 않아도 그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아픔을 함께 한 사람이라는 거.
아픔을 이겨내는 방법이 사람들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그 누구도 어떤식으로든 비난받아서는 안된다는 것. 내 아픔만이 더 클 수는 없지 않은가.
'무비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 (2012) (10) | 2021.01.18 |
---|---|
결혼하고도 싱글로 남는 법 (2007) (12) | 2021.01.17 |
인 디 아일 (2018) (8) | 2021.01.15 |
펜스 (2016) (36) | 2021.01.13 |
시크릿 슈퍼스타 (2019) (12) | 2021.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