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숲 속의 생활>
사진은 1854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 디자인으로 '더스토리'에서 출판된 책과 아이들을 위해 그림책으로 '길벗어린이'에서 나온 <월든>이다.
이 작품은 데이비드 소로가 1845년 여름부터 1847년 초가을에 이르기까지 2년 2개월 2일간 '월든' 호숫가에서 지낸 생활과 그때의 생각들을 기록한 글이다. 그곳에 들어가서 생활하기 전에, 도끼 한 자루만 가지고 나무를 베어 직접 오두막을 짓는다. 가구들도 간단한 것들은 만들고, 살림살이도 아주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만 사다 놓는다. 그리고 직접 밭에서 작물들을 키우고, 빵을 만들고, 물고기를 잡아서 식사를 해결한다. 그리고 정확히 생활을 하는데 얼마의 비용이 들어갔는지 숫자로 가계부처럼 써놓는다. 그러면서 근대문명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실험하게 된다. 이런 자급자족의 삶과 자연친화적인 생활로 인해 생태주의자로서 인식된다. 불필요한 것에 연연하지 않고, 간소하게 살면 얼마나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지 표현한다.
소로가 이 책에서 보여주는 생태주의적 관점은 여러 가지 면에서 생각할 수 있겠으나, 그 중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사람들이 자연을 인간의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터전으로 보지 않고, 재산으로, 소유의 대상으로 여겨 자연을 훼손한다는 지적이다. 상업주의적 농업을 비판하면서 플린트 호수의 대농장주 플린트의 이야기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도 그런 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소로가 이 글을 쓰는 19세기는 지금처럼 환경에 대한 인식이 있던 시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연은 무한한 자원을 가지고 있고, 개발해서 인간의 편의에 이용되는 게 당연하다 여겼던 시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태계의 파괴에 대한 인식을 가졌다는 자체가 놀라울 뿐이다.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고 멕시코와의 전쟁을 반대하면서, 전쟁준비를 위해 정부가 징수한 인두세를 거부하던 소로는 생태주의적인 관점 뿐만 아니라, 실천하는 지성인의 모습이었다고 생각된다.
p. 13~15
사람이 성장하려면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데, 아는 것을 계속 사용해야 하는 처지에 어찌 자신의 무지함을 떠올릴 수 있겠는가?
인간 본성의 최고 자질은 과일 껍질에 배어 나온 당분과 같아서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야만 그대로 보존된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은 고사하고 남을 대할 때도 상냥하게 처신하지 않는다.
로마인들은 동전을 놋쇠로 만들었기에 빚을 아에스 알리에눔(aes alienum), 즉 '타인의 놋쇠'라고 불렀는데,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타인의 놋쇠 더미에 파묻혀 허우적대며 살아간다.
세상의 평은 우리 스스로 내리는 평가에 비하면 가벼운 폭군이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사람의 운명을 결정, 혹은 암시한다.
p. 31
왜 우리는 다른 여러 모습의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오직 한 가지 삶만을 과대평가할까?
p. 38
사람이 새롭지 않으면 새 옷이 다 무슨 소용인가? 지금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 한다면, 입던 옷 그대로 걸치고 시작해 보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할 일'이나 '되어야 할 사람'이지, 일을 하는데 필요한 도구가 아니다.
날짐승의 털갈이 시기처럼 인간도 살아가며 위기의 국면을 맞는다. 이때 허물을 벗고 변신해야 한다.
p. 53, 55
문명인이 추구하는 바가 야만인이 추구하는 바보다 훨씬 가치 있는 게 아니라면, 문명인이 그저 하찮은 생필품과 육체적 안락을 얻는 데 생의 대부분을 바친다면, 그가 굳이 야만인보다 더 좋은 집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은 집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전혀 생각해 보지도 않고, 그저 이웃 사람이 가졌는데 나도 하나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으로 집을 장만하겠다고 평생 쓸데없는 가난에 허덕이며 살아간다. 마치 재단사가 만들어 주는 옷이라면 종류 불문하고 무조건 받아 입은 후, 평소에 쓰던 종려나무 잎이나 우드척 가죽으로 만든 모자는 던져 버리고 왕관을 살 형편이 안 된다고 신세 한탄을 하는 것 같다!
우리는 왜 늘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만 애쓸 뿐, 작은 것에 만족하는 법은 배우려 하지 않을까?
p. 101
악은 처음부터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p. 106~107
나는 다른 사람이 내 생활 방식을 차용해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가 내 생활 방식을 다 익히기도 전에 나는 다른 방식을 찾아냈을지 누가 알겠는가. 나는 세상 사람들이 가능한 한 다양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그저 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이웃의 방식이 아니라 자기만의 방식을 찾아내 따르라고 말해 주고 싶다.
협력이란, 제아무리 고상하게 표현하든 저급하게 표현하든, 함께 생계를 꾸려 간다는 의미다.
혼자 가는 사람은 오늘이라도 당장 길을 떠날 수 있지만, 여럿이 가려면 다른 사람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기에, 출발하는 것조차 오래 걸릴 터다.
p. 112~113
가난한 사람을 도울 때는 그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을 주어야 한다. 비록 그것이 그가 따르기 힘든 당신의 모범이라 할지라도 상관없다. 돈을 주려거든 그것으로 뭔가를 해 줘야지, 무작정 줘서는 안 된다. 우리가 자주 하는 엉뚱한 실수들이 있다. 가난한 사람은 더럽고 초라하고 지저분하니까 반드시 춥고 배고프리라고 단정 짓는 것이다. 행색은 단지 그들의 취향일 뿐, 반드시 불운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런 이에게 돈을 주면, 더 많은 누더기를 사 입을지도 모른다.
세상의 악의 뿌리를 쳐내는 사람이 한 명쯤 있다면, 그 잔뿌리만 잘라 내고 마는 사람은 천 명도 넘는다. 가난한 사람에게 시간과 돈을 많이 주는 사람은, 자신이 구제하려 애쓰는 가난을 오히려 더 조장하는 역할만 하게 된다는 뜻이다.
p. 117
나는 시라즈의 족장 사디가 쓴 <굴리스탄>, 즉 <화원>이라는 작품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다. "사람들이 현자에게 물었다. '지고한 신이 창조해 낸, 하늘 높이 솟아 짙은 그늘을 드리우는 무성한 나무들 중에 열매를 맺지 않는 삼나무를 제외하고는 아지드('자유롭다'는 뜻)라 불리는 나무가 없습니다. 어떤 심오한 까닭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그러자 현자가 답했다. '나무란 모름지기 나름의 열매와 철이 있어서, 제철이 되면 푸르러지고 꽃도 피우지만 철이 지나면 마르고 시드는 법이다. 하지만 삼나무는 계절과 상관없이 늘 무성하다. 바로 그런 특성을 자유롭다 하거나 종교에서 독립적이라 한다. 그러니 그대들도 덧없는 것에 마음을 쏟지 말라. 통치자 칼리프의 생이 다한 후에도 티그리스 강은 바그다드를 통과해 계속 흐를 것이다. 그대가 가진 것이 많다면 대추나무처럼 아낌없이 베풀고, 베풀 것이 없다면 삼나무처럼 자유로워지라.'"
p. 124
농장 일에 치어 살든 감옥에 갇혀 살든, 얽매여 산다는 점에서는 두 삶이 별반 다르지 않다.
p. 134~136
내가 숲으로 들어간 건 의도한 대로, 삶의 정수만을 직면하며 살아보고 싶어서였다. 그랬을 때 삶에서 배워야 할 것을 다 배울 수 있을지 알고 싶었고, 죽음이 닥쳤을 때 내가 헛되이 살지 않았음을 깨닫고 싶었다. 삶이란 너무나 소중한 것이기에, 삶이 아니라면 살고 싶지 않았다.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면, 체념한 채 살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깊이 있게 삶의 정수를 빨아들이고 싶었다. 삶이 아닌 것은 모두 파괴해 버리고 강인하게 스파르타인처럼 살아가길 바랐다. 낫을 크게 휘둘러서 풀을 바싹 베어 내듯 삶을 구석으로 몰아가 가장 기본 조건까지 끌어내린 다음, 삶이 천박한 것으로 판명된다면, 그 천박함을 전부 속속들이 알아내어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반대로 숭고한 것이라면 직접 경험해서 그 참모습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랐다.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자! 부디 바라건대, 할 일을 배 가지 천 가지로 늘리지 말고, 두세 개로 줄이자.
간소하게, 또 간소하게 살라. 하루 세끼 대신 필요할 때만 한 끼를 먹자. 백 가지 요리는 다섯 가지로 줄이고, 다른 것도 그 비율로 줄이자.
p. 138
왜 우리는 이처럼 바쁘게 삶을 낭비하며 살아갈까? 마치 배고프기도 전에 굶어 죽기로 작정한 사람들 같다. 제때 뜨는 한 땀의 바느질이 훗날 아홉 땀의 수고를 줄여 준다고 말하면서, 정작 우리는 내일 뜰 아홉 바늘을 줄이려고 오늘 천 땀의 바느질을 한다. 일에 관해 말해 보자면, 내내 일만 하면서도 중요한 일은 하나도 해내지 못한다. 마치 무도병에 걸려서 머리를 가만히 두지 못하는 형상이나 마찬가지다.
(무도병: 얼굴, 손, 발 등이 제멋대로 움직여서 마치 춤을 추는 듯한 모습이 되는 신경병)
p. 142, 144
눈을 감아 버리거나 졸거나, 암묵적으로 보이는 것에 현혹당하면서, 인간은 쳇바퀴 돌듯 틀에 박힌 일상과 습관을 확립하고 공고히 다진다. 하지만 이러한 삶은 순전히 가공의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다. 놀이가 삶이나 다름없는 아이들은 어른보다 더 명확하게 삶의 진정한 법칙과 관계를 분간해 낸다. 어른들은 가치 있는 삶을 사는 데 실패했으면서도 자신이 경험이 많으니, 다시 말해 실패를 통해 쌓아 올린 연륜이 있으니 더 현명하다고 착각한다.
부디 하루라도 자연처럼 신중하게 삶을 살아보자. 한낱 철로 위에 떨어진 견과류 껍질이나 모기의 날개 때문에 탈선하는 기차가 되지는 말자.
p. 159~161
모든 책이 다 그 책을 읽는 사람들만큼 따분하지는 않다. 세상에는 우리의 상황을 정확히 표현하는 말이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그 말을 경청하고 이해한다면, 아침이나 봄보다 우리의 삶에 더욱 유익하게 작용할 테고, 사물의 새로운 측면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도 있을 터다. 세상에는 한 권의 책에 감명받아 삶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던 사람이 수 없이 많다. 인간이 이루어 낸 기적을 설명해 주고 새로운 기적을 드러내 보여줄 책이 우리를 위해 존재할지도 모른다. 지금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어딘가에는 표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당혹하게 하고, 혼란스럽게 하는 질문이 지금껏 모든 현명한 이에게도 던져졌다. 하나도 빠짐없이. 그리고 모두가 그 질문에 답을 해 왔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글과 삶으로.
뿐만 아니라, 지혜가 쌓여감에 따라 우리는 너그러움도 함께 배운다.
나는 마을 사람들에게 아첨할 생각도, 그들에게 아첨 받을 생각도 없다. 그래 봐야 서로 아무런 발전도 이루지 못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극받아야 한다. 황소처럼 매를 맞고서라도 빠르게 앞으로 나가야 한다.
p. 164~165, 166
늘 방심하지 않는 태도를 연마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나 훈련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반드시 봐야 할 것을 늘 눈여겨보는 훈련을 하라. 제아무리 잘 선택한 역사, 철학, 시 강의도, 혹은 뛰어난 사회나 동경할 만한 삶의 방식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 단순한 독자나 학생이 되는 대신 보는 이가 되어야 한다. 운명을 읽고, 앞에 놓인 것을 바라본 후, 미래로 걸어 들어가자.
나는 삶에 넓은 여백을 두고 싶다.
인간이 자신의 내면에서 삶의 동기를 찾아야 한다는 점은 불변의 진리다.
p. 175
공중에 보이지 않는 화살이 그득하다. 당신 자신의 길을 제외한 모든 길이 숙명의 길이다. 그러니 자신의 길을 벗어나지 마라.
p. 193
마치 내가 세상 최초의 인간이거나 마지막 인간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든다.
p. 200
나는 나 자신을 인간적 실체로만 알 뿐이다. 그러니까, 사고와 감정이 일어나는 배경으로서 말이다. 그런데 남은 물론이고 나 자신에게서도 한 발 물러나 초연할 수 있는 어떤 이중성을 느낀다. 내가 얼마나 강렬한 경험을 하든, 그 경험에 참여하는 나와 그것을 판단하는 내가 있는 것이다. 판단하는 나는 그저 관객의 입장에서, 전혀 경험을 공유하지 않고 메모만 한다. '나'라기보다는 차라리 '너'에 가깝다. 그래서 삶이라는 연극이 끝나면, 관객은 그게 비극이었어도 그저 제 갈 길로 가 버린다. 관객에게야 그저 한 편의 허구일 뿐이니까. 이러한 이중성이 스스로를 하찮은 이웃이나 친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일 게다.
p. 205
차라리 내게 희석하지 않은 아침 공기 한 모금을 달라. 그것이 내게는 만병통치약이다. 아, 아침 공기! 인간이 하루의 샘솟는 원천인 새벽 공기를 마시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을 병에 담아 가게에서 팔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세상에서 아침 시간을 구독할 예매권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그리해야 할 터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아침 공기는 아무리 서늘한 지하실에 보관하더라도 결코 정오까지 머물지 못하고, 그 전에 병마개를 밀어젖힌 채 새벽의 여신이 남겨 놓은 발자취를 따라가 버린다는 사실이다.
p. 321~322
내면에서 울려오는 목소리는 희미하기는 해도 의심할 여지없이 진실하다. 따라서 끊임없이 속삭이는 그 진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처음에는 혹시라도 그것이 어떤 극단적인 행위나 미친 짓으로 자기 자신을 이끄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의지를 굳히고 신념을 키워 가다 보면, 그 길이 바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임을 깨닫게 된다. 건강한 이가 느끼는 희미하지만 단호한 반발심이 결국에는 인류의 주장과 관습을 넘어 승리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고의 이익과 가치는 오히려 인식하기가 힘든 법이다. 우리는 그러한 것이 존재하기는 하느냐고 쉽게 의심한다. 그리고는 곧 잊어버린다. 하지만 그것은 가장 높은 곳에 존재하는 실재다. 어쩌면 가장 놀라운 실재는 결코 인간에게서 인간으로 전해지는 법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일상에서 거두는 진정한 수확은 아침이나 저녁의 빛깔처럼 손으로 만질 수도, 말로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손에 쥔 자그마한 별 조각이고, 움켜잡은 무지개 조각이다.
p. 325
인간은 자기 안의 동물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고결한 본성이 잠드는 동안 서서히 깨어나 자리 잡는 그것은 비열하고 관능적이며, 결코 우리 안에서 완전히 몰아낼 수 없다. 생기 넘치고 건강한 사람의 몸속에도 기생충이 살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잠시 그런 동물적 속성에서 멀어질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속성 자체를 바꾸어 버릴 수는 없다. 나는 그 동물적 속성으로 그 나름의 건강한 삶을 유지해 나갈까 봐 심히 걱정이 된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건강해질 수 있는 있을지언정 순수해질 수는 없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p. 328
순결하고 싶다면, 절제해야 한다. 순결이란 무엇일까? 자기 자신이 순결하지 우리는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아무도 알아볼 수 없다. 다들 순결이라는 미덕에 대해 들어보기는 했으나,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저 들리는 소문대로만 이야기할 뿐이 다. 육신을 부단히 움직이는 데서 지혜와 순결을 얻을 수 있고, 나태함에서 무지와 감각적인 욕망이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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