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멜리 노통브 <겨울 여행>
이 소설은 우리에겐 <겨울 나그네>로 더 익숙한 슈베르트의 연가곡집에서 영감을 얻은 제목이다. <겨울 나그네>는 사랑에 실패한 청년이 추운 겨울에 연인의 집 앞에서 이별을 고하고, 한겨울의 들판으로 방랑의 길을 떠나는데, 그 길을 가는 내내 죽음에 대한 상념들이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된다. 이 소설도 비슷한 맥락을 따라간다. 큰 그림으로 보자면 말이다.
이야기는 비행기를 폭파시킬 계획을 하고 있는 한 남자의 시선으로 시작된다.
이름은 조일. 뱃속에 있을 때, 부모님은 딸이라는 확신으로 '조에'라는 이름을 골라놨는데, 막상 아들이 나오자 어떻게 해서든 조에의 남성형을 찾고자 하셨고, 그렇게 사전에서 발견된 이름이 '조일'이었다. 무슨 뜻을 가졌는지 찾아보니, 그리스의 소피스트의 이름이었고, <오딧세이아>에 대한 혹평으로 군중들에게 돌에 맞아 죽은 인물인 것이다. 기왕 아들에게 소피스트의 이름을 붙여주실 거면 고르기아스나 프로타고라스나 제논 같은 이름을 붙여주실 것이지 멍청하고 무시당하던 자의 이름을 물려받게 해 줬다면서 원망을 한다. 그런 조일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전력공사, 가스공사의 지시대로 계량기를 점검하고 고지서를 발부할 이름을 확인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전력공사에서 광고 예산을 확보해서 일할 사람을 뽑는 중에 광고부장으로 뽑혔지만, 두 번 다시 그에 대한 예산이 책정되지 않았고, 그 뒤로 조일은 상부에 해고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하여, 지금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12월의 어느 날, 새로 이사를 온 여자의 집에 방문하기로 약속이 잡혀 있었는데, 서류에 직업이 소설가라고 되어있었다 아직 한번도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는 조일은 들떠서 그 집에 방문하게 된다. 그런데 여자가 두 명이었고, 한 명은 조금 정상이 아닌 듯 보였고, 다른 한 명은 완전 조일의 이상형이었다. 실내가 너무 춥게 느껴져서 보니, 전장이 거의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었다. 조일은 여러 가지 호의를 베풀고 싶어 하지만, 매력적인 그녀는 철벽으로 대하고 있고, 천장에 비닐 방수포를 대러 다시 오겠다는 방문만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서점으로 달려가, 서류에 적혀있던 이름, A. 말레즈의 소설을 찾았다. 그러다가 알리에노르 말레즈의 <공포탄>이라는 작품을 발견한다. 이름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소리 내어 불러 볼 수 조차 없는, 알리에노르.
다음 방문 때, 조일은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알리에노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비정상적으로 보인 사람이 바로 작가 알리에노르였던 것이다. 그때부터 조일에게 그 아름답던 이름은 에일리언을 연상시켰다.
조일이 마음에 둔 그녀의 이름은 아스트로라브.
아스트로라브는 정상적이지 않은 알리에노르를 돌봐주면서, 그녀가 불러주는 소설을 받아적는 일을 한다. 매니저 겸 후견인인 셈이다. 그 뒤로 이들 셋은 가끔 만난다. 그러다가 조일은 아스트로라브에게 마음을 표현하고 키스를 하는데, 바로 앞에서 알리에노르가 너무도 뚫어지게 보고 있어서 더 이상 진전을 나갈 수가 없다. 아스트로라바는 절대 알리에노르를 혼자 놔둘 수 없다고 하고.
급기야 조일은 환각 버섯을 가져와서 그들과 함께 먹는다. 알리에노르는 눈을 감고 있고, 조일은 환각상태에서 아스트로라브를 유혹한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살이 아니라 돌이었다. 환각의 시간에 돌로 느껴진 그녀의 몸. 문제는, 조일에게 상처를 준 것은 그녀의 웃음이었다. "당신 계획은 완전히 망했네. 불쌍한 나의 조일" 그때, 조일은 그녀에게 죽도록 원망스러운 마음을 갖게 된다. 그리고 환각 속에서 다른 계획이 자리 잡는다. 비행기를 납치해 에펠탑과 충돌하는 것. 아스트로라브와 아리에노르를 연상시키는 A라는 글자를 파괴하는 것.
p. 22
사춘기 땐, 자신의 영향력에 대해 잔인할 정도로 집착한다. 과연 난 어느 쪽에 속한 인간인가. 빛? 아니면 어둠? 차라리 내가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만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뿐만 아니라, 내가 무엇 때문에 그림자로 밀려나게 되었는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차라리 내가 그쪽을 택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련만.
p. 24
자신이 보잘것 없이 평범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반드시 사회적, 직업적인 경험을 할 필요는 없다. 평범함은 그보다 훨씬 더 은밀한 방식으로 상대를 장악한다.
죽음의 신이 반드시 엘리트를 골라 공격하는 것은 아니다. 모르는 사이에, 아니면 뻔히 알면서도 우리 모두는 전장으로 내몰린다. 그리고 수천수만 가지 방식으로 철저히 패배한다. 희생자들의 명단은 그 어디에도 공개되어 있지 않다. 아무도 누가 그 명단에 올라 있는지, 심지어는 내 이름이 들어 있는지조차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전쟁터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심을 품을 수는 없다. 마흔 살이 되면 살아 남은 자들의 수는 너무나도 적어 비극적인 감정에 휘말리게 된다. 마흔 살, 상복을 입을 나이다.
p. 26
더 계속해 보았자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꽉 막힌 사람들이 이야기를 참고 듣는 것만 해도 이미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 설교 뒤에 감추어진 엄청난 증오가 드러날 땐 더 이상 용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p. 29
고백하자면, 나는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몰라 고통스럽다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물론 그 말을 믿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고민을 좀 해 보아야겠지만, 그런 사람들을 보면 옷들로 꽉꽉 채워진 옷장 앞에서 입을 만한 옷이 하나도 없다고 투덜대는 철딱서니 없는 여자들이 떠오른다. 살아간다는 아주 단순한 행위 자체가 이미 하나의 의미가 들어있다. 또 지구 위에서 산다는 것도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 그것으로도 의미가 하나 더 추가된다. 더 계속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자신의 인생에 의미가 없다니, 농담이 지나친 거다.
p. 67~70
겨울에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건 그리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다른 계절보다 징후가 훨씬 더 유별나고 고통스럽다. 추운 날의 완벽한 빛은 기다림에 동반되는 우울한 희열을 부추긴다. 추위에 몸을 떨다 보면 흥분이 극으로 치닫는다.
겨울과 사랑은 시련을 통해 욕망을 채운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 두 가지는 격려와 위로를 거부한다. 온기로 추위를 물리치면 사랑의 힘이 약해져 추잡한 이미지로 타락하고, 창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받아들여 열정을 식히면 기록적인 시간 안에 무덤으로 직행하게 된다.
나는 추위다... 하늘의 뜻이 무엇이든, 종말 이후에 살아남는 존재는 나 하나뿐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오만을 부려보아도 비굴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나는 누군가 느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타인의 몸서리로 인해 존재한다.
어리석게도 나는 객기를 부려 실패를 자초하려 한다. 때로는 이해받지 못할 게 확실한데도 작정한 대로 밀고 나가야 하는 경우가 있다.
p. 72
이상(理想)을 품지 않고 행동에 돌입하는 테러리스트는 없다. 이상 치고는 끔찍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아무튼 간에 이상인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들의 이상이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핑계가 없으면 행동에 옮길 수 없는 법이다. 테러리스트에겐 이런 헛된 합리화가 필요하다. 가미카제들에게는 특히 더 간절하게. 종교에서 비롯한 것이든 조국에서 비롯한 것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든 간에 이런 이상은 단어의 형태를 취한다. 아서 쾨슬러의 말이 옳았다. 세상에서 살인을 가장 많이 한 범인은 바로 언어라고 했던가.
p. 118
우리가 지옥이 다른 데가 아닌 이 지구 상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부터 그 지옥이 실체는 확실해진다. 지옥, 그것은 바로 타인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확실하다. 타인이라고는 하지만 온전한 한 사람을 들먹거릴 필요도 없다. 그가 맨 넥타이로도 충분하니까.
p. 142
사람은 불 같은 사랑에 빠져 있을 때만이 한없이 너그러울 수 있는 법, 조금이라도 그 열기가 식으면 누구라도 어쩔 수 없이 가혹해진다.
※ 아멜리 노통브의 다른 작품
2020/09/26 - [북리뷰/문학반] - 아멜리 노통브 <살인자의 건강법>
2020/09/30 - [북리뷰/문학반] - 아멜리 노통브 <푸른 수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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