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른하르트 슐링크 <책 읽어주는 남자>
영화를 보고 나서, 원작이 궁금해졌다. 영화는 그 캐릭터를 맡은 배우의 말과 행동, 표정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어서, 뭔가 놓치고 있는 것은 있지 않을까, 내가 잘못 받아들인 게 있지 않을까 싶었다. 책은 글을 통해서 전달해야 하니 그들의 심리가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영화는 원작에 상당히 충실했다. 세부적인 몇몇 곳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래도 책을 집어 든 건 잘한 거 같다. 영화에서 왜 그렇게 표현했는지 생뚱맞은 부분들이 있었는데, 책에서는 그 모든 과정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영화 리뷰에서 대강의 줄거리는 써놨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또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인 1944년에 출생한 저자는, 전쟁이나 유대인 학살과 관련된 그들의 부모세대와 그 윗세대의 책임에 대하여 연대책임을 지지도 못하고, 단지 그들을 비난함으로써 조금은 벗어날 수 있는 수치심의 고통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었다. 그들이 처한 역사적인 현실과 그로 인한 고뇌를 말이다. 어쩌면 한나는 사랑의 대상이기 이전에 유죄판결의 당사자들이 되어야 하는 세대들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통해서는 사랑의 아픔이, 책을 통해서는 세대의 아픔이 느껴졌다.
p. 31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지 않기로 내린 결정을 행동으로 옮긴 경우도 많았고 또 하기로 하고 내린 결정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경우도 아주 많았다.
물론 나의 생각과 결정이 행동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행동은 행동에 앞서 이미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한 것을 단순히 그대로 수행하지는 않는다. 행동은 나름대로의 원천을 갖고 있으며, 나의 생각은 나의 생각이고 나의 결정은 나의 결정이듯이 나의 행동 역시 독자적인 방식으로 나의 행동인 것이다.
p. 40~41
나는 다음 날부터 다시 학교에 등교하기로 마음먹었다. 거기에는 내가 습득한 남성다움을 남에게 보여주어야겠다는 생각도 한몫했다. 괜히 으스대려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힘이 넘치고 남보다 우월하다고 느꼈으며 동료 학생들과 선생님들을 이러한 힘과 우월감으로 대하고 싶었다.
p. 42~43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엄마가 아이들이나 집안일 문제로 말을 걸 때면 늘 그랬듯이 깊이 생각에 잠긴 듯한 눈길로 있었다. 그럴 때마다 늘 나는 아버지가 정말로 엄마의 질문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인지 자문해보았다. 아버지는 어쩌면 엄마의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보려 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생각에 빠지면 아버지는 자신의 일 이외의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철학 교수였으며, 생각하는 것은 아버지의 삶이었다. 생각하고 읽고 글을 쓰고 가르치는 것은.
그는 가끔 가족인 우리가 아버지에겐 가축과 같은 존재라는 느낌을 받았다...왜냐하면 생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가족인 우리가 그의 생 자체였으면 정말로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다.
p. 52~55
그 시절을 생각하면 왜 이리 슬픈 것일까? 잃어버린 행복 때문일까? 나는 그 이후로 몇 주 동안 행복했다.
왜 그런 것일까? 왜 예전에 아름답던 것이 지나고 보니, 그것이 추한 진실을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로 인해 느닷없이 깨지고 마는 것일까?
행복이 불행으로 막을 내리면 때로는 행복에 대한 기억도 오래가지 못한다. 행복이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을 때에만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고통을 잉태한 것들은 반드시 고통스럽게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일까? 의식적인 고통이든 무의식적인 고통이든 간에? 그러나 무엇이 의식적인 고통이고 무엇이 무의식적인 고통인가?
나를 슬프게 만드는 것은 이것인가? 당시 나의 가슴을 가득 채웠던, 생에서 결코 지켜질 수 없는 약속을 끌어냈던 그 열의와 신념 때문인가? 지금도 나는 가끔 아이들과 십 대들의 얼굴에서 그 당시의 나의 것과 똑같은 열의와 신념을 발견한다. 그때마다 나는 나를 돌이켜볼 때 느끼는 것과 똑같은 슬픈 눈길로 그것을 바라본다. 이 슬픔은 단순한 슬픔일까? 이러한 슬픔은 아름다운 추억들이 - 기억 속의 행복은 상황뿐만 아니라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먹고사는 까닭에- 기억 속에서 산산이 부서질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일까?
나는 그녀에게 그녀의 과거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때마다 그녀는 내게 줄 대답을 마치 먼지가 뽀얗게 앉은 궤짝에서 꺼내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마치 자신의 인생이 아니라 자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다른 사람의 인생인 양 이야기했다.
p. 69
나는 그녀가 그녀 자신의 차갑고 딱딱한 태도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음을 느꼈다.
p. 89~90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럴까? 나는 젊었을 때 지나치게 자신감을 느끼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자신 없어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나 자신을 너무 무능력하고 초라하고 보잘것없다고 여기거나, 아니면 스스로 전체적으로 보아 성공했으니 모든 일에서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감을 느낄 때는 아무리 큰 문제도 해결해내곤 했다. 그러나 더없이 작은 실패 하나도 나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확신시키기에 충분했다. 자신감을 다시 얻는 것은 결코 성공에 따른 결과는 아니었다. 내가 이룬 것은 나중에 비교해보면 내가 실제로 해낼 수 있다고 기대하거나 남으로부터 인정을 기대했던 것에 비참할 정도로 못 미쳤으며, 그리고 내가 그것을 실패로 느끼느냐 아니면 성공으로 느끼느냐는 오로지 나의 기분 상태에 달려 있었다.
p. 96
그녀는 그해 여름 나의 생활이 이제 더 이상 그녀와 학교와 공부 주변만을 맴돌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늦은 오후 그녀에게 갈 때면 나는 수영장에 들렸다가 가는 일일 점점 더 잦아졌다.
p. 98
그 후 나는 한나를 배반하기 시작했다.
나는 부인(否認)이 배반의 보이지 않는 한 변형임을 알고 있었다. 외부에서 보면 부인을 하는 건지, 비밀을 지키고 있는 건지, 깊이 사려하는 건지, 난처함과 불쾌함을 피하려는 건지 구별하기 힘들다. 그러나 자신의 의중을 드러내지 않는 본인은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부인은 배반의 다른 몇 가지 떠들썩한 유형들과 마찬가지로 인간관계의 토대를 앗아가버린다.
p. 102
나는 한나가 일을 하러 가지도 않고 또 나와 함께 있지도 않을 때면 무엇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내가 그것에 대해 물으면, 한나는 나의 질문에 면박을 주었다. 우리는 함께 공유하는 생활 세계가 없었으며, 그녀는 그녀 인생에서 내게 허용하고 싶은 만큼의 자리만 내주었을 뿐이다. 나는 거기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좀 더 가지려고 하거나, 아니면 조금이라도 더 알려고 하는 것조차 이미 주제넘은 짓이었다.
p. 104
한나는 며칠 동안 평소와 다른 특이한 기분 상태를 보였다. 변덕스러웠고, 고압적이었으며, 동시에 그녀를 극도로 괴롭히고 극히 예민하게 만드는 무슨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압박감에 눌려 산산조각 나지 않으려는 듯 안간힘을 썼다.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느냐는 나의 질문에는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나는 제대로 대처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때 나는 그녀를 떨쳐버리고 싶은 마음과 함께, 어쩔 줄 몰라하는 그녀의 무력감을 느꼈다.
p. 106~107
우연히 고개를 들어 그녀의 모습을 발견한 그때 내가 무슨 일에 몰두하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는 이삼십 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그녀의 얼굴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로 달려가지 않았다. 그녀가 왜 수영장을 찾아왔을까.
그리고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하는 등의 의문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음 순간 나는 일어났다. 일어서느라 그녀에게서 시선을 뗀 그 짧은 순간에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p. 110
육체적 그리움보다 더 참기 어려운 것은 죄책감이었다. 왜 나는 그녀가 그곳에 서 있었을 때 당장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로 달려가지 않았던가! 그 짧은 순간 속에 지난 몇 달 동안의 그녀에 대한 내키지 않은 마음이 뭉쳐 있었던 것이다. 그런 마음 상태에서 나는 그녀를 부인하고 배반했던 것이다. 그에 대한 벌로 그녀는 가버린 것이다. 몇 번이고 나는 내가 본 것은 그녀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설득해보려고 했다. 얼굴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녀였다고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에 그녀였다면 내가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겠는가? 만약에 그녀였다면 내가 내가 그녀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겠는가? 그러므로 그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내 어찌 확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그것이 그녀였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서서 바라보았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다.
p. 114~115
그로부터 반년 뒤 나의 가족은 그 도시의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 그렇다고 내가 한나를 잊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언제인가부터 그녀에 대한 기억이 나를 따라다니기를 그만두었다. 그녀는 기차가 계속해서 앞으로 달리면 뒤쪽에 처지는 도시처럼 뒤에 남았다. 그 도시는 그대로 있다. 우리의 등 뒤 어디엔가. 우리는 기차를 타고 그곳으로 가서 그 도시를 확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하겠는가.
나는 내가 한나에 대한 기억들과 작별을 하기는 했지만 그 기억을 완전히 극복한 것은 아님을 알고 있다. 한나 이후로 나는, 그 누구에게도 굴욕을 당하거나 굴종을 참아내지 않겠다. 모든 죄책감을 내게로 돌리거나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겠다, 상실의 아픔을 가져올 만큼의 사랑은 이제 더 이상 하지 않겠다. 이런 것들을 당시에는 뚜렷이 생각하지는 못했지만 마음속으로 단호하게 느끼고 있었다. 나는 오만하고 우쭐해하는 태도에 점차 익숙해졌다. 그 무엇으로도 흠집 하나 나지 않는 요지부동의 인간처럼 행동했다. 나는 그 무엇도 내게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p. 116
나는 또한 나를 향한 것이든 남을 향한 것이든 간에 애정이 담긴 조그만 몸짓에도 목이 매어오던 것도 기억한다.
p. 126
나는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는 내가 한나의 체포를 당연하고도 잘된 일로 생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비난이나 고발된 내용의 무거움 혹은 혐의의 중대함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이런 것에 대해서 나는 아직 자세한 것을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오히려 그것은 그녀가 나의 세계와 나의 삶으로부터 도망쳐 감방에 갇혀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를 나로부터 멀리 두고 싶었다. 아주 멀리. 그리하여 나는 그녀가 지난 몇 년 동안 내 가슴속에 만들어진 모습대로 단순한 추억으로 남게 되길 바랐다. 만약에 변호사가 승리를 하면, 나는 다시 그녀를 만날 것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만나고 싶은지, 그녀를 만나야 하는지 나 자신에게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p. 135
나는 지금도 스스로에게 묻고 있고 이미 당시부터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한 질문을 갖고 있다. 우리 제2세대들은 유대인 박멸과 관련된 끔찍한 정보들을 실제로 어떻게 대해야 했으며 또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도 안되고,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을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되며 자꾸만 물어봐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질문자는 그 끔찍한 사건들 자체를 문제로 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 앞에 다만 경악과 수치와 죄책감으로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의사소통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경악과 수치와 죄책감을 느끼면서 그것들 앞에 침묵해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그러나 몇몇 사람이 판결을 받고 형을 살고, 제2세대인 우리들은 경악과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입을 다무는 것,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전부인가?
p. 150
한나가 등을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나를 금방 찾아냈다. 나는 그녀가 내가 그곳에 와 있다는 것을 줄곧 알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나를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무엇을 부탁하지도 않았고, 내게 무엇을 확신시키거나 약속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그저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줄 뿐이었다. 나는 그녀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지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p. 175
그녀는 승리를 위해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이 노출되는 대가를 치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또한 내가 그녀의 형량을 몇 년이라도 줄이기 위해서 그녀가 만들어놓은 자신의 이미지를 매도하는 것도 원치 않을 것이다. 그녀는 그와 같은 거래를 직접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것을 원치 않은 것이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이미지가 감옥에서 보낼 세월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말로 그것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
p. 180~182
"하지만 어른들의 경우에는 내가 그들에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들 스스로 좋다고 여기고 있는 것보다 더 우위에 두려고 하면 절대 안 된다."
"나중에 가서 그들 스스로가 그로 인해 행복해질 수 있는 경우에도 말인가요?"
아버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는 지금 행복이 아니라 품위와 자유에 대해서 말하고 있어. 넌 아주 꼬마였을 때부터 그 차이를 잘 알았잖니. 엄마의 말이 늘 옳은 것이 네겐 별로 마음 편치 않았잖아."
"아니다. 네 문제는 마음 편하게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만약에 내가 서술한 상황이 그 사람에게 어쩌다가 생긴 것이거나 아니면 유전적인 것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라면, 너는 당연히 행동을 해야 한다. 네가 상대방을 위해 무엇이 좋은 건지 알고 있고 그 사람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너는 당연히 그 사람이 그에 대해 눈을 뜨도록 해주어야 해. 물론 최종 결정은 본인한테 맡겨두고서 말이다. 하지만 그 사람과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 사람과 직접 말이야. 그 사람 등 뒤에서 다른 사람과 이야기해서는 안 된단다."
p. 198~200
내 안에 엄청난 공허가 느껴졌다. 마치 뭔가 손에 잡힐 만한 모습을 바깥세상이 아닌 내 안에서 찾으려다가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느낌이었다.
나는 한나의 범죄를 이해하고 싶었고, 동시에 그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다. 내가 그녀의 범죄를 이해하려고 할 때마다, 나는 그녀의 범죄에 대해 당연히 내려야 할 합당한 유죄판결을 결코 내리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의 범죄에 합당한 유죄판결을 내리려고 하면, 그녀의 범죄를 이해할 수 있는 한 뼘의 공간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한나를 이해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또다시 그녀를 배반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나는 이해와 유죄판결, 이 두 가지에 대해 나름대로 입장을 취해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는 없었다.
p. 201~202
결국 나는 재판장을 찾아갔다.
나는 왜 한나와 만나 이야기하지 못했는가? 그녀는 내게서 떠났고, 나를 속였고, 내가 평소 알고 있었던 또는 내가 상상했던 여자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녀에게 무엇이었나?
왜 나는 가만히 보고만 있지 못했을까? 나는 잘못된 판결이 내려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나의 평생 거짓말과는 상관없이 정의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한나를 위한 정의이면서 또 한나의 뜻에 반대되는 정의였다. 그러나 나는 사실은 정의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나는 한나를 과거의 모습대로 혹은 그녀가 원하는 모습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간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직접적으로 안되다면 간접적으로라도 그녀에게 어떠한 식으로든 영향을 끼치고 싶었다.
p. 206~207
판결 이유문의 낭독은 몇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재판이 끝나고 피고인들이 끌려 나갈 때, 나는 혹시 한나가 나를 쳐다보지 않을까 기다렸다. 나는 내가 늘 앉던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것을 꿰뚫을 듯이 앞만 바라보았다. 그것은 거만하고, 상처 받고, 길 잃은, 한없이 피곤한 시선이었다. 그것은 아무도 그리고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는 시선이었다.
p. 214~215
연대책임이라는 것이 도덕적으로 그리고 법률적으로 타당성을 인정 받든 인정받지 못하든 간에, 우리 학생 세대들에게 그것은 하나의 경험적 현실이었다. 이러한 연대책임은 제3제국 당시에 일어났던 일에만 적용되지 않았다. 유대인들의 묘석에 철십자 훈장을 그려 넣은 사실, 그토록 많은 수의 얫 나치주의자들이 법원과 행정부 그리고 대학에서 출세를 한 사실, 독일 연방 공화국이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은 사실, 독일 연방 공화국이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은 사실, 전통적으로 망명과 저항이 순응하는 삶보다 덜 전승되었다는 사실, 이 모든 사실은 비록 우리가 손가락으로 죄를 저지른 당사자들을 가리킬 수 있다고 해도 우리 가슴속을 수치심으로 가득 채웠다. 죄를 지은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고 해서 우리가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손가락질을 함으로써 적어도 수치심으로 인한 고통을 극복할 수 있었다. 손가락질은 수치심의 수동적인 고통을 에너지와 행동과 공격 심리로 전환해주었다. 그리고 죄를 저지른 우리의 부모들과의 대결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었다.
p. 220
우리가 말하는 것이 진실인가 아닌가 여부는 우리의 행동에 달려 있기 때문에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p. 229
나는 당시에 <오디세이아>를 다시 읽었다. 나는 <오디세이아>를 학교 다닐 때, 처음으로 읽었으며 그것을 하나의 귀향 이야기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귀향을 다룬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은 똑같은 강물에 결코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리스인들이 귀향을 믿겠는가. 오디세우스는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출발하기 위해서 귀향하는 것이다. <오디세이아>는 목표점이 확실하면서도 목표점이 없는, 성공적이면서도 헛된 운동의 이야기이다. 법률의 역사 또한 이와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p. 236~238
나는 한나의 글씨체를 들여다보면서 그것을 쓰느라고 그녀가 얼마나 많은 힘을 소모하였으며 또 얼마나 투쟁을 해야 했을지 짐작이 갔다. 나는 그녀가 자랑스러웠다. 동시에 나는 그녀가 불쌍했다. 너무나 지연되고 실패한 그녀의 인생이 불쌍했고, 그녀 인생 전체의 지연과 실패가 가엾게 여겨졌다. 어느 누가 제때를 놓쳤을 경우, 어느 누가 무엇을 너무 오랫동안 거부했을 경우, 또 어느 누구에게 무엇이 너무나 오랫동안 거부되었을 경우, 그것이 나중에 가서 설사 힘차게 시작되고 또 환희에 찬 영접을 받는다고 해도, 나는 그것은 이미 때가 너무 늦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너무 늦은'이라는 것은 없고, '늦은'이라는 것만 있는 것인가. '늦은'것이 '결코 없는'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인가? 나는 모르겠다.
나는 단 한 번도 한나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를 위해 책을 낭독하는 일은 계속했다.
한나가 이제 혼자서 글을 읽는 법을 익혔으므로 내가 보내는 카세트테이프가 더 이상 필요 없을 거라는 우려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것 외에도 책을 읽으면 그만이었다. 내가 책을 읽어주는 것은 그녀에게 이야기하는 그리고 그녀와 이야기하는 내 나름의 방식이었다.
p. 244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기대감을 보았으며, 나를 알아보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기쁨으로 환하게 빛나는 것을 보았고, 내가 다가가자 나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그녀의 두 눈을 보았고, 무언가를 찾고 묻는 두 눈에 불안과 아픔의 빛이 서리는 것을 보았으며, 그리고 그녀의 얼굴빛이 꺼지는 것을 보았다.
p. 247~248
"당신은 재판 과정에서 언급된 사실들에 대해서 재판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내 말뜻은 우리가 함께 있었던 당시에는, 내가 당신한테 책을 읽어주던 그 당시에는 그 일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느냐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도 마음에 걸리니?" 그러나 그녀는 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나는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 누구도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 일 또는 저 일을 하게 만들었는지 알지 못한다는 느낌을 가졌어. 그리고 넌 알 거야. 그 누구도 너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누구도 너한테 해명을 요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렇기 때문에 법정 역시 나한테 해명을 요구할 수 없었어. 그러나 죽은 사람들은 내게 그것을 요구할 수 있어. 그들은 나를 이해하거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법정에 있을 수는 없었지. 그러나 그들이 그곳에 있었으면, 그들은 나를 특히 잘 이해했을 거야. 이곳 교도소에서 그들은 나하고 자주 같이 있었어. 그들은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매일 밤 나를 찾아왔지. 재판을 받기 전에는 그들이 나한테 오려고 하면 쫓아버릴 수 있었어."
p. 270~273
그러는 사이에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서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한나가 죽은 뒤 첫 몇 년 동안 나는 혹시 내가 그녀를 부인하고 배반한 것은 아닌지, 혹시 내가 그녀에게 무언가 빚진 것은 아닌지, 혹시 그녀를 사랑한 까닭에 내가 죄를 지은 것은 아닌지, 혹시 내가 진작 그녀와의 관계를 청산했어야 했던 것은 아닌지. 그 방법은 어떠해야 했었는지 하는 해묵은 질문들로 인해 괴로워했다. 가끔 나는 그녀의 죽음에 대해 내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곤 하였다. 그리고 가끔 그녀에 대해서 그리고 그녀가 내게 한 행동에 대해서 화가 나기도 했다. 마침내 분노의 물결이 물러가고 그러한 여러 가지 질문들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때까지. 내가 한 행동과 하지 않은 행동 그리고 그녀가 내게 한 행동, 그것은 이제는 바로 나의 인생이 되었다.
애당초 내가 우리의 이야기를 글로 쓰려고 한 까닭은 이 이야기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글을 쓰려고 하니까 기억들이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나는 우리의 이야기가 내게서 빠져나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어떻게든 글을 통해서 붙잡아두고 싶었다. 그러나 글쓰기 역시 나의 기억들을 되살리지는 못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우리의 이야기를 건드리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나는 우리의 이야기와 화해했다. 그러자 우리의 이야기는 되돌아왔다.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내게 더 이상 슬픔을 주지 않을 정도로 동글고 완결되고 나름대로의 방향을 지닌 모습으로. 나는 지난 오랜 세월 우리의 이야기가 정말로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 우리의 이야기가 행복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의 이야기가 진실되다고 생각하며, 바로 그런 까닭에 그것이 슬픈 이야기냐 아니면 행복한 이야기냐 하는 물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인생의 층위들은 서로 밀집하여 차곡차곡 쌓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나중의 것에서 늘 이전의 것을 만나게 된다. 이전의 것은 이미 떨어져 나가거나 제쳐둔 것이 아니며 늘 현재적인 것으로서 생동감 있게 다가오는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이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끔 그것이 정말로 참기 어렵다고 느낀다. 어쩌면 나는 우리의 이야기를 비록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에 썼는지도 모른다.
※ 이 책을 원작으로 해서 만들어진 영화
2021.03.24 - [무비리뷰] - 가슴 아프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이야기,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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