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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 의무는 살아남는 것이었다. "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 <스페인 여자의 딸>

나에대한열정 2021. 7. 23.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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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나 사인스 보르고 <스페인 여자의 딸> (2021)

 

"베네수엘라 같은 사회에서는 유일하게 민주주의적인 것이 배고픔과 죽음이었다."라고 말한 베네수엘라 기자 출신인 작가. 2019년 <포브스>에서 가장 창의적인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됐다.

이 작품은 1980년대 중반 유가 폭락으로 인한 경제 공황 이후 현재 베네수엘라의 참상을 그려낸 작가의 첫 소설이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루멘 출판사와 계약 직후 22개국으로 판권이 팔릴 만큼 스페인어권 문학 사상 전례 없는 주목을 받은 소설이고, 곧 영화로도 제작될 예정이라고 한다.

 

소설로 들어가 보자.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

서른여덟의 여자. 그녀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엄마의 장례를 치르는 장면에서 소설은 시작한다. 

아델라이다 팔콘. 이 이름은 그녀 엄마의 이름이기도 하고, 그녀 자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아빠라는 존재는 엄마의 임신을 알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엄마는 생전에 개인교습으로 생활비를 벌었고, 딸은 대학 졸업 이후 신문사와 출판사에서 교정업무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장례비는 딸 아델라이다 월급의 2천 배...... 이 당시 베네수엘라는 고액의 화폐보다 실제 사용할 수 있는 냅킨이 더 유용할 정도로 인플레이션이 심한 상태였고, 물건을 가진 자가 부르는 게 값이었다. 

 

거리에는 배급제 도입 반대 시위대를 진압하는 혁명군으로 인해 최루가스가 난무했고, 조국의 기동부대(혁명군의 수장에게 대항하는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하여 혁명군이 앞장 세우던 보병대)는 정부의 재정 바닥으로 봉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자 어디든 내키는 대로 약탈해서 취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 거기에다 원래 기관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들이 기동부대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많았다.

 

빵을 배급받기 위해 나갔다가 집에 도착한 아델라이다는 집 문에 열쇠를 넣고 돌렸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광장에 무리 지어 진을 치고 있던 여자들은 침입 부대였는데, 그들의 손에 집이 들어간 것이었다. 내 집이라고 얘기했다가, 그것도 안되자 안에 있는 물건이라도 조금 달라고 했다가 결국은 총대에 머리만 맞고 쓰러진다. 6층에 사는 간호사 아줌마의 도움으로 머리를 꿰매고, 오늘은 여기서 쉬고 가라는 말을 듣지도 않은 채 나와 버린다. 그리고 5층으로 내려와 그녀가 살던 옆집, 아우로라 페랄타네 집 앞에서 멈춰 섰다. 사실 아우로라 페랄타에 대해서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가 그녀를 '스페인 여자의 딸'이라고 부르는 것 이외에는. 아우로라의 어머니는 스페인 이민자들의 술집이 모인 구역에서 식당을 운영했었는데, 아우로라 역시 자기 어머니처럼 남에게 요리를 해주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아무런 인기척이 없는 집. 문고리에 손을 댔는데 문이 열렸다. 재빨리 들어가서 문을 닫고 안을 둘러보던 아델라이다는 바닥에 누워있는 아우로라를 발견했다. 그녀는 죽어있었다.

 

머무르고 싶은 마음과 떠나고 싶은 마음을 동시에 느끼지만 아델라이다는 갈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시신과 함께 머무를 수는 없었다. 아델라이다는 엘리베이터로 시신을 끌고 가지만, 이미 몸이 굳어버린 시신을 엘리베이터에 싣을 수가 없었다. 결국 다시 아우로라네 집으로 돌아와서 창문으로 떨어뜨리기로 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던 시기, 거리는 너무도 시끄러운 상태라 5층에서 시체가 떨어진다한들 이상할 게 없었다. 시신을 떨어뜨리기는 했으나, 건물 입구에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최루가스와 타이어 타는 냄새가 짙은 연막을 형성하고 있어서, 아델라이다는 쉽게 움직일 수 있었고, 그렇게 시신을 옮겨 불에 태운다. 

 

아델라이다는 아우로라의 물건들과 우편물, 이메일을 하나씩 보면서, 스페인에서 아우로라의 친척이 아우로라가 스페인으로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아우로라를 어렸을 때 봐서 현재의 모습을 알 수 없을 거라는 추측), 외국 계좌에 입금되어 있는 엄청난 돈, 액자 뒤에 감추어둔 달러, 그리고 스페인으로 가기 위해 필요한 서류들이 모두 준비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아델라이다는 자신보다 9살이나 많은 아우로라로 살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가짜 신분증과 여권을 만들고, 비행기를 타러 가게 되는데. 너무나 많은 것을 캐묻던 공항직원은 엑스레이 검색대를 통과할 거라면서 협조하라고 한다. 아델라이다는 옷 안에 달러와 중요한 서류들을 감추고 있었는데 말이다. 이제는 죽었구나 싶었던 때, 직원이 데려간 곳은 면세점이었고, 그곳에서 텔레비전을 제일 큰 걸로 고르라면서, 계산은 여권과 탑승권만으로 된다고 한다. 아델라이다는 그렇게 무사히 비행기를 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스페인에 도착해서 아우로라의 친척집을 찾아가 벨을 누르고, 서로를 확인하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첫 문장: 엄마를 묻었다. 푸른 원피스, 굽 없는 검은 구두, 다초점 안경, 엄마가 쓰던 물건들도 함께 묻었다. 달리 작별할 도리가 없었다. 엄마와 뗄 수 없는 물건들이었으니까. 함께 묻지 않았더라면 엄마를 불완전하게 땅으로 돌려보내는 일이었을 테니까. 그래서 전부 묻어버렸다.

 

 

p. 19~20
우리의 가계도는 우리로 시작해서 우리로 끝났다. 엄마와 나는 함께 골풀, 그러니까 어디서든 자라는 잡초 무리를 이루었다. 우리는 작았고 결이 많았으며 아주 촘촘히 짜여 있었는데, 그건 어쩌면 누가 우리의 일부를 꺾거나 뿌리째 뽑아낸다고 해도 아프지 말라는 까닭에서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견디도록 만들어진 몸이었다. 우리의 세상은 둘이서 유지하는 균형 안에서 지속했다. 나머지는 예외적인 것, 더해진 것, 따라서 떼어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아무에게도 기대를 품지 않았다. 서로로 충분했다.

 

 

p. 40
그날 오후 내 삶의 궤적에 차곡차곡 쌓인 죽음들로부터 나는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었다. 그날 나는 나의 유일한 가족이 되었다. 난도질로, 피와 불로, 누구든 당장이라도 목숨을 앗아 갈 수 있는 인생의 마지막 장. 이 도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p. 51~53
큰길 한복판에서 쓰레기통이 불타고 있었다. 이웃들이 모여 태우던 지폐들이 바람에 휘날렸다. 여위고 그을린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들의 가난으로 도시를 밝히고 있었다.

강제로 시장에 돌리던 돈은 불에 태우기 전에도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일종의 정조인 양 인도 위에서 타고 있는 1백 볼리바르짜리 지폐보다 냅킨 한 장이 다 가치 있었다.
집에는 두 달은 충분히 먹을 식량이 있었는데, 여러 해 전 첫 약탈을 시작으로 나라가 쑥대밭이 되었을 때부터 엄마와 내가 비축해둔 덕이었다. 약탈은 이제 사건이 아니라 일상이 되어버렸다. 나는 엄마와의 경험을 교훈 삼아 본능적으로 모아둔 식량으로 버틸 작정이었다. 누가 나를 가르친 것도 아니었고, 시간이 말해주었을 뿐이었다. 그런 날이 오리란 걸 알기 훨씬 전부터, 전쟁은 우리의 운명이었다. 그 사실을 처음으로 직감한 게 엄마였다. 엄마는 사방으로 손을 써서 여러 해 동안 집에 물건을 쟁였다. 참치 통조림을 살 수 있다면, 두 캔을 사 오는 식이었다. 혹시 모르니까. 우리는 평생 우리의 배를 채워줄 짐승에게 먹이를 주듯 찬장을 채워나갔다.

 

 

p. 61~62
베네수엘라는 혼란스러워 아름다웠다. 아름다움과 폭력, 그 둘이야말로 나라에서 가장 풍부한 자원이었다. 그 결과가 바로, 자신들 고유의 모순이 만들어낸 균열과 당장이라도 국민의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릴 태세를 갖춘 풍경의 구조적 결함 위에 형성된 국가였다.

경솔함은 악 중에서도 그나마 덜 지독한 악이었다. 아무도 늙거나 가난해 보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숨기기, 치장하기, 꾸며내기. 그것이야말로 국강의 신조였다. 돈이 있든 없든, 나라가 무너지고 있든 말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예뻐지기, 미인 대회 왕관을 꿈꾸기, 카니발이든, 마을이든, 나라든...... 무엇이든 여왕이 되기, 가장 늘씬하고, 가장 예쁘고, 가장 멍청한 여자가 되기, 빈궁이 도시를 지배하는 지금도 나는 그 흔적을 알아볼 수 있다. 우리의 왕정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그런 신조가 저속함의 범람으로 이어졌다. 당시에는 현상 유지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석유가 품위 유지비를 대주었으니까. 적어도 우리 생각에는 그랬다.

 

 

p. 63
... 터무니없는 금액을 안겨주고야 살 수 있었다. 밀매꾼들은 '바차케라스'라고 불렀는데, 움직이는 방식이 꼭 바차코, 그러니까 붉은 불개미들 같았기 때문이다. 밀매꾼들은 무리 지어 움직였고, 빨랐고, 결코 흔적을 남기는 법이 없었다.

 

 

p. 65
보름째 동생 산티아고의 소식을 접하지 못했으며, 석방 청원서에 서명을 부탁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나는 답장하지 않았다. 내가 아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고, 아나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나라 전체가 그랬듯, 우리는 서로에게 남이 되는 형을 선고받았다. 나라를 떠난 사람들이 겪었을 것과 비슷한 감정, 그러니까 수치심과 부끄러움은 생존자들의 죄책감으로 남았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행위 또한 배신의 다른 형태였으니까.

 

 

p. 66
혁명의 아이들은 원하는 바를 충분히 이루었다. 그들은 선 하나를 그어 우리를 둘로 갈라놓았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떠나는 자와 남는 자, 믿을 만한 자와 의심스러운 자, 비난을 야기함으로써 그들은 이미 분열이 팽배하던 사회에 또 다른 분열을 더했다. 나는 잘 지내지 못했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상황이 더 나빴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빈사자들의 행렬에 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입을 다물어야 마땅했다.

 

 

p. 70
나는 두 번째 인생을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아직 살아 있는 듯 생생한 엄마의 존재감만 붙들고 살았다. 다른 건 필요하지도 바라지도 않았다.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을 테고, 나 역시 아무도 돌보지 않을 터였다. 사태가 악화된다면, 다른 이의 권리를 짓밟아서라도 내가 살 권리를 지키리라. 나냐 남이냐의 문제다. 최후의 일격으로 고통 없이 나를 끝장내 줄 만큼 인정 넘치는 사람은 그 나라에서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도 내 눈을 가려주거나 입에 마지막 담배를 물려주지 않으리라. 내 생명이 다하는 날 아무도 나를 위해 울어주지 않으리라.

 

 

p. 124
살고 싶다면, 깨어 있어야,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있어야 했다.

 

 

p. 140~141
자기 운명이 두려운 사람들은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세 시간 전, 보안관과 그 일당은 우르다네타 대로에서 벌어진 난투극에 합세하려고 요새를 떠난 터였다. 혁명의 아이들과 그들의 무장 부대가 두건 쓴 반정부 시위대 1백여 명을 학살했다. 시위대는 죽으러 나간 사람들이었다. 배고픔과 분노는 죽기에 충분한 이유였으니까. 그때가 기회였다. 남들의 절망과 혼란이 내게 선사한 기회를 잃을 수는 없었다.

 

 

p. 144
밖을 내다보고 싶었지만, 땀과 부끄러움에 범벅이 된 채로 계속 숨어 있었다.

역한 것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무언가 옹골지고 단단한 것이었다. 사태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달했다. 이미 벌어진 일을 바로잡으려는 시도는 모두 다음 단계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에 불과했다. 내가 그녀를 죽인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쓰레기를 먹은 기분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는 않았다.

 

 

p. 164~165
같은 궤도를 돌던 우리는 결국 가까워졌다. 대학교 시간표, 겹치는 교과목들...... 그런데 이토록 오랜 세월을 친구로 지낸 이유를 묻는다면, 그 이유를 아주 잘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연인이나 부부 사이를 설명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달리 선택지도 많지 않은 데다, 동반자가 거슬리지 않는다면, 그러면 된 것이다. 우리는 둘 다 통나무처럼 무뚝뚝하고 엄격했다. 문학도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베네수엘라 문학을 새로 쓰겠다는 사명감도 없었다. 우리는 편집일에 종사했다. 깨끗함과 정확함, 그럼 그만이었다.

 

 

p. 207
나는 창문을 열고 나무 한 그루 없는 거리를 내다보며, 자욱한 죽음의 연기 속에서 옥수수빵 냄새를 느껴보려 했다. 눈을 감고 어느 일생의 뼈만 남은 잔해를 힘껏 들이마셨다. 삶이란 이미 지나간 것이었다. 우리가 한 일과 하지 않은 일이었다. 막 부풀어 오르기 직전의 빵처럼 반으로 갈라진 우리가 올라가 있는 쟁반이었다.

 

 

p. 233
아우로라 페랄타의 죽음이 내 앞길에 마련해준 으뜸 패로 무언가 해야 했다. 어쩌면, 안 될 건 없으니까. 내가 아우로라 페랄타가 되어볼 수도 있었다. 시도는 해볼 만했다. 어둠에 싸인 그 방에서, 나는 결정을 내렸다. 후퇴는 없었다.

 

 

p. 238
나는 방문을 열어두었다. 산티아고가 내게서 훔칠 작정이었다면, 진즉에 훔치고도 남았으리라. 침대 위에 고이 놓인 여권이며 서류들이 쓸모없는 물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세상은 길 위에서 벌어지고 있었고 터무니없는 힘으로 우리를 짓눌렀다. 다른 사람들이 감옥에 끌려가거나 죽어나가는 동안 침묵을 지키고 그저 바라보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아직 살아 있었다. 동상처럼 뻣뻣했을지언정, 살아 있었다.

 

 

p. 247~248
후회할 때가 아니야, 나 자신에게 말했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일 뿐이다. 
내 의무는 살아남는 것이었다.

 

 

p. 258
아우로라가 되는 일은 시작도 전에 진 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나는 이제 서른여덟이 아니라 마흔일곱 살이었고, 문학과 언어를 전공한 출판 편집자가 아니라 관광학과 비서학 학위 -성적표에 따르면, 지극히 평범한 성적의 학위-를 지닌 요리사처럼 보여야 했다. 그건 일종의 사회적 지위 하락을 의미했다.

 

 

p. 260
돈이 있으면 돈을 원하는 이들의 표적이 되었지만, 없는 것은 훨씬 더 끔찍했다. 그리고 대다수가 그렇게 살았다. 끝없는 파산 속에서.

 

 

p. 262~265
엄마, 우리의 세상은 뒤집어져서는 다른 사람들 위로 내려앉았어요. 산 자와 죽은 자를 짓뭉겠고 몸짓 한 번으로 그들을 하나로 묶어버렸어요... 엄마도 알겠지만 다른 변화들도 있었어요. 내 이름은 이제 엄마랑 같은 이름이 아니고, 나는 곧 여길 떠날 거에요. 이해해주기를 바라지는 않아요. 다만 내 말을 들어주면 좋겠어요. 

엄마의 이름으로 충분했으니까. 엄마의 이름이야말로 나를 감싸줄 수 있는 유일하고도 튼튼한 집이었어요. 아델라이다 팔콘. 엄마와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는 건 나를 보호하는 방식이었어요. 저속함으로부터, 무지로부터, 우둔함으로부터.

엄마가 살아서 그런 꼴을 보지 않아 다행이에요. 이제 내가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건 엄마의 이름과 내 이름이 의미를 갖던 나라를 버리고 싶어서가 아니에요. 이름을 바꾼 건, 엄마, 두려움이 나를 집어삼켰기 때문이에요. 엄마도 알다시피, 나는 엄마처럼 용감했던 적이 없잖아요. 단 한 번도. 그래서 이 새로운 전쟁 속, 엄마의 이 딸은 동시에 두 편에 서 있어요. 나는 사냥하는 사람인 동시에 입을 다무는 사람이에요. 내 것을 지키며 조용히 타인의 것을 훔치는 사람이에요. 나는 양쪽 진영의 경계 중에서도 가장 나쁜 곳에 사는 거에요. 왜냐하면 나처럼, 겁쟁이들의 섬에 사는 이들은 아무도 상실에 반기를 들지 않으니까요.

 

 

p. 281
사람은 자기 가족이 묻힌 곳에 속하는 법이라면, 내 자리는 어디일까. 평화와 정의가 있을 때여야만 누군가를 묻을 수 있다. 우리에게는 둘 다 없었다. 그래서 영면에 이르질 못했고, 용서는 바라지도 못했다.

 

 

p. 308
거짓말은 어디서부터 시작하는가? 이름에서부터? 몸짓에서부터? 기억에서부터? 어쩌면 말에서부터?

 

 

p. 317~318
산다는 것, 아직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이자 죄책감이라는 이빨로 나를 물어뜯는 기적. 생존한다는 것은 도망치는 사람과 동행하는 공포의 일부이다. 누군가 당신보다 살 가치가 있었음을 알려주겠다고, 우리가 건강할 때 무너뜨릴 틈을 노리는 해충이다.

 

  

마지막 문장: 카라카스는, 언제나 밤이리라.

 

 

소설 속에서는 차베스도 마두로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카라카스의 이름과 정부를 지지하는 특정세력들의 권력과 폭행만으로도 충분히 베네수엘라의 아픔이라는 것이 전해지는 작품이다. 몇 년 전 살인적인 물가상승에 정치혼란, 치안 불안 등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베네수엘라 국민들의 엑소더스(대탈출) 행렬이 이어졌다. 국민의 10%가 넘는 인구의 탈출... 자원의 역설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잔인하지 않은가......

 

이 소설을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 엑소더스 exodus는 사람이나 자금이 어떤 지역이나 상황에서 대량으로 빠져나가는 것.

※ 자원의 역설(자원의 저주) 천연자원이 풍부한 국가일수록 오히려 경제 성장이 둔화되고, 삶의 질이 하락하는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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