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페루츠 <심판의 날의 거장>
첫 문장: 나의 작업은 끝났다. 나는 1909년 가을에 있었던 일들, 연달아 일어난 비극적 사건들을 적어 놓았다. 그 사건들과 나는 아주 기이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내가 기록한 것은 완전한 진실이다. 아무것도 건너뛰지 않았고, 아무것도 억누르지 않았다. 그럴 까닭이 뭐가 있겠는가? 나에게는 무언가를 숨길 이유가 없다.
1909년 가을. 고르스키 박사는 궁정 배우 비쇼프의 저택에서 실내악 연주나 한번 하자면서 나(요슈 남작)를 찾아온다. 그들은 각자 첼로와 바이올린을 들고 오이겐 비쇼프의 집으로 간다. 연주가 한창일 때, 비쇼프의 집에 펠릭스(비쇼프의 처남)의 동료인 엔지니어 발데마르 졸그루프가 찾아온다. 그들은 한참 음악과 다른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하다가 비쇼프한테서 이상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내용인 즉, 한 젊은 해군장교가 동생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휴가를 받아서 왔다고 한다. 그 동생은 화가이자 아카데미 학생으로 재능이 탁월했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살을 했다는 것. 그 해군 장교는 동생이 어떤 생활을 했는지 알아내고 동생이 살았던 대로 두 달 정도 생활을 하게 되는데, 어느 날 그 역시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가 끝나고나서 집으로 돌아가려던 사람들에게, 비쇼프는 저녁을 먹고 가야 된다며 붙잡는다. 그리고 비쇼프는 자신이 연극 연습을 할 때 가는 별채에 잠시 다녀오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그날 자살을 하게 되는데...
비쇼프의 처남인 펠릭스는 비쇼프의 자살이 나(요슈 남작)에게 원인이 있다면서 책임을 묻는다. 4년 전 비쇼프의 아내인 디나와 연인관계였던 요슈남작은 아직도 디나를 잊지 못하고 있고, 그로 인해 비쇼프의 주위를 계속 맴돌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쇼프가 거래하던 은행이 파산되었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림으로써 자살에 이르게 했다는 것. 또한 비쇼프의 책상 위에서 요슈남작의 파이프가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요슈남작은 자신의 파이프가 도대체 왜 그 자리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요슈남작은 그 자리를 피할 생각만 할 뿐, 다른 적극적인 대처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펠릭스의 동료인 졸그루프가 요슈남작에게는 책임이 없다며 이유를 찾아야 한다고 나선다. 처음에는 멀리 떠나버리려던 요슈남작은 원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고 행동을 옮긴다. 그렇게 해서 고르스키 박사, 엔지니어 졸그루프, 요슈남작은 결국 문제의 단서가 될만한 사람을 찾았는데, 그녀 또한 자살을 시도해서 병원에 있는 상태이다.
그리고 그 뒤에 졸그루프도 자살을 하게 되는데......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원인이 밝혀지고 소설의 끝인가 보다 했던 곳에 <편자 후기>라는 짧은 글이 있다. 편자 후기는 요슈남작의 글을 책으로 펴낸 사람이 쓴 것인데, 편자는 이 글(앞에 요슈남작이 스스로 말하고 있는 글)을 소설이라고 부르며 진실이 아니라 한다. 실제로 오이겐 비쇼프를 죽게 만든 사람은 요슈 남작이 맞고, 그는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것이다.
(요슈 남작의 글 속에 16세기 피렌체에 화가 조반시모네 키기라는 인물 얘기가 나온다. 그는 살인을 저지르고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는데, 어떤 약물의 작용으로 <최후의 심판>의 환영을 보게 되고, 정신에 이상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체험했던 것들을 그림으로 옮김으로써 <심판의 날의 거장>이라는 별명을 갖게 된다는 이야기다. 요슈 남작 또한 죄를 저지르고 나서,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고 자신의 행위를 글로 남기게 되었다는 것. 심판의 날의 거장의 이야기도, 요슈남작의 이야기도 모두 액자소설의 형식으로 소설속에 들어가 있다.)
p. 10~13
이 믿기지 않는 비극적이고 끔찍한 사건은 9월 26일부터 30일까지, 즉 닷새를 넘지 않는 기간 동안에 벌어졌다. 모혐과 같은 추적 과정, 보이지 않는 적을 쫓은 여정이 닷새간 지속된 것이다. 적은 육신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수 세기에 걸친 과거의 무시무시한 망령이었다. 우리는 핏자국을 발견하고 그것을 뒤따라갔다. 말없이 시간의 문이 열렸다. 우리 중 누구도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예감하지 못했다. 지금 내게는 마치 우리가 어둡고 긴 통로를 더듬더듬하며 한 발 하 발 힘겹게 나아간 것처럼 여겨진다. 통로 끝에서 악마가 곤봉을 쳐들고 기다리고 있고...... 곤봉이 두 번, 세 번 휙휙 내리쳤고, 마지막 일격이 나를 때렸다. 최후의 순간에 날랜 손길이 나를 다시 삶으로 끌어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파멸했을 것이고, 오이겐 비쇼프 그리고 졸그루프와 끔찍한 운명을 함께했을 것이다.
이것은 끝난 일이 아니다. 아니,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영상들이 심연으로부터 올라와 내게로 몰려온다. 밤중에도 낮에도, 물론 이제 그것들은 다행히도 희미하고 그림자 같은 모습에 불분명한 형체만을 띠고 있다. 나의 뇌 속에 있는 신경은 잠자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충분히 깊은 잠에 든 것은 아니다. 그리고 가끔 갑작스러운 불안이 나를 사로잡아 창가로 몰아간다. 그러면 꼭 저 위에서 무시무시한 빛이 엄청난 물결을 이루며 하늘을 가로지르는 것만 같다.
그날 이후로 그 끔찍하기 그지없는 나팔 빨강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림자는 남아 있다. 그 그림자가 자꾸만 다가와 나를 에워싸고 나에게 손을 뻗친다. 이 그림자는 나의 삶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을까?
그런데 내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이 모든 일을 기록하게 된 데에는 또 한가지 이유가 있다. 졸그루프는 죽기 직전에 글이 적힌 양피지 낱장을 없애 버렸다. 이제부터 더는 그 끔찍스러운 착각에 사로잡히는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그리한 것이다. 하지만 그 양피지와 같은 것이 또 없는 게 정말 확실할까? 사람들에게 잊힌 세상 어느 외진 곳에 그 피렌체 오르간 연주자의 또 다른 기록이 혹시 남아 있지 않을까? 고물상의 잡동사니 속에 파묻힌 채로, 혹은 오래된 도서관의 2 절판 책들 뒤에 숨겨진 채로, 혹은 에르진진이나 디야르바키르나 자이푸르의 어느 시장 바닥에 놓인 양탄자와 칸자르와 코란 표지 사이에서 누렇게 변색되고, 먼지가 쌓이고, 곰팡내 나고, 쥐들에게 갉아 먹힌 채로 남아 있지 않을까? 그곳에서 부활할 준비를 갖추고 호시탐탐 새로운 희생자를 노리고 있지 않을까?
우리 모두는 창조주의 위대한 의지가 실패한 결과로 생긴 피조물이다. 우리는 무시무시한 적을 우리 안에 지니고 있으면서 그것을 예감하지 못한다. 적은 움직이지 않는다. 잠자고 있다. 죽은 듯이 누워 있다. 만약 적이 깨어 살아난다면 통탄할 일이다!
p. 54
내가 사라진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해석할지 잘 알았다.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그 시간의 중압감으로부터의 도피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게는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내가 어릴 적에 똑같은 행동을 여러 번 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가령 어머니의 명명일에 꼼꼼하게 외운 축하 문구와 시구를 발표해야 할 때면 나는 비슷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나는 도망쳐서 숨어 있었고, 사람들은 절대 나를 찾지 못했다. 나는 모든 것이 한참 전에 끝난 뒤에야 다시 나타나곤 했다.
p. 132
약하게 불어오는 기억의 바람이 그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p. 135~136
나는 그 사건과 조금도 관계가 없다고 느꼈는데, 터무니없는 우연에 의해 사건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나는 급작스럽게 달라진 상황에 너무도 깜짝 놀라고 마비된 상태였기에, 나를 방어하려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았다. 나는 자신 속에 완전히 침잠해 있었으며, 사물을 이끄는 우연에 모든 것을 내맡겼고, 설명할 길 없는 전도된 느낌에 빠져 단 한 가지 소망만을 품었다. 전날의 사건에 대한 기억이 나를 건드리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을.
p. 234
우리가 타인에 대해 뭘 알겠습니까? 우리 각자는 나름의 최후의 심판을 안에 지니고 있습니다.
p. 239
이미 일어난 일. 더는 바꿀 수 없는 일에 대한 거부! 그런데 이것은 - 보다 높은 견지에서 보면 - 예로부터 모든 예술의 원천이 아니던가? 모든 영원한 행위는 수치와 굴욕과 짓밟힌 자존심으로부터, 나락으로부터 나오지 않았던가? 생각없는 대중들은 어떤 예술 작품 앞에서 우레와 같은 갈채를 보내며 열광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예술 작품은 그 창조자의 파괴된 영혼을 드러낸다.
※ 소설속에 등장하는 음악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 3악장
브람스 피아노 3중주 B장조 스케르초
※ 레오 페루츠의 다른 작품
2021.01.12 - [북리뷰/문학반] - 레오 페루츠 <스웨덴 기사>
레오 페루츠 <스웨덴 기사>
레오 페루츠 <스웨덴 기사> p. 15 이제부터 스웨덴 기사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것은 1704년 초의 몹시 추운 겨울 날, 농가의 헛간에서 만나 친구가 된 두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오폴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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