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병모 <바늘과 가죽의 시詩>
이 소설은 그림 형제의 <구두장이 요정>을 모티브로 한다.
가난한 구두장이 부부의 집에서 밤마다 그들을 위해서 구두 만드는 것을 도와주던 존재들은, 조금씩 형편이 나아지는 구두장이 부부의 삶을 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구두장이는 길드에 정식으로 가입된 기쁨으로 그 존재들에게 옷과 구두를 선물로 작업대 위에 놔두게 되는데, 그 존재들은 그 선물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지만, 옷을 나눠 입고 신발을 나눠신더니, 바늘을 내려놓고 노래 부르며 구두장이 부부의 집을 떠난다.
수제구두 공방을 하며 살고 있는 안이라는 남자가 있다. 모든 공정을 혼자 처리하는 관계로 수제화 한 켤레를 만드는데 한 달 이상이 걸려서, 분기별로 공방교실을 열어서 경제적인 부분을 충당하고 있다. 구두 관련 블로그가 있기는 하지만, 글도 얼마 있지 않고, 관리도 제대로 하고 있지 않은데, 그런 블로그를 보고 간신히 찾았다면서 가게 안으로 누군가 들어온다. 목소리만으로 누군지 알 수 있는 그녀. 바로 '미아'다. 안과 미아는 오래전, 사람들이 정령이나 이런저런 이름으로 불리던 존재에서 인간의 몸으로 몇백 년의 시간을 살고 있다. 안은 원래부터 했던 일, 구두 만드는 일을 하고 있고, 반면에 미아는 구두를 만드는 일만 아니면 뭐든 하다가, 주방용품을 만들어 팔았는데 그게 지금은 소규모 사업체가 되어 있는 상태다. 미아는 자신이 결혼할 사람에게 안이 지은 신발을 신게 해주고 싶다면서 유진이라는 남자와 함께 욌다. 무한한 생명을 가진 미아가, 그들에 비하면 한낱 순간을 살아가는 인간과 결혼을 하겠다니, 안은 미아가 이해하기 힘들다.
안에게도 함께 하고 싶었던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자신은 그 상황을 일부러 피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을 3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다시 만나게 된다. 안은 젊은 모습 그대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녀는 나이가 지긋한 모습으로 말이다. 바로 공방교실에서, 태어날 아기에게 주고 싶다고 신발을 만들고 있는 시인이 있었는데, 그가 이 공방에서 처음으로 만들었던 신발이 자신의 어머니를 위한 것이었다. 그 신발의 수선이 필요하다면서, 시인의 어머니가 직접 신발을 가지고 왔는데 바로 오래전 자신이 떠나왔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시인의 어머니는, 말이 안 된다 생각하면서도 혹시 그 사람이냐는 질문을 하고 바로 그 말을 거둬간다. 안은 아무렇지 않게 행동을 하고 시인의 어머니를 돌려보내지만, 미아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시인의 어머니를 만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소설을 읽다 보면, 영화 <아델라인:멈춰진 시간>이 생각난다. (당연히 포스팅이 되어 있는 영화라 생각했는데, 검색하니 나오지를 않는다.....-.- 조만간 써야지.) 무한과 유한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보게 하는 소설이다. 제목의 詩가 참으로 어울리는.
p. 22
그러니까 미아, 너의 곁에는 지금 그런 사람이 있구나. 두 개의 그림자를 기꺼이 하나로 합쳐도 좋을 만한.
p. 37~38
미아와 얀은 이야기한다. 어째서 빛이나 물이나 공기나 흙의 일부였던 우리가, 그러면서도 동시에 액체와도 기체와도 꼭 같지 않고 더욱이 고체는 아니었던 어떠한 상태를 벗어나서, 손만 뻗으면 서로의 얼굴을 어루만질 수 있는 인간이 되었음에도 얼굴에 주름이 잡히지 않으며 쇠잔하지도 병들지도 않을까. 이는 유한인가 무한인가. 오래전부터 인간들은 우리를 정령이나 이런저런 이름으로 불렀는데, 우리는 이제 서로를 뭐라고 부르면 좋지. 지금은 존재들이 예전만큼 눈에 띄지 않는데, 그들은 모두 한밤의 어둠이 보장되는 숲으로 숨어 버렸나. 어쩌면 그들도 우리처럼 상태가 달라져버려서, 아주 보통의 인간인 척하며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 어떻게 우리는 존재의 특성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이며, 자신의 모습을 결정하고 바꿔나갈 수 있을까. 아주 오랜 옛날이라고만 불릴 뿐 특정되지 않는 시절의 상상 이야기로 후대 사람들에게 전해진 그 어느 날 밤, 노부부가 지어준 옷과 함께 우리가 얻은 것은 편리함인가, 저주인가. 우리는 과연 언제까지 인간 비슷한 것으로 있을 수 있는지, 그것을 알게 되는 날이 올까 하고.
p. 40~41
농경의 시대를 지나 도시에 파묻히고 도시 풍경의 일부가 된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주시하지 않고 조우와 결별을 일용할 양식처럼 삼는 한편, 얀 자신은 한동안의 정박 이상으로 일생의 정주를 꿈꾸지 않으며 일생이라는 의미도 체감하지 못하니, 타인과 함께 늙어가지 않는다는 문제에 대해 너무 깊이 염려하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것을, 사람의 삶은 신이 머금은 한 번의 거대한 냉소에 불과함을 알게 된다.
p. 43
신이 예정한 종말이라는 것이 있다며 미아와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서 그것을 맞이하고 싶다는 마음을, 어쩌면 그날이 바로 오늘이거나 내일일지도 모른다는 절박감을 갖고서. 그 기대가 비록 천 년간 틀어지더라도.
p. 44~45
그는 고장 난 수레처럼 무기력한 사람들의 움직임 속으로 들어가서, 공허와 폐허와 번민이 범람하는 표정들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동안, 어떤 물리적 변용을 동원하지 않고도 그들 가운데 하나가 된다. 그곳에 사는 보통의 사라들과 닮아지고 그는 이안이 된다. 그 과정에서 사람을 비롯하여 물질로 이루어진 세상의 모든 구체물이란 이토록 단순한 분자의 배열과 결합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러니 자신이 이렇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어떤 모습으로 바뀌었을지 알 수 없는 여성을 이름만 갖고 수소문하는 일은 바람에 날려간 민들레 씨앗 가운데 하나를 찾기와 다르지 않아서, 안은 다만 미아에게로 한 걸음 가까워졌음을 위안으로 삼는다.
아마도 세상에 남은 유일한, 우리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존재에게로. 그러는 동안에도 옮겨 다니는 곳마다 그가 할 줄 아는 유일한 노동을 이어가며, 주기적으로 새로운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다.
p. 50
우리 같은 존재가 우리 이외의 누군가를 사랑하고 가족을 이룬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못할 짓이 아닌가. 너는 정말로 그 사람과 가족이 되고 싶은가.
p. 92
삶이나 사랑에 의미라는 게 있다면, 어디까지나 그것과 충분한 거리를 둘 때 발생하는 것이었다.
p. 104~105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무한의 시간 가운데 한 개의 점에 불과한 날들을 나누고 싶은 충동을 느낀 상대가, 안이라고 없을 리 없다. 그러나 철저하게 하룻밤, 길어야 반년을 넘기지 않는 관계를 맺고 끊기를 거듭한 것은 그의 선택이다. 사람과의 인연 같은 건 힘주어 잡아당기면 찢어지는 곤충의 투명한 날개에 불과하다고. 너무 많은 인연을 마주치면 그 누구와도 매듭을 맺지 못한다. 방대한 기억이 축적되면 피치 못하게 변형이 생기고 그 무엇도,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한다...... 않는다, 에 가까울 것이다. 언젠가는 부서지게 마련이라면 처음부터 의미를 두지 않음으로써, 내구력을 가늠할 수 없는 이 삶과 타협하고 감정적 휴전을 맞이한다. 안이 보통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마음은, 사람이 하루살이나 매미를 보는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p. 107~108
네가 선택한 것이라 그 정해진 결말을 감수한다면, 그걸 감수하는 너를 지켜보는 나의 마음은 어째서 고려하지 않느냐고 묻지 않는다.
p. 110
점유할 수도 당겨 쓸 수도 없는 시간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사라지는 인간과 인연을 맺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은 없다고. 그럼에도 그 무의미를 선택한 미아에게 자신은 무엇을 해 줄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일이, 남아 있는 날들의 목표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p. 117
그러나 자기가 지금 여기 존재한다는 것에 어떤 논거가 붙을 수 있다는 말인가? 세상 어느 저울로도 달아볼 수 없는 무한한 공허와 고독을, 무슨 수로 증명한다는 것인가?
p. 118
지나치게 서툴게 잘라내어 재활용도 어려운 가죽 끄트머리 조각과 녹밥 부스러기와, 바늘에 찔리고 때로 칼에 베인 상처를 비롯한 모든 실패의 흔적에도 불구하고, 안은 자신으로서는 짐작할 수 없이 아득한 어딘가에 분포한 것만 같은 그 인간적인 보람, 소박한 현시욕들을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안다.
p. 144
유진과 같은 보통의 사람이 미처 감지하지 못하는 영역에 새겨진 감정이, 유한과 무한의 사이 그 어디엔가 자리한 존재의 오랜 허무가, 한 켤레의 구두에 담겨 있다.
p. 146~147
사라질 것을 알면서 곁에 두겠다는 걸, 이해하고 싶지 않다. 신을 사람이 없는데도 끝까지 모카신을 완성하는 마음을, 필멸과 순환이라는 이름으로 떠나고 돌아오고 떠나기를 반복하는 자연의 섭리를. 그러나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따로 있다. 자신이, 미아가, 왜 아직까지 이런 형태로 살아 있는지를. 어쩌면 신은 존재로 하여금 또 다른 존재와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해하고 싶은 강렬한 소망과 그것이 충족되지 않는 데서 비롯한 절망만을 존재 안에 배열했을 뿐.
p. 164
"사라질 거니까, 닳아 없어지고 죽어가는 것을 아니까 지금이 아니면 안 돼."
p. 151
안은 생각 한다. 한때 우리는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였다. 우리는 명사인 동시에 동사였다. 모두 하나처럼 보이는 동시에 서로 다른 음계를 지닌, 과거이면서 현재이기도 하고 미래인 것도 같으나 실은 시간에 속해 있지 않은 존재들이 빚어내는 음악의 일부였다. 미아와 형제들과 함께, 언제까지고 존재들 가운데 하나로 머물렀다면 자신들 또한 지나치게 눈부신 인공의 빛과 지속적으로 낮게 신음하는 기계의 굉음에 끼이고 부서져 사라졌을지 모르는데 그게 차라리 나았을지도.
p. 155~156
존재들이 있던 시절, 이런 노랫소리나 그 밖의 소음들이 서로 조금도 구별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몸에 흡수되곤 했다. 지금의 몸과는 다른, 소리를 온몸으로 껴안을 수 있는 존재였던 그 무렵에는 앰프도 전파도 없고 무언가를 멀리까지 전달하는 데에는 천둥을 비롯한 신의 목소리 말고 다른 방도가 없었음에도 온 세상의 소리가 몸속으로 들어왔다. 몸이 곧 소리였고 그들은 소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육肉이라는 형태를 갖추고 나서야, 소리란 몸의 일부가 아니고 한순간 몸에 닿을 뿐 머무르거나 고일 수 없으며 매질을 타고 팽창하다 부서지고 흩어지고 사라지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형태야말로 궁극의 빈곤이다.
p. 158
"아니 그 얘기를 먼저 하시지, 설명이 매번 뒤늦거나 부족하시네요."
그 부족한 말이라도, 뒤늦게라고 누군가에게 가닿아야 하지 않을지를 안은 지난 며칠째 생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시인의 어머니. 다시 이름을 알게 되고 나서부터 그 노부인에 대한 생각이 안의 온몸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그리움이나 죄책감과는 조금 다른 것도 같은, 그렇다고 깊은 허무도 환멸도 아닌 사념의 사금파리들이.
p. 168
이 생에서 두 번을 만난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녀의 사라져 가는 시간을, 닳아져 가는 삶을 마지막까지 지켜보아주어야 한다는. 물을 머금어본 적 없이 방치되어 말라비틀어진 씨앗 같은 기억에, 이제라도 솜을 깔고 현재를 분무해주어야 한다는. 그 행위가 비록 무용하더라도, 씨앗을 간직해온 사람에게 보일 수 있는 유일한 예의인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망각과 기억 사이에 난 미로 같은 길들을 따라 육신의 출구를 향해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배웅하는 일이, 자신의 몫인 것만 같다.
p. 170
우리에게는 찰나에 불과한 시간만을 머물렀다가 부서지고 사라질 세사의 모든 것을 붙들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뻗고야 마는 손을, 변함없이 바늘을 쥐는 손만큼이나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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