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3월 27일. 첫 모의고사 본 날.
따르르릉~따르르릉~
"네"
"안녕하세요? 요즘 문제 되고 있는 사회문제에 대해서 전화조사를 하고 있는 학생인데요,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관심 없습니다." (뚝!)
따르르릉~따르르릉~
"네"
"폰팅하실래요?" 분명히 조금 전에 전화를 걸었던 그 남학생의 목소리였다.
"조금 전에는 사회문제를 조사한다고 하더니, 이제는 폰팅입니까? 할 일 없으면 영어단어나 더 외우죠? 전화 끊겠습니다."
"잠깐만요, 잠깐만요. 말투가 아저씨같은 거 알죠? 그러지 말고, 잠깐만 대화 좀 하죠?"
"아저씨 같은 사람이랑 대화해서 뭐하게요? 그리고 오늘 제가 생각보다 시험을 못 봐서 기분이 아~~ 주 엉망이거든요. 말하기도 귀찮으니까, 그만 하죠. 전화 끊습니다."(뚝!)
따르르릉~따르르릉~
따르르릉~따르르릉~
"......"
"와, 성격 정말...오늘 시험 봤다는 거 보니까, 나랑 동갑인가 보네요. 그쪽이 말 안 해도 되니까, 나만 할게요. 사실 내가 목소리가 좀 좋기도 하지만, 기타를 아주 잘 치거든요. 한곡만 치고 전화 끊을게요. 그건 좀 들어줍시다. 아마 기분 좀 좋아질걸요?"
내가 아무런 반응도 없고, 수화기를 그대로 들고 있고 있는 게 느껴졌는지, 그 남학생은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소파에 드러누운 채, 수화기를 귀 옆에 내려놓고 있는데, 한곡만 친다던 그 아이의 기타 소리는 30분 가까이 계속되었다. 무슨 곡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제법 들어줄만한 연주였다. 그리고 연주가 끝나나 싶었는데, 그 아이의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당신을 생각해요. 당신이 떠나시던 그 밤에 이렇게 비가 왔어요..."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이었다. 나도 모르게 옆에 내려놓았던 수화기를 들어서 귀에 대고 있었다. 불이 꺼진 거실소파에 누워있던 상태라서 그랬는지, 그 아이의 목소리만이 존재하는 거 같았다. 노래가 끝나고, 그 아이는 이렇다 저렇다 할 인사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끊으라 할 때는 언제고, 인사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리는 그 아이가 야속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뒤로 그 아이는 주말을 빼고 2주 동안, 매일 같은 시간에 전화를 걸어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고 전화를 끊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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