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비문학반

[책] 박노해 <걷는 독서>

나에대한열정 2021. 12. 12.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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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해 <걷는 독서>


책 서두에는 7페이지에 달하는 서문이 있다. 본문의 글도 좋았지만, 서문을 읽으면서 왜 이렇게 스스로 부끄러웠는지 모르겠다.

서문 중에서.

내 인생의 풍경을 단 한 장에 새긴다면 '걷는 독서'를 하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돌아보니 그랬다. 가난과 노동과 고난으로 점철된내 인생길에서 그래도 나를 키우고 나를 지키고 나를 밀어 올린 것은 '걷는 독서'였다. 어쩌면 모든 것을 빼앗긴 내 인생에서 그 누구도 빼앗지 못한 나만의 자유였고 나만의 향연이었다.

어느덧 내 생의 날들에 가을이 오고 흰 여백의 인생 노트도 점점 얇아지고 있다. 만년필에 담아 쓰는 잉크는 갈수록 피처럼 진해지기만 해서, 아껴 써야만 하는 남은 생의 백지를 묵연히 바라본다. 그리하여 날마다 계속되는 나의 반성은 이것이다. 나는 너무 많이 읽고 너무 많이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일생 동안 거듭 읽고 다시 읽어온 건 가장 오래 전승된 짧은 말씀들이 아닌가. 그것들은 죽간에 붓을로 쓰거나 양피지의 깃촉으로 쓰거나 돌에 새겨진 말 중의 말, 글 중의 글들이 아닌가. '적게 말하여라. 많은 것을 적은 말로 하여라.' 그래서 나는, 단호한 원칙과 각오로 내 모든 글을 만년필로 종이에 꾹꾹 눌러쓰고 있지만, 육필 원고가 키 높이를 넘어갈 때면 이마저 세상에 소음과 잡음을 더하는 것이 아닌가 반성을 한다.

만일 내가 한 달에 몇 병씩 쓰는 잉크 병에 내 붉은 피를 담아 쓴다면, 그러나 난 어떻게 쓸까. 더 적게 쓰고 더 짧게 쓸 것이 아닌가. 한 자 한 자 목숨 걸고 살아낸 것만을 쓰고 최후의 유언처럼 심혈을 기울여 쓸 것이 아닌가. 나는 그런 글만을 써야 한다고 몸부림쳐왔다.

우린 지금 너무 많이 읽고 너무 많이 알고 너무 많이 경험하고 있다. 잠시도 내면의 느낌에 머물지 못하고 깊은 침무과 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끊임없이 찾아다니고 찍어 올리고 나를 알리고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인정을 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책을 읽는 것조차 경쟁이 되고 과시와 장식의 독서가 되고 말았다. 독서가 도구화될 때, 그것은 거룩한 책의 약탈이다. 내가 책 속의 지식을 약탈하는 듯하지만 그 지식이 나의 생을 약탈하고 있다. 진정한 독서란 지식을 축적하는 '자기 강화'의 독서가 아닌 진리의 불길에 나를 살나내는 '자기소멸'의 독서다.

어디서든 어디서라도 나만의 길을 걸으며 '걷는 독서'를 멈추지 말자. 간절한 마음으로 읽을 때, 사랑, 사랑의 불로 읽어버릴 때, <걷는 독서.는 나를 키우고 나를 지키고 나를 밀어 올리는 신비한 그 힘을 그대 자신으로부터 길러내 줄테니, '걷는 독서'를 하는 순간, 그대는 이미 저 영원의 빛으로 이어진 두 세상 사이를 걸어가고 있으니.


모든 페이지에는 이렇게 사진과 짧은 글이 실려 있다. 하루에 몇장씩 아무곳이나 펼쳐서 읽어보아도, 참 좋다.

p. 83
머리 굴리지 말고
욕심 세우지 말고
겉멋 부리지 말고
단순하게 그냥 가기
본질로만 승부하기


p. 127
제일 좋아하는 열 개의 단어를 적어보라.
제일 경멸하는 열 개의 단어를 적어보라.
그러면 내가 누구인지 드러날 것이다.


p. 165
옳은 일을 하다가 한계에 부딪혀
여기서 그만 돌아서고 싶을 때
고개 들어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라.
지금 스스로 그어버린 그 선이
평생 나의 한계선이 되리니.


p. 167
두려운 것은 답을 틀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물음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p. 207
자주, 그리고 환히 웃어요.
가끔, 그리고 깊이 울어요.


p. 209
놀이에 몰입한 아이는 재미마저 잊듯이
진정 행복한 사람은 행복을 묻지 않는다.


p. 215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최악의 실수다.


p. 217
정치인에게 권력을 빼보라.
부자에게서 돈을 빼보라.
유명인에게 인기를 빼보라.
빼버리고 남은 것이 바로 그다.


p. 229
사람이 미워질 때면 울려오는 어머니 말씀.
'세상에 그런 사람도 하나 있어야제.'
'그인들 그러고 싶어서 그리했겠느냐.'


p. 245
생활이 고달프다 하여
함부로 살아가지 않기를.
가난과 불운이 내 마음까지
흐리게 하지 않기를.


p. 249
밤하늘에 가장 빛나는 별은
북극성도 명왕성도 아니다
인공위성이다.
너무 번쩍이는 빛을 경계하라.


p. 251
중력을 거스른 인간의 직립.
저항은 존재의 숙명이다.


p. 261
남을 딛고 앞서가기보다
나를 이겨 도약하기를.


p. 273
오늘 하루
얼마나 감동했는가.
얼마나 감사했는가.
얼마나 감내했는가.
그리하여 얼마나
더 나아진 내가 되었는가.


p. 287
좋은 부모가 되려고 안달하기보다
먼저 좋은 사람이 되기.
좋은 삶을 살아 보이기.


p. 291
기를 쓰지 말고
마음을 써라.


p. 301
권력은 중독이다.
자본은 중독이다.
인기는 중독이다.
질투는 중독이다.
남탓은 중독이다.


p. 311
나에게만 다르게 들리는 소리가 있다.
내 목소리다.
나는 나 자신에게 늘 착각이다.


p. 319
'바빠서'라는 건 없다.
나에게 우선순위가 아닐 뿐.


p. 357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모든 것이 두근대던 시절.
젊음은 좋은 것이다.


p. 359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지만
사랑에 감싸여 있음을
느끼게 하는 이가 있다.


p. 361
나 어떻게 살 것인가 막막할 때는
어떻게 살지 말 것인가를 생각하라.


p. 419
타인을 속이는 순간, 나는 안다.
나 자신을 먼저 속였다는 것을.


p. 421
호랑이가 곶감을 무서워하는 것은
곶감이 뭔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는 건 그리 두렵지 않다.
무지가 두려움을 부른다.

p. 483
권력은 사람을 두 번 바꾼다.
권력을 잡기 위해 스스로 변하고
권력을 잡고 나면 그 힘에 변한다.
한 번은 기대 속에.
한 번은 배신 속에.


p. 484
거대한 착각-
나만은 다르다.
이번은 다르다.
우리는 다르다.


p. 599
같은 고난을 겪었다고
같은 잉태를 하는 게 아니다.


p. 603
한 인간의 진면목은
최고의 순간과
최악의 순간에
확연히 드러난다.


p. 607
내가 없어도 꽃은 피고
아이들은 자라나고
세상은 돌아간다.
내가 없어도 내가 없어도.


p. 619
어린 날 글자도 모르는 우리 할머니가 그랬지.
아가, 없는 사람 험담하는 곳엔 끼지도 말그라.
그를 안다고 떠드는 것만큼 큰 오해가 없단다.
그이한테 숨어있는 좋은 구석을 알아보고
토닥에 주기에도 한 생이 넘 짧으니께.
아가, 남 흉보는 말들엔 조용히 자리를 뜨거라.


p. 641
나쁜 자가 정당해지는 유일한 길은
더 나쁜 자가 나타나는 것이다.


p. 715
어떤 경우에도, 어떤 처지에도
인간의 위엄을 잃지 말 것.


p. 725
우리는 지나치게 다른 무언가가 되려고 한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으로 충분한데.


p. 775
나는 세상을 '위하여'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진정한 나 자신을 살아가는 길이
세상을 위한 길이기를 바랄 뿐.


p. 807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말 것.
미래를 위해 오늘을 살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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