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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을 다독이는 관계 심리학] 우즈훙, 나르시시즘과 외로움, 내 안의 나와 터놓고 대화하기

나에대한열정 2022. 1. 17. 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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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훙 <내 영혼을 다독이는 관계 심리학> 2022

 

우즈훙 <내 영혼을 다독이는 관계심리학> 나르시시즘과 외로움

 

우즈훙 <내 영혼을 다독이는 관계 심리학> 2022

 

나르시시즘과 외로움

내 안의 나와 터놓고 대화하기

 

 

<내 영혼을 다독이는 관계 심리학> 책의 앞날개에 소개되어 있는 작가 우즈홍

 

자신에게 나르시시즘을 허하라

 

이 책은 프롤로그에서, 기존의 자기애가 강하여 조금은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나르시시즘에 대하여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자기 내면에 잠재된 나르시시즘 수준의 발현에 따라서 사랑의 온도가 변하고, 관계의 유착정도도 달라진다고 본다.

 

또한, 이러한 나르시시즘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도 영향을 준다고 한다. 즉, 높은 수준의 나르시시즘을 지닌 사람은 스스로가 훌륭하다고 생각해서 늘 열정이 넘치지만, 그 반대인 사람은 자신감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수치심까지 동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외로움도 나르시시즘에서 유발된다고 보는데, 나르시시즘의 정도에 따라, 혹은 그 손상에 따라 외로움의 영향력이 달라진다고 한다. 특히, 이 책에서는 나르시시즘과 외로움의 상태를 알고,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그 방향을 제시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p. 18
나르시시즘은 경쟁 사회에서 자신을 지키는 힘이다. 사회에서 상대적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보면 부족한 능력이나 허점의 구멍이 커 보이는 데 이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자신을 아낌없이 보듬고 보호하기 위해 자기에게 푹 빠지는 나르시시즘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자존감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나르시시즘이다.
자신을 보호하려는 나르시시즘이 강해지면 부정적인 감정이 양산된다. 이로 인해 사회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단절과 고립된 상황을 부른다. 반면, 자신의 부족한 부분까지 인정하는 나르시시즘은 실행력과 적극성을 부여해 주위의 인정과 사랑을 끌어내기도 한다. 위기를 극복하고 절망을 이겨내는 유용함도 나르시시즘에서 나온다. 나르시시즘에는 마력이 있다.

 

 

p. 70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잘못은 반복된다. 이는 어떤 개인이나 집단도 마찬가지다. 잘못을 인정하려면 잘못이 허용될 심리적 공간이 필요하다.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것은 타협적으로 관용적인 모습의 표현이다. 반대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과도한 나르시시즘과 편집증과 연결된다. 이제껏 항상 당신이 옳았다면 당신은 실속 있게 살아본 적이 없다는 진실의 반증이다.

 

 

P. 81
습관성 이룸이 생기는 근본적인 원인은 '관계를 맺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부족한 신뢰를 충족시킬 만한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는 것이다.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 자신이 하는 게 맞는지 의구심이 든다면 당장 행동으로 옮기기 어렵다. 억지로 하게 된 일과 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는 깊은 관계를 맺기 어렵다. 반항심이 생기고 미루게 된다. 따라서 미룸은 외로운 영혼의 필연적인 행위 표현이라 할 수 있다.

 

 

P. 85
'내가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비범한 성과를 거둔다'는 생각은 오히려 노력할 수 없게 만든다. 노력하지 않고 몰입하지 않으면 가설의 영향력이 그나마 살아남기 때문이다. 자신은 비범한 성과를 거둘 수 있는데, 다만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회피할 수 있는 공간을 남겨 두고 싶은 것이다. 진짜로 몰입하고 노력해서 이 가설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폭로'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결국, 자신이 완벽하다는 환각이 폭로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노력을 멈추게 만든다. 이런 심리는 복잡해 보이지만 핵심은 간단명료하다. 세상 혹은 특정 대상이 자신의 소망에 정확하게 호응해주기를 바라는 요구이다. 그 소망이 정확하게 응답되는 순간 자신이 전능하고 완벽하다고 평가받는다고 여긴다. 그 결과 그는 어떤 것에도 몰입할 수 없다.

 

처음 읽을 때에는 이런 심리라는 게 있을 수 있나 싶었다. 그런데 다시 한번 문장들을 읽어보면서, 혹시 내가 하려고 했다가 행동을 멈추었던 일들에 이런 류의 마음이 작동한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P. 91
진실이 존재하지 않으면 관계는 껍데기일 뿐이다. 그러므로 완벽하지 않은 자신을 드러낼 용기와 마주 설 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진실한 내 모습을 드러내기에 주저한다. 볼품없는 자신이 스스로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상대에게 드러남(보임)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완벽해 보일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언컨대 이는 의심과 의구심만 불러올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 단언컨대 외롭지 않은 사람은 없다. 다만 외로움에 대처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p. 100)

 

 

 

 

p. 106~107
외롭거나 다른 사람과 정서적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은 두뇌로 외부 세계를 해석한다. 그 결과 그들은 지나치게 체계적이고 적대적인 세계를 상상한다. 이것이 극단적으로 발전하면 적대감을 품고 있는 체계가 자신을 박해하고 있다는 피해망상을 부른다. 모든 것이 분명하고 눈에 띄는 원인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뇌가 저지르는 과도한 해독이다.

 

 

P. 111
한 사람이 얼마나 좋은지, 남에게 얼마나 희생하는지, 얼마나 재능이 많고 돈과 능력이 많은지 알 수 없어도 양질의 응답을 주고받지 못하면 관계에서 큰 문제에 직면할 수 있다. 따라서 응답의 방법과 호응의 과정을 의식적으로 연습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양질의 응답을 제공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자신의 소리를 내고 욕구를 표현하는 능력이다.

 

 

P. 115
사랑은 연계이다. 원시적인 외로움에 갇힌 사람은 실연한 사람이다. 사람 간의 연계가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연계를 끊은 정도가 심각할수록 사람은 자신을 신이라 여기며 외부 세계가 자신의 의지에 부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과 불쾌감에 빠진다. 상대방을 배려하거나 이해하지 않고 그저 자신에게 반항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따른 분노는 상대방의 생각, 행위 등 모든 것을 파괴하려 든다. 많은 폭력성이 이와 관련 있다. 자신을 지나치게 억누르는 사람도 자신이 신과 같다는 나르시시즘일 수 있다. 그들도 쉽게 분노를 느끼지만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분노를 억누른다. 그러나 통제력을 잃는 순간 그들은 파괴적인 폭력성을 띨 수 있다.

 

 

P. 117~118
관계 맺음이 이루어지기 전에 우리는 언제나 상대방을 판단한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는데 "내 판단에 얼마만큼의 확신이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판단에 대한 확신이 강할수록 안정감과 통제력을 주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의 여지는 언제나 남는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확신은 다른 사람에게 강제한 이미지이며 일종의 침입이다. 따라서 그 판단이 옳다고 하더라도 타인에 대해 단정적으로 판단하고 정의 내려서는 안 된다. 더구나 우리의 판단은 틀릴 가능성이 더 크다. 선입견과 편견을 불러와 관계의 파국에 불씨가 된다.

 

 

P. 119
자기애적 분노는 연약함의 표현이다. 이러한 분노는 외부 세계를 가리키면 외향적인 파괴력이 되고, 자기 내부를 가리키면 자신을 파괴해 관계에 있어 소극적으로 변하게 만든다. 외적 파괴력과 내적 연약함의 본질은 같다. 그들의 갈망은 항상 외나무다리를 걸으며 하나하나 충족되면 생동한 생명을 경험하고 좌절하면 죽음의 힘과 파괴 욕구를 쏟아낸다.

 

 

P. 127
인간관계의 상호작용은 매우 중요하다. 서로 다른 의견과 부정적인 감정을 수용할 공간과 면적이 필요하다. 인간관계에서 감정 소모가 발생하는 원인은 자신과 다른 견해와 부정적인 감정을 수용할 마음의 공간이 좁기 때문이다. 상대방에게 약간의 공간도 허용하지 않고, 오히려 스트레스를 가해 자신과 일치하도록 강요하는 지경에 이르면 관계는 깨진다. 불편하지만 이를 수용하는 사람은 상대의 눈치를 보고 자극하지 않기 위해 소극적으로 임한다. 하지만 이를 거부하면 관계는 어긋나고 유대는 끊어진다.

타인을 용납하는 정도가 우리 마음의 크기를 결정한다. 여기에 더불어 타인이 어느 정도까지 자신을 마음에 담아주었는지에 따라 마음의 넓이와 폭이 정해진다. 일방적으로 상대를 이해해야 할 처지라면 그 마음의 크기는 크지만 깊이는 얕을 수 있다. 

 

 

P. 129~130
삶의 에너지에는 허락과 인정이 필요하다. 에너지의 함량을 높이려면 깊은 유대감과 개인 간의 친밀감이 돈독하게 뒷받침되어야 한다. 어설픈 관계보다 마음이 통하는 깊은 관계에서 강한 에너지가 발산되며 상대의 에너지를 수용할 폭도 더 넓어진다. 새로운 관계에서도 높은 수준의 에너지가 유발되는데 일상에 신선한 자극과 새로움이 공급되기 때문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자주 발생한다. 건강하지 못한 관계는 우리를 점점 위축시킨다. 감정의 대립으로 자신감을 잃게 되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세상의 긍정적인 응답이 필요하다. 응원해주는 다독임과 자신을 인정해주는 한 마디가 에너지로 전환된다. 그러나 이를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적개심과 의구심을 품는다면 긍정적인 응답은 단절된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에 포진하고 있는 적의를 먼저 소멸시켜야 한다.

 

 

P. 139
진정한 사랑의 중요한 기능은 자아의 한계를 돌파하고 통합을 달성하는 데 있다. 사랑을 얻으려면 자아는 때로 '죽을'수 있어야 한다. '희생'과는 차원이 다른 의미이다. 자신을 높이고 내세우기보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양보한다는 의미이다.

 

 

P. 176~177
삶에서 모든 노력은 나의 존재가 옳다는 느낌을 추구한다. 상대에게 사과를 강요하는 것은 그의 판단과 선택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상대가 틀렸다고 단정하고 사과를 받아 자신의 옳음을 증명해내려는 의도이다. 이에 상대가 잘잘못을 따져 사과를 선택하도록 기다려주지 않는다. 어떻게 반응할지 답을 정해놓고 종용한다. 성급하게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모든 선택에는 스스로 깨닫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과정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내가 못났고 나쁘니까 네가 나를 떠났다."라는 논리는 일부러 자신에게 상처 주는 논리이다. 버림받은 트라우마를 만들고 자신의 약한 부위를 골라 공격을 가하며 그 아픔을 이유로 고립되어 버린다. 그 결과 내면의 어둠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스스로 가라앉는다. 헤어 나올 방향과 길을 찾지 못한다면 말이다. 그러니 반성은 하되 자책은 하지 말자. 그 차이을 이해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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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180~181
관계의 공간에 상대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서로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며 마주 앉아야 한다. 허심탄회하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개선해야 할 점이나 문제가 되는 요인을 찾아 나서야 한다. 당장은 갈등이 촉발되는 불씨가 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관계의 독소를 제거하는 해독 효과를 낸다.
'너'에 대한 존중, 상대방에 대한 존중, 관계에 대한 존중이 관계의 보편적 인식으로 자리 잡혀야 한다. 파괴적인 관계에 속해있다면 그 관계가 혈연관계이든 각종 영화, 소설과 예술 작품에 의해 미화된 연애 관계이든, 우리의 생명력을 제한할 뿐이다. 이런 관계는 멀리하고 떠나는 것만이 답이다. 

다른 사람이 자유자재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자신의 공간을 지켜라. 자신의 선택을 존중하여 진정한 '나'를 드러내라. 개인 공간을 지키지 못하고 선택지도 없으면 심리적 방어체제가 발전되게 마련이다. 이런 방어체계는 극단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자신의 공간 확보를 위한 노력이기에 매우 귀중하다.

 

정말 그렇다. 어떤 관계든 처음에 껄끄러워지는 게 싫어서, 큰 소리 나는 게 싫어서 그냥 담아두게 되면, 시간이 지나서 언젠가는 더 거대한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다. 오히려 가볍게 넘길 수 있는 문제조차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는 것이다. 당장에 갈등이 유발되는 말이라고 해도, 우선은 해결하고 가는 과정 자체가 필요하다. 그리고 연습이 필요하다. 특히, 오래가야 하는 관계라면 더더욱 말이다. 내 경우에는, 부부관계라는 것이 그랬다. 신혼 때는 마냥 좋아서, 모든 것이 아무렇지 않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부딪히는 문제들이 생겼을 때 싸운다는 자체가 싫어서 넘어갔다. 그랬더니, 어느 순간 우리 부부 앞에는 넘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산이 생겨 있었다. 다행히, 원자폭탄 같은 거대한 폭음이 한번 있고나서부터는 우리는 서로를 더 이해할 수 있는 상태가 됐다. 그리고 지금은 가볍고 가벼울 때 해결해 나가려고 한다. 이런 과정 없이 좀 더 슬기로울 수 있다면 좋지 않겠는가. 

 

 

P. 187~188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라콘은 "자녀는 부모의 욕망을 욕망하고, 그것이 자신의 욕망이라고 착각한다."라고 말했다. 자녀가 부모를 위해 사는 것은 생각보다 쉽게 일어나며 부모가 의식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강조한다. 실제로 이전 부모 세대는 집안의 경제사정이나 사회적 환경으로 개인의 의지를 펼칠 공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삶에서 큰 아쉬움을 남겼다. 그로 인해 자녀 세대는 부모의 '의지 릴레이'에 참여하게 되고 대리만족을 위해 희생하며 살았다. 그러나 최근 몇십 년 동안 사회는 개인의 의지를 이룰 수 있는 공간이 크게 확장되면서 부모의 의지보다 자신을 위해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도 부모의 못다 이룬 꿈이나 사회활동을 하면서 아쉬움이 남는 부분을 자녀가 해소해주길 은근히 바란다. 부모인 자신들보다 더 훌륭하게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 또한 이와 같은 심리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이 부모의 선의라고 하더라도 아이에게는 심리적 정서적 압박이 될 것이다.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은 삶의 아름다움을 종종 느끼며 산다. 다른 사람의 의지에 얽매여 인생을 낭비하는 일이 적기 때문에 폭발적인 생명력을 보인다. 진정한 자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가족 모두 각자의 '역할'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다. 생명력을 펼쳐나가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알면 부모도 자녀에게 선택권을 주어 원하는 길을 갈 수 있도록 격려해줄 것이다.

 

주위에서 너무나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어쩌면 내게도 있는 모습일 수도 있다. 되도록이면 가이드 라이만 잡아주고 스스로 선택하는 삶을 살게 해주고 싶은데, 때로는 그 가이드라인 자체가 내 욕구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에 정답이라는 게 있을 수는 없겠지만, 이런 점을 의식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과 그냥 행동하는 것에는 분명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아이들의 삶에 마중물 같은 부모의 역할만 해보자. 제발 너무 넘어가지는 말자. 매번 암기하듯 되내어야 할 문제이다. 그러면 조금 더 나아지겠지.

 

 

P. 194
아이에게 공간을 내어주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지침을 내려주는 역할이 아니라, 아이의 에너지가 넓은 공간에서 좌충우돌하면서 흐를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이러한 유동 속에서 아이 재능이 자유롭게 발휘되며 자신의 경험과 관념을 형성할 수 있다.

완벽한 아빠라고 불리는 남자가 있었다.
어느 날 아들이 "내가 내린 결정은 다 틀린 거고, 아빠가 내린 결정은 다 정확한 것이네."라고 힘없이 말했다. 지혜롭고 완벽한 아빠였지만, 아들은 아빠의 지혜롭고 완벽한 제한에 답답함을 느꼈고 인생에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한 것이다. 훌륭한 부모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흔히 범하는 실수이다.

 

 

P. 199
성장기의 아이를 계속 부정하면 아이 자존감의 뿌리를 썩게 한다. 표면적으로 드러내 보이진 않아도 자신의 감정을 인지하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을 의식하며 살 수밖에 없다. 또한 자기 이상과 감정이 중요하다는 진리를 모른 채 억누르고 회피한다. 자기 스스로 내린 결정이나 판단을 틀린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녀에게 부모의 교육은 필요하다. 하지만 부모가 자녀를 양육할 때 정말 아이를 위한 교육인지 아니면 부모의 나르시시즘을 실현하려는 것인지 거듭 생각해야 한다. 나르시시즘에 의한 가르침은 나는 너보다 강하고 많이 안다는 사실을 중심을 두고 있으므로 자녀는 부모보다 못한 수준으로 성장하게 된다.

 

 

P. 201
나르시시즘이 강한 부모는 내면이 연약한 부모다. 그들은 아이에게 잘해주면서 아이가 자신의 희생을 인정해주기를 바란다. 아이가 드러내는 사소한 불만에도 무능감에 빠져 아이를 공격하며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보호하려 든다. 이런 부모는 끊임없이 아이에게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데.", "부모에게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은 은혜를 배반하는 짓이다."라고 강조한다. 자신이 바친 사랑에 아이들이 응답하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부모의 이런 행위에 죄책감을 느끼고 억지 감사를 표현한다. 진정한 감사가 아니다. 단지 두려움에서 나온 감사일뿐이다. 이는 아이가 성장한 후 부모의 행위를 깨닫게 되면 원망이나 반감으로 갈등을 빚을 수 있다. 그 결과 부모나 자녀 모두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로 해결의 해법이 없는 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

 

 

P. 204~205
경계의 기준선은 인간관계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어른 말을 들어야 한다는 논리로 그 기준선을 무시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자신의 경계를 세우지 못해 듣지 않고, 보지 않고,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 경계를 확보한다. 부모는 이를 반항이라 여기는데 이것은 아이를 독립된 인격체로 대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발상이다.
경계의 반대편은 친밀감이 아니라 공생이다. 친밀함이 독립적인 사람들 간의 융합이라면 공생은 양자의 차이를 소멸시켜 하나의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공생은 네가 나의 일부이므로 이념이나 관점, 생각까지 같아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 어떤 차이나 경계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 경계나 차이는 필수로 동반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이 경계가 서로의 존중으로 이어진다.

 

 

 

 

P. 213
"거절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적의 없이 단호하게!"
"사랑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유혹 없이 애정이 넘치게!"
심리학자 코후트는 관계에 필수적인 두 개념을 강조한다. 전자는 내가 너를 단호하게 거절하지만 적의는 없으며 네가 잘못되었다고 하지도 않겠다는 의미이다. 후자는 너를 사랑한다면 무조건적 사랑을 할 것이면, 나를 필요하도록 유혹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P. 214~215
유혹과 애정은 엄연히 다르다. 그럼에도 유혹이 마치 애정인 것처럼 거짓된 가면을 쓴다. 단언컨대 애정은 유혹으로 생겨날 수 없다. 어떤 감정이든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고 유혹에 의한 감정이라면 이것은 일종의 유희나 희롱에 불과하다.

인간 감정에서 '자발성'은 유일무이한 존재이다. 감정은 어떤 목적을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상황이나 느낌에 동화되어 표출되는 심리 작용이다. 마틴 부버가 말했듯 "너와 나의 관계에는 한 가지 전제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상대방을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라는 점을 각인하자. 심리 법칙을 이용해 의도적으로 상대의 특별한 감정을 억지로 끌어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는 감정에 대한 모독이다.

 

 

P. 223~225
결혼 생활을 시작하면 부부는 서로 융합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일상에서 마찰이 생기고 의견 다툼이 일어난다. 서로 사랑하지만 각자 자기중심적 의식의 작용에서는 서로를 매우 까다로운 존재로 인식한다. 그리고 서서히 맞춰가며 상대의 장단점을 인정하게 된다. 여기에서 결혼 생활의 안정이 찾아온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반드시 자신에게 충실해야 한다. 상대의 요구를 지나치게 만족시키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상대방에게 자신이 좋은 사람인지 입증받으려 하지 말자. 온전히 좋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이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때 상대는 그 모습을 사랑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불러온 사랑이 스트레스에서 해방시켜준다.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본성 자체가 답이고, 삶 자체에 답이 있다.

 

 

P. 227~228
사소한 잘못에 사랑의 가치를 논하지 말자. 사랑하는 사이에는 모든 일이 사랑의 위대함이나 아름다움과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자신에게 종속시키려는 주도권 다툼이다. 더 깊은 논리는 내 생각을 따라줘야 내가 옳다는 것이 증명되고, 내 생각에 반응하지 않으면 내가 틀렸다는 결론에 이르는 심리적 강박이다. 그로 인해 '내가 옳다'는 변호를 위해 자신의 의지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한다.

 

 

P. 233~234
옳고 그름을 가리는 사람들의 가장 큰 착각은 '내가 옳으니 모두 내 통제하에 있어야 한다'는 믿음이다. 이는 사랑하는 서로를 피폐하게 만드는 일이다. 옳고 그름만 따질 것이 아니라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때로는 내가 나를 이해하지 못할 때나 상대방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있을 때가 있었다. 평소에, 왜 나에게 이런 행동이 나오는지, 상대가 그런 행동을 하는지, 단지 이상하다고만 생각하고 넘어갔던 일들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사실은 심리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그것도 생각해보지 못한 점이었다는데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무언가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도 들었다. 그것이 내면의 나약함에서 비롯됐든, 외로움이 가져다 준 폐쇄된 마음에서 시작됐든 그것들로 인해 스스로에게 가하는 두려움이 폭력으로 표출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아무리 힘들어도 바깥세상으로 나와야 한다는 작가의 말이 한층 더 이해가 되었다. 

 

 

※ 이 포스팅은 리드리드출판사, 그래플 서평단에 선정되어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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