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문학반

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나에대한열정 2020. 10. 15.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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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애정하는 시집 중에 한 권.

좋은 시가 너무나 많이 실려 있지만, 그 중에 몇 편만...




     한계선



옳은 일을 하다가 한계에 부딪혀

더는 나아갈 수 없다 돌아서고 싶을 때

고개 들어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라


여기서 돌아서면

앞으로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너는 도망치게 되리라


여기까지가 내 한계라고

스스로 그어버린 그 한계선이

평생 너의 한계가 되고 말리라


옳은 일을 하다가 한계에 부딪혀

그만 금을 긋고 돌아서고 싶을 때

묵묵히 황무지를 갈아가는 일소처럼


꾸역꾸역 너의 지경을 넓혀가라.


스스로 설정해 놓은 무언가에 갇힐 때가 있었다. 하물며 왜 답답한지도 모르고 있었던 그런 때.


그때 만났던 글귀가 바로 이 <한계선>이라는 시였다. 그제서야 내가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었는지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남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던 내가, 그보다 더 강한 말뚝들로 내 주위를 박아 놓고 있었다. 여기까지야. 


원인을 찾으니 해결도 쉬웠다. 내가 만들어 놓았던 것들을 하나씩 뽑아버리면 됐으니까.



     긴 호흡



직선으로 달려가지 말아라

극단으로 달려가지 말아라

사람의 길은 좌우로 굽이치며 흘러간다


지금 흐름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꾼 때

머지 않아 맞은편으로 흐름이 바뀌리라

너무 불안하지도 말고 강팍하지도 마라


오른쪽이건 왼쪽이건 방향을 바꿀 때

그 포용의 각도가 넓어야 하리니

힘찬 강물이 굽이쳐 방향을 바꿀 때는

강폭도 모래사장도 넓은 품이 되느니


시대 흐름이 격변할 때

그대 마음의 완장을 차지 마라

더 유장하고 깊어진 품으로

새 흐름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라


삶도 역사도 긴 호흡이다





     부모로서 해줄 단 세 가지



무기 감옥에서 살아나올 때

이번 생에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혁명가로서 철저하고 강해서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허약하고 결함이 많아서이다


하지만 기나긴 감옥 독방에서

나는 너무 아이를 갖고 싶어서

수많은 상상과 계획을 세우곤 했다


나는 내 아이에게 일체의 요구와

그 어떤 교육도 하지 않기로 했다

미래에서 온 내 아이 안에는 이미

그 모든 씨앗들이 심겨져 있을 것이기에


내가 부모로서 해줄 것은 단 세 가지였다


첫째는 내 아이가 자연의 대지를 딛고

동무들과 마음껏 뛰놀고 맘껏 잠자고 맘껏 해보며

그 속에서 고유한 자기 개성을 찾아갈 수 있도록

자유로운 공기 속에 놓아두는 일이다


둘째는 '안 되는 건 안 된다'를 새겨주는 일이다

살생을 해서는 안 되고

약자를 괴롭혀서는 안 되고

물자를 낭비해서는 안 되고

거짓에 침묵동조해서는 안 된다

안 되는 건 안 된다!는 것을 

뼛속 깊이 새겨주는 일이다


셋째는 평생 가는 좋은 습관을 물려주는 일이다

자기 앞가림은 자기 스스로 해나가는 습관과

채식 위주로 뭐든 잘 먹고 많이 걷는 몸생활과

늘 정돈된 몸가짐으로 예의를 지키는 습관과

아름다움을 가려보고 감동할 줄 아는 능력과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홀로 고요히 머무는 습관과

우애와 환대로 많이 웃는 습관을 물려주는 일이다


그러니 내 아이를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유일한 것은

내가 먼저 잘 사는 것, 내 삶을 똑바로 사는 것이었다

유일한 자신의 삶조차 자기답게 살아가지 못한 자가

미래에서 온 아이의 삶을 함부로 손대려 하는 건

결코 해서는 안 될 월권행위이기에


나는 아이에게 좋은 부모가 되고자 안달하기보다

먼저 한 사람의 좋은 벗이 되고

닮고 싶은 인생의 선배가 되고

행여 내가 후진 존재가 되지 않도록

아이에게 끊임없이 배워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저 내 아이를

'믿음의 침묵'으로 지켜보면서

이 지구별 위를 잠시 동행하는 것이었다


한동안 다이어리를 새로 바꾸게 되면 꼭 써 놨던 시이다. 부모의 입장이라는 것이 되고 나서 보니,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자리였다. 난 막연하게, 내 아이들을 나처럼 자라게 하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그 아이들은 내가 아니였고, 나 또한 내 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얼마나 우매한 생각이었는지. 그리고 길을 잃었다. 


이 시는 그런 내게 불빛 같은 존재였다. 희망이 보였다.




     두 가지만 주소서



나에게 오직 두 가지만 주소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인내를

바꿀 수 없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나에게 오직 두 가지만 주소서

나보다 약한 자 앞에서는 겸손할 수 있는 여유를

나보다 강한 자 앞에서는 당당할 수 있는 깊이를


나에게 오직 두 가지만 주소서

가난하고 작아질수록 나눌 수 있는 능력을

성취하고 커 나갈수록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관계를


나에게 오직 한 가지만 주소서

좋을 때나 힘들 때나 삶에 뿌리 박은

깨끗한 이 마음 하나만을


나에게 이 글들은 시가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었고, 격려였다. 

이런 마음으로 살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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