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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숙 <이별의 능력> 2007
김행숙 <이별의 능력> 2007
김행숙 시인(1970년생)은 1999년, 「현대문학」에 <뿔> 외 4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고려대학교 국문과,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는 강남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시집으로는 <사춘기>, <이별의 능력>, <에코의 초상>, <무슨 심부름을 가는 길이니>, <1914> 등이 있으며, 그 외 문학 에세이 <에로스와 아우라>, 평론집 <천사의 멜랑콜리> 등 다수의 책이 있다.
p. 12~13
이별의 능력
나는 기체의 형상을 하는 것들.
나는 2분간 담배연기, 3분간 수증기, 당신의 폐로 흘러가는 산소.
기쁜 마음으로 당신을 태울 거야.
당신 머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알고 있었니?
당신이 혐오하는 비계가 부드럽게 타고 있는데
내장이 연통이 되는데
피가 끓고
세상의 모든 새들이 모든 안개를 거느리고 이민을 떠나는데
나는 2시간 이상의 노래를 부르고
3시간 이상의 빨래를 하고
2시간 이상의 낮잠을 자고
3시간 이상씩 명상을 하고, 헛것들을 보지. 매우 아름다워.
2시간 이상씩 당신을 사랑해.
당신 머리에서 폭발한 것들을 사랑해.
새들이 큰 소리로 우는 아이들을 물고 갔어. 하염없이 빨래를 하다가 알게 돼.
내 외투가 기체가 되었어.
호주머니에서 내가 꺼낸 건 구름. 당신의 지팡이.
그렇구. 하염없이 노래를 부르다가
하염없이 낮잠을 자다가
눈을 뜰 때가 있었어.
눈과 귀가 깨끗해지는데
이별의 능력이 최대치에 이르는데
털이 빠지는데. 나는 2분간 담배연기. 3분간 수증기. 2분간 냄새가 사라지는데
나는 옷을 벗지. 저 멀리 흩어지는 옷에 대해
이웃들에 대해
손을 흔들지.
p. 49
다정함의 세계
이곳에서 발이 녹는다
무릎이 없어지고,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
괜찮아요. 작은 목소리를 더 작은 목소리가 되어
우리는 함께 희미해진다
고마워요, 그 둥근 입술과 함께
작별인사를 위해 무늬를 만들었던 몇 가지의 손짓과
안녕, 하고 말하는 순간부터 투명해지는 한쪽 귀와
수평선처럼 누워 있는 세계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오를 때
무릎이 반짝일 때
우리를 양팔을 벌리고 한없이 다가간다
p. 82~83
당신의 표정
거울 같은 표정으로 맞이해야지.
열매가 너무 많이 달린 무거운 나무처럼
나는 풍요롭고
떨어뜨려야 할 것들이 많다.
재미있을수록 나는 잔인해진다.
감정을 똑같이 나누기 위해
나는 거울 같은 표정으로.
닿을 듯이 다가오면 우리들의 입김처럼 모호하게 흐려져야지.
여기엔 당신뿐이야.
당신이 한 발 한 발 뒷걸음질치면 나는 계단처럼
동그랗게 작아져야지.
점점 작아지는 동그라미 속으로 굴러 떨어진 사람들 중에는
더 멀리 굴러간 사람과
영영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재미있을수록 나는 순수해진다.
죽음을 똑같이 나누는 두 개의 접시처럼.
다시 한번 더! 나는 미세한 소리와 동시에 작동해.
깨진 거울 같은 표정으로
당신이 먼 곳에서 움직였다.
p. 86~87
옆모습
옆모습은 너의 절반일까
똑같은 눈
똑같은 코
냉장고와 프라이팬에 나뉜 고깃덩어리처럼
꽁꽁 어는 것
불 위에서 녹고 타는 것
옆모습은 어디서부터 어디로
어디까지 확장될까
상상은 잘 펼쳐지지 않는다
똑같은 모양으로 구부러진 팔을 상상하는 순간
무서워!
태어나지 않은 동생들처럼
팔은 꿈속에서도 먼지 속에서도 자란다
선반은 언제나 너무 높고
네가 발꿈치를 들 때
손이 손을 떠나 네가 문득 비었을 때
똑같은 손이란 무엇일까
상상할 수 없는 일이란 무엇일까
네가 네게 칼자국을 몇 개 긋고
싱싱한 화초처럼 불꽃을 심을 때
오그라드는 살과
명확해지는 뼈
나는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을 향하여
천천히 회전한다
네게 박수를 보낼 수가 없어!
오른손이 왼손을 모르고
오른손이 오른손도 모르고
너는 자꾸 벗어난다
p. 96~97
비에 대한 감정
그날 비는 감정적으로 내렸다
젊은 코끼리가 온 힘을 모아 코를 휘두르듯이
초목이 출렁이듯이
마침내 낙타가 해진 무릎을 꺾고 아무것도 담지 않은 눈빛을 던지듯이
낙타의 등에서 기절초풍할 비단이 펼쳐지듯이
중국 도자기가 굴러 떨어지듯이
그날 자동차들은 비단에 휘감겨서 아름다웠다
커브 길에서
상욕이 튀어나왔다
그날 나는 감정적으로 비와 대립했다
함께 하늘을 올려다본 사람들이 저마다 가슴을 쳤다
아, 입을 벌렸다
코끼리의 위대한 코에 감겨 공중 부양된 저 아이들이 까르르 까르르 웃고
마침내 앙, 울음을 터뜨리듯이
그날 비는 감정적으로 내렸다
마지막까지 내렸다
p. 98~99
소란과 고요
백 년 동안 바람이 불었고, 그리고, 바람이 아주 심한 날에 날아가지 않는 것들은 많지 않았다. 바람이 아주 심한 날에 날아온 것들이 다시 바람이 아주 심한 날에 날아가곤 했다.
마을의 돼지 때가 날아가버린 대낮에 나는 돼지보다 무겁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요한 밤이 연기처럼 찾아왔을 때 나는 슬프다는 것을 알았다. 돼지야, 돼지야. 이제 나는 뭘 믿고 사니? 나는 뭘 먹고 사니?
나는 백 년 만에 빗자루를 잡았다. 죽을 때가 되면 안 하던 짓을 한대지. 좋은 일이야. 깨끗이 마당을 쓸고, 그리고, 오랫동안 늙은 망령이 빗자루를 잡고 서 있었다. 또 벌써 지저분해졌잖아. 나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분개해서 빗자루를 뺏었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나는 빗자루를 잡고 서 있었다. 나는 비바람처럼 비질을 하면서 너무나 감미롭게 싸악, 이라고 발음을 했다. 벼이삭이 쓰러지고, 사과나무에서 떨어진 사과가, 배나무에서 떨어진 배가 향기를 피워올리며 썩기 전에 먼저 데구르르 상처를 내면서 쓸려나갔다. 그리고, 바람이 불지 않아도 날아오는 것들이 많았다. 푸른 먼지 위에 붉은 먼지와.
그리고, 나는 불멸의 이름을 얻었다. 나는 계속해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만 때로 주체할 수 없이 힘이 솟구치는 날이 있었다.
p. 144~145
신비한 일
낮에 자는 사람과
밤에 자는 사람은
언제 만날까
사람들이 만나는 시간은 신비해
낮에도 자고 밤에도 자는 사람에게도 약속은 생기지
12시
13시
내 그림자도 시간에 대해 말하지
나는 지금 길어지고 있어
어디까지? 나는 지금 걸어가고 있어
낮에 자는 사람과
밤에 자는 사람이
만나는 시간 가까이
더 가깝게
사람들이 앞만 보고 걸어다녀
뒤통수는 까맣고 까매
누구일까
p. 146
모르는 사람
강변에 서 있었네
얼굴이 바뀐 사람처럼 서 있었네
우리는 점점 모르는 사람이 되고
친절해지네
손님처럼
여행자처럼
강변에 서 있었네
강물이 흐르고
피부가 약간 얼얼했을 뿐
숫자로 헤아려지지 않는 표정들이 부드럽게 찢어지고 빠르게 흩어질 때마다
모르는 얼굴들이 태어났네
물결처럼, 아는 이름을 부를 수 없네
피부가 펄럭거리고
빗방울을 삼키는 얼굴들
강변에 서 있었네
아무도 같은 얼굴로 오래 서 있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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