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케로의 표현처럼 인생이 갑자기 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랜시간에 걸쳐 소멸되어간다 할지라도, 병으로 인해 알 수 없는 순간에 죽음에 다가가고 있다면 그 느낌은 '갑자기'에 더 가깝지 않을까. 읽는 내내 무거운 마음과 더불어 참 괜찮은 존재, 참 행복한 존재의 사그러짐을 끌어안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슬프지만 따듯했다.
p. 25
나는 이 잘 웃는 여자를 떠날 수 있을까.
p. 44
뜻없는 것들에게도 소리가 있고, 그 소리는 마음을 편하게 한다. 바람 부는 소리, 비 내리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사람의 마음도 본래 아무뜻없이 제 갈곳으로 흐르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그 마음안에 그토록 많은 뜻과 의미를 품고 담아 사람도 세상도 그토록 시끄러운 걸까.
p. 51
흐른다는 건 덧없이 사라진다는 것, 그러나 흐르는 것만이 살아있다. 흘러가는 '동안'의 시간들. 그것이 생의 총량이다. 그 흐름에 따라서 마음놓고 떠내려 가는 일-그것이 그토록 찾아헤매었던 자유였던가.
p. 97
아침산책, 또 꽃들을 들여다본다. 꽃들이 시들 때를 근심한다면 이토록 철없이 만개할 수 있을까.
p. 103
지금 살아있다는 것 - 그걸 자주 잊어버린다.
p. 147
나처럼 많은 사랑을 받아 온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받기만하고 나는 그 사랑들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인색한 부자의 곳간처럼 내 안에서 쌓여서 갇혀있는 사랑들. 이 곳간의 자물쇠를 깨고 여는 일-거기에서 내 사랑은 시작된다.
p. 187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건 나의 죽음이 누군가를 죽게 하고, 누군가의 죽음이 나를 죽게 만든다는 것이다.
때때로 등장하는 '아침산책'이라는 단어때문인지, 죽음에 앞서 있는 글이라서 그랬는지.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이 떠올랐다. 루소도 이 작품을 집필하다가 세상을 뜨게 되는데, 참 느낌이 달랐다는. 물론 글쓰기 시작한 이유도 완전 다르지만. 이왕 생각난 김에 다시 루소의 책도 같이 펼쳤다.
루소는 <에밀>을 발표하고나서, 그 책에서 언급되는 이신론적(성서를 비판적으로 연구하고, 계시를 부정하거나 그 역할을 축소시켜버리는) 주장과 그 자녀들 다섯명을 모두 고아원에 보낸 행동으로 인해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스스로 고립의 길로 들어선다. 그 이후 한참의 시간 뒤에 자신에 대한 생각에 몰두하게 되고, 삶의 회한들을 접어가며 본인을 찾아가는 과정에 들어선다. 책의 맨처음에는 너무 짙게 내려앉은 원망과 변명의 글이 있어 <고백록>과의 차이를 그닥 느끼지 못했으나, 몇페이지도 지나지 않아 역시 대단하기는 대단한 인물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루소가 좋다. (신이 있다면)신이 다 주지 않은 그의 인간적인 영역은 그의 몫이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사회계약론>,<에밀>의 글을 통한 루소는 근사하다. 그러나 글과 상반되는 행위들에, 그 글로 공격받은 이들의 합세는 무지막지하다. 수도회, 의사회 그리고 그의 글솜씨를 질투하는 사상가와 문인가들...
폴 존슨은 <지식인의 두 얼굴>에서 열명이 넘는 위인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중 첫번째가 "장 자크 루소, 위대한 정신병자" 이다. 세계사에 영향을 미친 사상가로 보면 위대하지만, 인간적인 모습의 루소는 정신병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행위들을 변명하는...그리고 개인적인, 인간적인 루소를 보여주는 <고백록>, <대화:루소 장자크를 심판하다>,<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본다면 조금은 이해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전부는 아니다.아이들을 고아원에 전부 보내버린 것, 자신의 도둑질을 다른이에게 뒤집어 씌운것, 바바리맨 같은 행동을 한 것 세가지는 빼고 말이다. 그래도 정신병자는 좀...
인생의 끝자락에서 가질 수 있는 정신적인 여유로움은 삶의 여정중에 곳간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잘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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