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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2019
이영주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2019
이영주 시인은 1974년, 서울 출생.
2000년 문학동네로 등단했다. 시집 <108번째 사내>, <언니에게>, <차가운 사탕들>이 있다.
p. 16~17
기념일
사라진 나를 찾고 있던 시간, 물줄기처럼 기후가 흘러간다. 아무도 머물지 않고, 나도 있지 않다. 만질 수 있고 만져지지 않는 물질, 따듯한 그릇 안의 곰팡이, 투명한 구름에서 떨어지는 입자를 잡는 긴 판 같은 것. 기후는 틈으로 움직인다. 어디에도 없는 나는 길어지는 팔, 나를 안고 나를 밀어내느라 팔은 점점 더 가늘어진다. 한겨울 폴란드에 있다. 폴란드 그릇 안에서 번식하고 있다. 불행하게 죽은 영혼은 모든 기억을 씻어버리는 물을 마시고 깨끗해진다는데, 나는 그릇을 엎질렀어! 시큼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진다. 벽 틈에서 벌레들이 기어 나오고 있다. 우리의 표현은 어떻게 만나서 서로를 기억할 수 있을까. 나는 모두가 잠든 폴란드 벽에 묻혀 있다. 내가 벽 사이로 흘러나와 다정하게 다가가면 어두운 영혼은 어색하게 돌아선다. 슬픔을 숨기려고 검어지는 중이었다. 높은 고원에 지어진 벽돌집으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나무 테라스에 앉은 따뜻한 시간이 있다. 미끄러져버린 울음을 찾는 나는 어디에 있을까. 기억은 삶의 것이 아니래. 기후는 슬픔의 풍습으로 움직인다. 술병이 굴러다니고 있다. 아름답고 쓸쓸한 나라 깨진 그릇처럼 나는 폴란드 상점에 있다. 어디에도 없는 나는 지렁이처럼 팔만 꿈틀거리고 있다. 저 영혼에게 기어서 다가가고 있다. 물을 마시고 깨끗해지려는 영혼이 나를 보고 더욱 시커멓게 짖고 있다. 오로지 한 가지 기후만 움직이고 있다. 나는 폴란드 숲 거대한 돌 위에 있다. 흰 쥐, 흰 토끼, 흰 개······
p. 28~29
소년의 기후
침묵이 자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일은 여기가 폐허이기 때문인지도 몰라. 모두가 둥둥 떠다니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라. 가만히 서로를 들여다보면 모든 구름에 물결처럼 흘러가서 차가워지는 기후가 전부라는 것. 체육복을 벗고 물이 뚝뚝 떨어질 때마다 소년은 팔을 비틀어본다. 물에서 물로 떨어지는 일상은 정말 축축하구나. 소년은 구름처럼 머리가 부푸는 현장이다. 말없이 언젠가 터질지 모르지만 소년은 밤마다 언덕에 올라가 하늘에 가까워지는 법을 생각한다. 잠시 머리를 들고 공중을 만져보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슬퍼지는 일들밖에 떠오르질 않네. 소년은 이 폐허에서, 라고 쓴 일기의 첫 구절을 버리지 못한다. 일지장을 손에 꽉 쥐고 있다. 곤죽이 되어 빠져나가는 종이들. 아무리 꽉 쥐어도 무늬만 남겨진다. 그 이후 소년은 말을 잃었다. 뇌에 물이 차서 그런가. 너무나 많은 이름이 서로를 부르고 있다. 받아 적을 때마다 물에 흐려지니 이제는 무늬조차 남지 않는군가. 소년의 잉크는 투명하게 흘러간다. 쓸 수가 없어, 자꾸만 무엇인가가 빠져나가네. 침묵 속에서는 흐르는 소리만 들린다. 뼈가 비친다. 이것도 젖어 있어, 소년은 뼈를 벗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언덕 아래를 내려다본다. 비 오기 직전, 매번 구름이 드리워진 불완전한 폐허는 이렇게나 당연하구나. 소년은 한 번도 햇빛 아래 몸을 말린 적이 없다. 천천히 뼈가 흐트러졌지. 이렇게 물속에 있다가는 뼈 전체가 부서지고 말 겁니다. 의사는 폐허의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길 권유한다. 어떤 끔찍한 일이 닥쳐도 뼈는 보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햇빛 속에서 자라야 한다는데, 소년은 말이 없다. 자라다 만 자신을 벗는다. 구름이 가득한 공중을 벗는다. 죽기 전에는 영혼에 대해 느낀 적이 없었는데, 소년이 탄 배는 영원히 폐허를 헤치고 나아가지. 뼈를 잃고 소년은 구름처럼 부풀어 일기를 쓴다. 완성할 수 있을까? 자신에 대해 쓰는 것은 정말 비참하구나. 이 폐허는 물로 가득 차 있으니, 물속을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없다. 그게 영혼일까. 소년은 이제애 영혼을 벗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다. 그곳에는 다음 폐허로 흘러갈 구름들이 모여 있다.
p. 44~45
영혼이 있다면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눈과 얼음뿐. 아무것도 없는 곳에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얼음 밑을 들여다봐도 얼음조차 없다. 아무것도 없는데 자꾸 무엇인가를 정리하고 싶다. 없는 것을 정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길을 아는 친구들은 모두 떠나갔다. 이곳에 공중이 없다는 것을 내게 속삭이듯 말하고 걸어갔다. 공중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다시 말해주면서. 때로 감각이 좋은 과학자들이 이곳으로 온다. 그럴 때 나는 얼음인 듯 결정체로 남아 있다. 이상하지, 이곳에는 눈과 얼음뿐인데, 이 선연한 피는 어디에서 흐르는가. 과학자들은 서로에게 속삭이며 걸어간다. 그들의 공포가 빛나려면 더욱 많은 얼음이 필요하다. 무언가가 자꾸 다시 태어나려고 해. 나는 혼자 속삭여본다. 감각이 좋은 과학자들은 이곳으로 와서 눈 위를 걸어 얼음이 아닌 것들을 찾아간다. 얼음이 없다는 것을 기록해야 한다. 똘똘한 친구들은 투명하니까 사라졌고······바보 같은 것은 나 하나로도 꽉 차니까······ 얼음은 어디로 갔는가. 과학자들의 이가 길어지고 가슴에 털이 솟아난다. 이 선연하고 뜨거운 감각은 무엇이지. 과학자들이 서로의 목덜미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으르렁대고 있다. 이 참을 수 없는 눈물은, 내장이 차가워지는 얼음 같은 울음은 무엇이지, 공포와 부정은 기록으로만 남기기로 했는데, 이곳에는 눈과 얼음뿐. 과학자들이 튼튼해진 발톱으로 들고 온 노트를 찢는다. 나는 얼음인 듯 피를 흘린다.
p. 70~71
슬픔을 시작할 수가 없다
슬픔을 시작할 수가 없다
너의 몸을 안지 않고서는
차갑고 투명한 살을
천천히, 그리고 오랫동안
쓸어보지 않고서는
1년 동안
너는 바닷속에서 물처럼 흘러가고 있다
너는 심연 속에서 살처럼 흩어지고 있다
발이 없어서 우는 사람
오래전부터 바다는 잠을 자고 있어서
죽음을 깨우지 못한대
너는 묘지도 없이 잠 속에서 이를 갈며 떨고 있다
너는 죽음을 시작할 수가 없다
산 자들은 항상 죽은 자 주위로 모여든다고 하는데
우리는 슬픔도 없이 모여 있다
진정한 애도는 몸이 없이 시작되지 않는다
모든 비밀은 바닷속에 잠겨 있다
바다에서 죽지 않는 손이 올라온다
그 손을 잡아끌어 올려야 한다
p. 92~93
녹은 이후
눈사람이 녹고 있다
눈사람은 내색하지 않는다
죽어가는 부분은
에스키모인들은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막대기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선다고 한다
마음이 녹아 없어질 때까지
걷는다고 한다
마지막 부분이 사라질 때까지
그들은 막대기를 꽂고 돌아온다고 하는데
그렇게 알 수 없는 곳에 도달해서
투명하게 되어 돌아온다고 하는데
나는 어디로 간 것입니까
왜 돌아오질 않죠
불 꺼진 방 안에서 바닥에 이마를 대고
얼음처럼 기다렸는데
누군가가 돌아올까 봐
창문을 열어두고 갔는데
햇빛 아래
죽어가는 부분이 남아서
흘러가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발밑으로
엉망인 바닥으로
형태가 무너지는 눈사람
이렇게 귀향이 어려울 줄은 몰랐는데
흰 눈으로 사람을 만들고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이런 걸 봄이라고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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