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문학반

황동규 [사는 기쁨]

나에대한열정 2022. 1. 12.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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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사는 기쁨> 2013

 

황동규 시인의 <사는 기쁨> 시집

 

황동규 <사는 기쁨> 2013

 

 

 

p. 9
이별 없는 시대

늙마에 미국 가는 친구
이메일과 전화에 매달려 서울서처럼 살다가
자식 곁에서 죽겠다고 하지만
늦가을 비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 인사동에서 만나
따끈한 오뎅 안주로
천천히 한잔할 도리는 없겠구나

허나 같이 살다 누가 먼저 세상 뜨는 것보다
서로의 추억이 반짝일 때 헤어지는 맛도 있겠다
잘 가거라.
박테리아들도 둘로 갈라질 때 쾌락이 없다면
왜 힘들어 갈라지겠는가?
허허.

 

 

p. 30~33
영원은 어디?

때아닌 추위 강습.
오리털 점퍼 끄집어내 덧입고 나선 산책길
길섶 누른 풀은 눈 맞고 얼어 풀떡 범벅되었고
아직 땅에 내려오지 못한 졸참나무 잎새들이
머리 위에서 쓰렁쓰렁 귀 시린 발성을 한다.
너는 지금 네 추위 속을 걷고 있어.

언덕을 넘자 서리 허옇게 깔린 길 가장자리
엄청 큰 귀룽나무 잔가지들이 얽어 만든 그림자 빛속에
참새보다 쬐금 더 큰, 참새보다 등 검은 새 하나
옆으로 누워 있다.
박새인가?
걸음 멈추고 살펴보니 가벼운 스웨터 바람으로
무리하게 미래 여행 떠난 몸,
입 다문 얼굴
잔바람이 가슴께 털을 부풀려보고 있다.

그가 간 곳은 더 춥지 않을까, 신발마저 없으니
발갛게 언 발 꺾어 달고 떨며 날고 있을까.
아니면 거기는 이미 미래의 땅, 여기서는 뵈지 않는
유채꽃 노랗게 머리 흔드는 봄
꽃 사이를 고개 까딱까딱 걷고 있을까?

가만, 새 쪽에서 보면 지금 여기는 그의 마지막 과거
한 번 떠나면 다시는 얼씬할 수 없는 이곳이
그의 망막에 영원히 인화돼 있지는 않을까?

장갑을 벗고 새의 맥을 짚어본다.
손등에 얹히는 나뭇가지 그림자 아래 굳은 몸
과거 쪽에서도 미래 쪽에서도 기척이 없다.
영원이란, 무한으로 달려가던 삶의 관성이 죽음과 충돌,
과거와 미래가 벗겨지는 상태가 아닐까?
앞날의 아픔이 지난날 기쁨에 미리 들키고
지난날 물결치던 고통이 앞날의 잔잔함을 거부하기도 하는,
지난날의 내가 앞날의 나에게 손을 내밀 때,
손끝과 손끝이 닿으려는 찰나
둘의 위치가 확 바뀌기도 하는.

나도 모르게 시린 발을 한 번 구른다.
영원이 있다면
그 영원 쪽에서 보는 지금 여기도 영원.
함께 얼굴 찌푸리고 함께 웃다 하나씩 가버린 입과 귀들
너무 멀어 수신하기는 힘들어도
영원 한편에서 간절히 생각의 키를 누르면
상대편 휴대폰 차임이 가느다랗게 울리지 않을까.
잔가지 그림자를 눈에 띄지 않게 옮겨놓는
귀릉나무 뒤 겨울 해의 움직임만큼으로라도.
영원이란 가까이 두고 아껴온 것을
생각이 가닿는 곳보다 더 멀리 보내는 일인가?

옆 덤불 속 보이지 않는 새들이
뭔 별일이냐는 듯 몇 번 비빅댄다.
별일이라니? 순간적으로
누운 새가 입을 열었다는 착각에 빠졌다가
다시 보니 그대로다.
고개를 들어보니 햇빛을 받아
덤불이 무대처럼 환하다.
어디 도중에 우스워죽겠는 연극의 속편 같은 영원은 없을까?

 

 

p. 56~57
북한강가에서

북한강 물굽이 조그만 슬래브 집
장난스레 키 낮춘 검푸른 탱자 울타리 안에
노란 감국 몇 송이 피어 있고
마당 한편엔 적갈색으로 곱게 녹스는 펌프
그 옆에 붉은 호박색 손수레 하나 누워 있네.
어디선가 털 고운 흑갈색 점박이 개가 나타나 꼬리를 흔들자
현관문이 열리고
눈매 잔잔한 그가 모이 주머니 들고 나오네.
부르지도 않았는데 곤줄박인가 검은 머리 새들
여남은 마리 날아들어 재게 걸으며 끝이 흰 뾰족한 부리로
연신 모이 쪼기 바쁘고
한 마리는 모이 든 손에 날아와 앉아
밤빛 배 슬쩍슬쩍 보라는 듯 회청색 날개 퍼덕이네.
손에 오른 새 앞에 두고 다른 팔은 벌리고
발걸음 길게 짧게 길게
그가 원을 그리며 신명나게 몇 바퀴 돌았네.
삶이 뭐 별거냐?
몸 헐거워져 흥이 죄 빠져나가기 전
사방에 색채들 제 때깔로 타고 있을 때
한 팔 들고 한 팔은 벌리고 근육에 리듬을 주어
춤을 일궈낼 수 있다면!

 

 

p. 60~61
겨울을 향하여

저 능선 너머까지 겨울이 왔다고
주모가 안주 뒤집던 쇠젓가락을 들어 가리켰다.
폭설이 허리까지 내리고
먹을 것 없는 멧새들 노루들이
골짜기에서 마을 어귀로 내려왔다고,
이곳에도 아침이면 아기 핏줄처럼 흐르는 개울에
얼음이 서걱대기 시작했다고.

알 든 양미리구이 안주로
조껍데기술을 마시며 생각한다.
내 핏줄에도 얼음이 서걱대지는 않나?
텔레비전 켜논 채 깜빡깜빡 조는 초저녁에
잠 깨어 손가락 관절 하나 꼼짝하기 싫은 새벽에
그리고 이 술병, 마저 비울까 말까 저울질하는 바로 지금!
생각을 조금 흔든다.
그래, 뾰족한 얼음 조각들이 낡은 혈관 녹 긁으며 흐르면
시원치 않겠나?
골짜기 가득 눈꽃이 이 세상 것 같지 않게 피어
보여줄 게 있다고 아슴아슴 눈짓하고 있는 설경 속으로
몸 여기저기서 수정구슬 쟁그랑쟁그랑 소리 나는
반투명 음악이 되어 들어가보자.

 

 

p. 72~73
이 저녁에

마을버스에 실려 돌아왔다. 저녁.
아파트 동 입구에서 영산홍이 실없이 웃고 있다.
까닭 없는 웃음도 괜찮아, 괜찮고말고.
한창 때 좀 넘겼으면 어때?

우편함에 손을 넣어 내용물을 더듬고 엘리베이터에 갇혔다 풀려나
자물쇠에 내장된 번호들을 누르고
집에 들어왔어.
식구 아무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
웃옷 벗어 걸고 들고 올라온 편지를 뜯었어.
불을 켰는데도 어두워 손등으로 눈을 문지르면
형광등 자리에 형광등 켜 있고 달력과 그림들 제자리에 걸려 있는
그저 그런 저녁
형광등 수명이라 다 돼 그런가, 새것으로 갈아야?
의자를 옮기려다 생각한다.
혹시 시력 낮춘 건
졸아드는 에너지 아껴 쓰려는 몸의 지혜가 아닐까?

몸이여, 그대 처분에 나를 맡겨야 하지 않겠나.
주어진 시력 계속 쓰다가 어느 순간
눈 없어 더 환하다는 세상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잘 안 보이면 안 보이는 만큼
보는 맛 조금씩 더 돋구며 살다
소리의 근원에서 멀어지는 귀,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이 가
음(音)의 옷깃을 잡아채려다 놓치기도 하는
상처 입은 뇌물 가지고 가련다.
흠집 없이 곱게 간수한
그런 명품 혼을 모시고 산 적 없으니.

 

 

p. 74~75
어둡고 더 어두운

흔히 그렇지만 머리 아플 때 진통제를 삼키면
잠시 후 신경에 얇은 막이 덮이고
통증이 무뎌지고
마음의 자전이 늦어진다.
모차르트는 그저 모차르트
만나는 사람은 그저 만나는 사람
긴한 감각들이 전정(剪定)당한다.
어쩌지, 산책길에 달려드는 별들이
공손해진다.

뇌를 쿡쿡 찌르는 머리 그대로 쳐들고
바다에 지는 해를 바라보며 친구와 술잔을 나눈다.
우리 대화 저 앞에 해, 환한 구리거울 같다.
드디어 거울이 끓고 바다가 끓고
통증이 끓으며 잦아든다.
거울이 한 번 더 끓으며 바다를 물들이고 사라진다.

술 한 번 마실 때마다
뇌세포가 몇 마지기씩 죽는다고 하지만
뇌세포 다 살려갖고 죽어야 맛인가! 세포들아,
터진 솔기와 실밥을 감추지 못하는 뇌세포들아,
세포 수 가난한 나를 용서 말아라.
용서받는 것은 어둡고, 안 받는 것은 더 어둡다.
술상 옆, 개울에도 못 끼는 실 도랑물
어둠 속에 바다를 열고 들어간다.

 

전정(剪定): 자를 '전', 정할 '정' - 식물의 겉모양을 고르게 하고 웃자람을 막으며, 과실나무 따위의 생산을 늘리기 위하여 곁가지 따위를 자르고 다듬는 일

 

 

p. 82~83
네가 없는 삶

아픔이 없는 삶은 빈 그릇이다
라고 네가 말했을 때
우리는 천천히 저수지를 돌고 있었다.
앞 벼랑 끝에 V자형 진달래꽃 뭉치
뛰어내릴까 말까 아슬아슬 걸려 있고
저수지 수면은 온통 새파란 물비늘,
아주 정교히 빚은 그릇일 수도 있겠군, 나는 생각했다.

네가 없는 삶은 빈 그릇이다
라고 말하려다 화들짝 놀란다.
수위 낮아진 저수지에 어느샌가 가을이 깊어
색채들이 모두 나무에서 뛰어내려
물가까지 내려와 누워 있고
아예 물속에 든 놈도 있었다.
마지막 순간 마음 돌려
물가에 서 있는 술병도 있었다,

물새 한 마리 쓸쓸히 자맥질하고 있는 물에는
물속 땅에 박힌 건지 물 위에 뜬 건지
조그만 배 하나 멎어 있고
하늘이 통째 빠져 있는 수면엔
밝은 조개구름 한 떼가 지나가고 있었다.
문득 가까이 사람 소리
아끼듯 조용히 나누는 말소리, 한참 잠잠하다
이윽고 차 떠나는 소리.
물새 어디 갔나, 자취 없고
조개구름 흘러가버리고
무덤덤히 배가 혼자 떠 있다.

 

 

p. 112~113
봄비에

산책 도중 봄비에 갇혔다.
비 내린다는 날씨 예보 깜빡했던가?
내 언제 그런 데 고분고분 귀 기울이며 살았던가?
하늘의 절반 이상을 벚꽃과 나비와 새들로 수놓던
햇볕 슬쩍 퇴장하고
막비 쏟아진다.
난간 없는 마루에 지붕만 얹은 빈 정자에 걸터앉아
꽃잎들 마구 떨어져
아스팔트 위로 씻긴 그림처럼 흘러오는 것을 본다.
한때 빗줄기 속을 내달리며 짐승 소리 내지르게 했던
봄비.
지금도 엇비슷한 얼굴과 목소리로 내린다.
멀거나 보고 있으려니 속이 답답하다.
누군가 빗줄기 속을 내달리며 들어오라 소리 지르면
같이 달리며 소리칠 수 있을까?
무슨 소리?
미래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인간의
내도 좋고 안 내도 그만인 소리?
그 소리도 성대를 울려 내는 소리가 아니겠는가
가만, 비 한쪽이 훤해진다.
가늘어진 비 맞으며 집에 내려가려다
마음 잠시 끄고 좀더 앉아 있기로 한다.
마음의 채 꺼지지 않는 부분은
저 앞에 혼자 치고 있는 번개로 족하다.

 

 

p. 124~125
내비게이터 끈 여행

목적 없이 홀가분도 없이 떠나는 것이
여행 가운데서도 상품(上品)인데
가는 도중 새로 태어난 길 탐나 슬쩍 들었다가
더 새로 태어난 길을 만나
긴요한 일 두고 온 게 불현듯 떠오른 듯
되돌아오면 또 어때?

스테파노의 나폴리 민요가 내비게이터를 꺼버려
대충 방향 잡고 돌아오는 길.
도로가 한갓지다, 나무 솎아낸 말쑥한 숲과
분홍 보라빛 맥문동 한창 핀 옛 동네를 살짝 피했다.
하늘에는 멎은 듯 흐르는 넓은 구름 강물
있다가 없다가 다시 있는 것들의 모습

이왕 길을 벗어난 김에
물새들과 알 듯 모를 듯 같이 걷는 해변, 번지는 황혼,
금빛 우려낸 빛이 사방에 어른댄다.
바다를 향해 내논 테이블에 간단한 안주와 토속주 한잔,
눈앞에 캠프파이어가 불타는 삶이 꼭 있어야 하겠나?
하늘에 희한하게 하얀 반달 하나
찾으면 있고, 않으면 없고.

 

 

p. 130~131
안개의 끝

눈 뜨자 창 둘을 무겁게 메운 안개
대충 옷 걸치고 민박집을 나선다.
세상이 안개 한 덩이,
뵈지 않는 바다의 웅얼거림이
지난밤 가로등에 언뜻 비친 방파제로 길을 내준다.

깊은 안개 속을 걸으면
무언가 앞서 가는 게 없어 좋지.
발 내디딜 때
생각이나 생각의 부스러기 같은 게 밟히지 않는다.
양편에서 숨죽이고 느낌 주고 받는 물소리
방파제를 완만하게 굽혀준다.
안개가 나를 받아들이는군.

잠깐, 소리가 달라져 걸음 멈추자
바로 앞에서 길이 끊기고
콘크리트 내발이들이 허물어지고
바다가 가벼운 신음을 내고 있다.

건너뛸까, 몇 번 눈 귀 대중하다
목소리 바꾼 바다의 마음을 사기로 한다.

돌아오는 길, 하늘이 점차 환해지며
배들의 머리꼭지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배에서 생선 상자 내리는 사람들의 어깨가 보이고
달려가는 흰둥이가 보이고
안개가 너울대고
길바닥이 보인다
안 보이던 바닥이 보이면 다 산 거라고 누가 그랬던가?
높은 생선 짐 지고 요령 있게 굴러가는 자전거서껀
너울너울 춤추다 슬쩍 춤 걷는 안개서껀 사는 거라면
다 산 삶도 잠시 더 걸치고 가보자.

 

 

p. 138~139
아픔의 맛

지난해 늦장마에 쓰러졌다가 일으켜 세워져
죽은 채 가을 겨울 보내고
봄이 오자 몸살처럼 되살아나
허리 언저리로 쉬지 않고 새잎 내보내던 소나무
이번 큰물에 또 쓰러졌다.
잔뿌리 모두 배에 올려놓고 누웠군!
하며 보니 그 나무였다.
이번엔 누가 일으켜 세우려 들지도 않는구나.
엉덩방아 찧으려는 몸짓마저 못 해보고
쿵! 뿌리째 내동댕이쳐졌을 때
봄부터 조심히 새로 엮어오던 삶 일순 공백이 되었을 때
나무의 느낌이 어땠을까?
몰려드는 잠 밀치며 하나하나 새로 연결하던 뿌리의 실핏줄
햇빛 속에 첫 이파리 뾰족히 내밀던 순간의 떨림,
기어오르는 넝쿨 식물들이 새잎 덮어버리거나
위에서 죽은 잎들 쏟아져 내려와 숨통 막히면
다시 조심조심 옆 피부를 찢고 새 이파리 내밀던 마음 조임······

그만 가시라고 실뿌리들이
가볍게 바람에 몸을 흔들었다.

뿌리 뽑혀도 남는 생각이여
나무에게도 추억이 있다고 생각 못 했던 생각이여
나무의 새 삶이 그냥 지워졌다고 생각진 말자.
상처에 생살 돋을 때
상처에 아린 살들 촘촘히 짚어가며 하나씩 꿰매다 확 터지곤 하던
저 아픔의 환한 맛,
이 지구에 생명이, 생명이 묻어 있는 한
지워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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