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문학반

황동규 [꽃의 고요], 황동규 시집

나에대한열정 2022. 1. 15.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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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시집 <꽃의 고요> 2006

 

 

황동규 시집 <꽃의 고요> 2006

 

 

 

 

p. 17
연필화

눈이 오려다 말고 무언가 기다리고 있다.
옅은 안개 속에 침엽수들이 침묵하고 있다.
저수지 돌며 연필 흔적처럼 흐릿해지는 길
입구에서 바위들이 길을 비켜주고 있다.

뵈지는 않지만 길 속에 그대 체온 남아 있다.
공기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무언가 날릴 준비를 하고 있다.
눈송이와 부딪쳐도 그대 상처입으리.

 

 

p. 27
홀로움

시작이 있을 뿐 끝이 따로 없는 것을
꿈이라 불렀던가?

작은 강물
언제 바다에 닿았는지
저녁 안개 걷히고 그냥 빈 뻘
물새들의 형체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리는,
끝이 따로 없는.

누군가 조용히
풍경 속으로 들어온다.
하늘가에 별이 하나 돋는다.
별이 말하기 시작했다.

 

 

p. 45
실어증은 침묵의 한 극치이니

아 이 빈자리!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누구'가
의자 하나 달랑 남기고 사라지고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그 '구누'와 무척 가깝지 않았어요? 물을 때
느낌만 철렁 남는 자리.
목구멍에 잠시나마 머물게 할 무엇이 나타나지 않는....
나름대로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공터만 있는....

 

 

p. 56
꽃의 고요

일고 지는 바람 따라 청매 꽃잎이
눈처럼 내리다 말다 했다.
바람이 바뀌면
돌들이 드러나 생각에 잠겨 있는
흙담으로 쏠리기도 했다.
'꽃 지는 소리가 왜 이리 고요하지?'
꽃잎을 어깨로 맞고 있던 불타의 말에 예수가 답했다.
'고요도 소리의 집합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는가?
꽃이 울며 지기를 바라시는가.
왁자지껄 웃으며 지길 바라시는가?'
'노래하면 질 수도...'
'그렇지 않아도 막 노래하고 있는 참인데.'
말없이 귀 기울이던 불타가 중얼거렸다.
'음, 후렴이 아닌데!'

 

 

p. 82~83
그 돌

투명해진다. 하늘이 탁 트이고 딱지 앉았던 벌레 구멍 터지고
남은 살 자잘히 바스러지고 잎맥만 선명히 남은 이파리
늦가을 바람을 드래도 관통시킨다.
비로소 앞뒤 바람 가라지 않게 되었다.

산책길에 언제부터인가 팽개쳐 있는 돌.
문득 눈에 밟혀 길섶 잇몸에 박아준다.

덮을 풀 한 포기 마른 나뭇잎 한 장 없이
한데 잠든 돌 꿈을 꾼 아침
혹시 딴 데로 옮겨줄까 다가가니
그는 하얀 서리를 입고 앉아 있었다.
괜찮다고,
하루 한 차례 볕도 든다고, 이처럼
마음 한가운데가 밑도 끝도 없이 내려앉는 절기엔
화사한 옷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앞의 햇볕 가리지 말아달라고.

 

 

p. 106~107
그럼 어때!

나흘 몸살에 계속 어둑어둑해지는 몸, 괴괴하다.
비가 창을 한참 두드리다 만다.
한참 귀 기울이다 만다. 고요하다.
생시인가 사후인가.
태어나기 전의 열반인가?
앞으론 과거 같은 과거만 남으리라는 생각.
숨이 막힌다. 실핏줄이 캄캄해진다.
일순 내뱉는다. 그럼 어때!

비가 다시 창을 두드린다.
나뭇잎 하나가 날려와 창에 붙는다.
그걸 떼려고 빗소리 소란해진다.
빗줄기여,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이어온 몸살과 몸살의 삶.
사로잡힘, 숨막힘, 캄캄함, 그리고
불현듯 긴 숨 한 번 들이쉬고, 그럼 어때!
이게 바로 삶의 맛이 아니었던가?
한줄기 바람에 준비 안 된 잎 하나 날려가듯
삶의 끝 채 못 보고 날려가면 또 어때!

잎이 떨어지지 않는 것까지만 본다.

 

 

p. 108~109
마지막 지평선

한줄기 용담빛 연기 공중에 올라 떠돌고
태양열 엔진을 단 해
하늘과 땅 사이의 금을 향해 굴러갔다.
그 금, 세상에 던져져 처음 밖을 내다보았을 때
세상 한 끝에서 다른 끝까지 그어진
가늘고 질긴 흑단 끈으로 팽팽히 상감된 금
외로울 때면, 가까이 오라고 속삭이던 금
다가가면 갈수록 목마르던 금
언젠가 잘못 끌어당겼다 앞으로 쏠려 쓰러졌던 금.
새들이 대신 날아주었다.
허리 줄인 바지처럼 걷다가 외로움- 목마름 속내를 들여다보니
그간 참 많이도 느슨해진 금.
마음먹으면 넌지시 들치고 빠져나갈 수도 있겠다.
누군가 속삭인다.
비자가 필요 없다고.
다른 누군가 속삭인다.
한번 나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고.
또 누군가 속삭인다.
애초에 금 같은 것은 없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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