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문학반

[다른 시간, 다른 배열] 이성미 시집

나에대한열정 2022. 1. 16. 20:58
반응형

이성미 <다른 시간, 다른 배열> 2020

 

 

이성미 <다른 시간, 다른 배열> 2020

 

 

 

시인 이성미는 2001년 <문학과사회>에 '나는 쓴다' 외 3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 <칠 일이 지나고 오늘>이 있다. 제5회 시로 여는 세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p. 20~21
접힌 하루

하루가 접혀 있었다. 금요일에서 일요일로 걸었던 것이다. 토요일은 접힌 종이 속에 있었다.

땅 밑에 녹색 어둠이. 어둡고 기름진 흙에서 검은 식물들이 자랐다. 종이 사이에. 하루가 있었다.

금요일 아침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 금요일 아침을 책상 위에 둔 채 책상 앞을 떠났다. 걸었다. 딴생각을 했을 것이고, 딴 곳을 걸었을 것이다.

일요일 오후의 희미한 공기들이 나를 둘러쌌다. 나무에는 일요일 오후의 잎들이. 잎들에는 일요일 오후의 햇빛이. 일요일 오후의 바람이 잎들을 흔들었다. 일요일의 뿌연 빛 속에서 내일의 조그만 전구들이 흔들리는 걸 보면서.

나는 일요일 오후를 통과하고. 일요일 오후의 속도로.

앞으로 걸었다. 딱딱해지는 저녁 공기. 저곳은 월요일의 검은 우산을 파는 곳, 도착하면 우산을 검게 펴야지.

밤이 되었고. 나는 책상 앞으로 돌아왔다. 월요일이 오기 5분 전이었을 것이다. 책상 위에

금요일 밤이 놓여 있는 걸 보았다. 접힌 종이가 펴지면서.

네번째 꽃잎과 여섯번째 꽃잎 사이에 다섯번 째 꽃잎이.
숨었다가 나타나면서.

일요일 오후의 증거들이 풍선처럼 터져버렸다. 토요일 0시를 알리는 괘종시계가 울렸다.

토요일이 빠닥빠닥한 파란 깔개를 폈고. 그 위에 토요일의 증거들을 소풍 도시락처럼 하나씩 꺼내놓기 시작했다. 

 

 

p. 54~55


밤에 문을 달았다. 밤 속으로 들어가려면 문을 열어야 하니까. 등으로 문을 밀어 닫고. 밤 속에 머무를 거니까.

밤에 서랍을 달았다. 밤 속에 넣어둘 거니까. 밤 속에서 찬찬히 꺼내 볼 거니까.

밤의 문에 못을 박았다. 삐그덕. 소리도 들었습니다. 손에 잔가시도 박혔습니다. 어젯밤은 거칠거칠했어요.

너를 향해 날아가는 마음에 날개를 잘못 달았다. 부러진 날개는 어디에. 날개가 떨어지는 소리를 너는 듣지 못했니.

사람들이 눈을 흘기며 보기에. 마음에 입을 그렸다. 다문 입을 그리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벌어진 입에 이빨들이 없었다. 혀의 모양도 그릴 줄 몰랐으니까.

그래서 미소를 지었다. 나의 미소를 보고 아무도 웃지 않았다.라고 적었다.

적어야 하니까. 종이처럼. 밤의 일부를 찢었다.

 

 

P. 58
분홍

너를 만나면, 주머니에 들어 있던 것, 생각나지.
구겨진 분홍.
습자지처럼 부드럽고
조용히 구겨진다.
분홍이라는 점. 그것이 중요하다.
꺼내면 딱딱한 쓰레기가 되고
꺼내지 않으면 분홍 부드러움.
주머니 속에서 분홍이 피어난다. 사르륵사르륵. 손끝에 만져지는 소리. 손끝이 분홍이 된다.
꽃이 될 수 있는 분홍,
꺼내지 않으니까 꽃이 되지 않는 분홍.
꺼내지 않으니까 버려지지 않는
꽃이 아닌 분홍.
너와 헤어지면. 잊는다. 주머니에 오래된 분홍이 있다는 것을.

 

 

P. 62~63
부등식

열려 있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물고기라면. 물에 떨어진 지푸라기라면.
댐의 수문으로 쏟아져 나가는 물살이 있고. 떠밀려 하류로 하류로 하류로. 방향이 있습니다. 흐름은

위에서 아래로. 나는 옆에서 옆으로.

활짝 웃었습니다. 흘렀습니다. 나에게서 너에게로. 무엇이라 부르든지. 마구 흘러갔던 것입니다. 물고기와 지푸라기처럼. 나→너

너의 목소리가 커집니다. 너는 사과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나 <너

부등식이 된 사정을 몰라서 나는 불편해집니다. 등식이 되면

세상이 정전된 것처럼 침묵에 잠깁니까. 움직임이 정지합니까. 낯선 바다에 가면. 간다고 등식이 될까요.

부등식을 넘어 등식이 되는 것
나는 조금 닫았습니다. 조금 있다가 조금 더 닫았습니다. 더 좁게. 등식이 되는 것.

내가 닫고 나자 네가 열었습니다. 무엇이 내게 흘러왔습니다. 불편한 나> 너

열리고 닫힙니다. 흘러가고 흘러들어옵니다. 등식은 없습니까.

같이 열리는 세계는 우리에게 열리지 않는 것일까.

부등식이 되어야 합니까. 그렇다면 등식을 넘어서는 부등식은 없습니까.

희미한 부등식으로 너를 조용히 염려하면 안 되겠습니까.

 

 

P. 66~67
끝의 성격

끝이란 말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끝이 오고 있다고 한다. 밖에 봄이 오고 있단다. 이 봄이 마지막 봄이라면서.

밖에 여름이 오고 있단다. 이 여름이 마지막 여름이라면서.
마지막 십일월은 단정히 접힌 봉투처럼 기다리고 있단다.

끝이 나면. 끝 다음에 뭐가 있을까요.

줄을 당겨본다. 봄의 색깔을. 여름의 넓이를. 끌어당겨 본다. 십일월의 부서진 조각이 끌려와. 중간에 줄을 놓아 버린다.

끝이 올 때까지 손을 어디에 둘까요. 손의 위치는 끝에 대한 나의 높이. 머리가 뜨겁고.

나는 마지막 질문이 적힌 종이를 길쭉하게 접어서 너에게 준다. 네가 내놓을 틀린 답을 들으려고.
틀린 답은 얼굴들처럼 낳고. 과즙이 흐른다.

나의 답은 과일의 중심처럼 비어 있다. 씨가 있어야 하는 자리에 씨가 없고. 작은 공기가 있다.

손안의 둥근 공간을 나는 꼭 쥐고 있다. 둥근 빈자리가 사라질까 봐

손을 펴지 않았다. 손을 펴면 잡아야 하는데. 손을 펴야 할 때가 오고 있고. 그것이 끝의 성격.

끝이 오면 무엇을 잡을 것인가요. 선택할 힘이 없었다지만. 과연 없었나요. 아는 게 없는 나는

발을 내려다본다. 나의 발은 봄과 여름 속으로. 끝을 향해 계속 걸어가겠지. 발은 걷고 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 걸어갈 수 있다.

 

 

P. 68~70
거짓말

그때 너는 없었으니까 너는 거짓말. 몽당연필이 새 연필로 자라나듯. 네가 천천히 네가 되어 나타났을 때.

나는 처음으로. 이렇게 신비한 거짓말도 있구나. 알아차렸고. 매일 중얼거렸는데.

어제는 있었는데 오늘은 없다.

나는 오늘 있지만 내일은 없을 거야. 우리는. 목화솜 같은 거짓말로 이루어졌다. 거짓말의 세계에 등장해서. 이 세계의 동전으로 물통과 설탕을 샀으며.

먼지 뭉치가 되었다. 너는 솜사탕처럼 녹았다. 나의 긴 이빨을 녹이면. 솜사탕의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 먼지 뭉치는 오늘부터. 거친 밥을 먹겠다.

나는 투명한 것만 믿는 사람이 되어간다. 너는 햇빛이 비치는 흰 망사 커튼처럼. 투명해진 손가락으로.

달콤한 소금을 우리 밥에 뿌리면서. 윙크를 하고 묻는다. 짜요, 달아요?

흰 가루는. 하얀 쌀가루처럼. 하얀 눈가루처럼.

크고 뜨거운 별이 멀리서 내게 도착하면 흰 점이 되는 것처럼. 반짝 말을 걸고 곧 캄캄해지는 것처럼.

흰 가루가 뿌려진 밥을 먹었으니 거친 노래가 남았다. 먼지니까 먼지답게 나는.

끝까지 더러워질 테다. 시커메지고 시커메지다가. 검은 우주 속으로 돌아가 순결한 검은색이 될 때까지. 그때

너였던 흰 돌이 새로 태어나는 은하계의 초대를 받고 날아가다가. 어쩌면 검은색을 지나며 하얀 윙크처럼 한번 반짝일지도.

나는 검은색이 된지 오래라 잊었겠지만. 온 힘을 다해 몰락해가는 우주의

검고 깊은 배경이 되려면. 지금은 불투명한 조각을 내게 남겨둘 것.

 

 

P. 118~119
크래커처럼

창문은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열려 있었고.

40일 동안 비가 내렸지. 전화를 걸고 메시지를 보내는 동안
어두운 방에서
강아지는 베개처럼 불평 없이 자고 있고.

메일함을 수북해져서 저장용량이 부족합니다 경고가 뜬다.

창밖에 나뭇가지처럼 목이 긴 사람이 지나가고.(아는 사람인가?)
내 방을 기웃 들여다보며 또 한 사람이 지나가고.
창밖을 지나가던 사람이 보지도 않고 내 방에 꽃을 버린다.

시든 꽃이 마른 꽃이 되어 침대에 쌓이는 동안

나는 메일을 휴지통에 버리고 책을 버리고 관계를 버리고 
시간을 버린다.

잠든 강아지를 깨워 강아지와 함께
작은 시간들의 세계로.

비가 그친 검은 아스팔트에는
사람들이 밟고 간 나의 시간들이
부서진 크래커처럼 흩어져 있다.
반응형
BI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