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신용목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2004
신용목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2004
p. 20~21
우물
학미산 다녀온 뒤 내려놓지 못한 가시 하나가 발목 부근에 우물을 팠다
찌르면 심장까지 닿을 것 같은
사람에겐 어디를 찔러도 닿게 되는 아픔이 있다 사방 돋아난 가시는 그래서 언제나 중심을 향한다
조금만 건드려도 환해지는 아픔이 물컹한 숨을 여기까지 끌고 왔던가 서둘러 혀를 데인 홍단풍처럼 또한 둘레는 꽃잎처럼 붉다
헤집을 때마다 목구멍에 닿는 바닥
눈 없는 마음이 헤어 못 날 깊이로 자진하는 밤은 문자보다 밝다 발목으로는 설 수 없는 길
별은 아니나 별빛을 삼켰으므로 사람은 아니나 사랑을 가졌으므로
갈피 없는 산책이 까만 바람에 찔려
死火山 헛된 높이에서 방목되는 햇살 그 투명한 입술이 들이켜는 분화구의 깊이처럼
허술한 세월이 삿된 뼈를 씻는 우물
온몸의 피가 회오리쳐 빨려드는 사방의 중심으로 잠결인 듯 파고드는 봄 얼마간
내 아픔은 뜨겁던 것들의 목마름에 바쳐져 있었다
死火山(사화산): 현재 활동을 하고 있지 않으며, 미래에도 활동을 할 것으로 예상되지 않는 화산
p. 24~25
오래 닫아둔 창
방도 때로는 무덤이어서 사람이 들어가 세월을 죽여 미라를 만든다
골목을 세워 혼자 누운 방
아침 해가 건너편 벽에 창문만 한 포스터를 붙여놓았다 환한 저 사각의 무늬를 건너
세상을 안내하겠다는 것인가 아이들 뛰는 소리 웃음 소리 아득히 노는 소리 그러나
오로지 그녀를 통과하면서 나는 어른이 되었다
그녀의 몸에 남은 지문에 검거되어 영원한 유배지에서 다시 부모가 되어야 한다
몇 번의 바람이 문을 두드리고 지나갔지만
햇살이 방바닥을 타고 다시 창을 빠져나갈 때까지, 나는 일어나질 못했다
언제나 건널 수 없는 곳으로 열려 있는 추억처럼
어떠한 발굽도 뒤늦은 일인 것을
낮에 뜨는 흰달이 모든 무덤을 지고 망각을 향해 건너가는 캄캄한 세상의 내부에서
언제쯤 내가 만든 미라가 발견될지 모른다
창문 너머 불타는 가을 산,
그 계곡과 계곡 사이에 솥을 걸고 싶다 바람의 솥 안에 눈송이처럼 그득한 밥을 나의 잠은 다 비우리라
p. 26
겨울 산사
갈잎 같은 흔적이 눈 위에 찍히는 동안 명의 무게를 다는 길 위에서 나는 아버지의 얕은 발자국을 다시 딛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지상의 무게가 얼마 남지 않으셨군요 머잖아 날아오를 만큼 가벼워졌음을 이르시려고 묵묵한 겨울 적막도 저무는 산길 앞서며 숨차시고 그런 누안의 걸음을 산사는 산의 눈망울이 되어 오래도록 내려다보았는지도
모르는 채 향내에 섞이는 어둠으로 산사에 들었습니다 날지 못해 굳어진 기와는 구름의 어디쯤에서 허리를 접고 이승을 버티느라 휘어진 기둥도 서서히 뿌리로 돌아가 아버지 지상에 지은 집 저 같아 행자승의 마중도 없는 마루에 앉아 지워진 산길 대중하고 계시는지요 하지만 어딘가 숨골처럼 군불 돌고 있을 저녁 마음의 고요가 절간의 고요를 지피고 마침내 산의 고요로 퍼져 희미한 능선 바람으로 사는 것을
아버지 한 마디도 없이 끄덕끄덕 처마 밑으로 들어가 한 줌 그림자가 되었습니다 염 없이 서성이던 나는 씨로 담겨 따로 놓인 나락 같았지만 이승의 끝인 듯 풍경 소리가 그 몸 다 퍼내도록 아버지는 나오시질 않았습니다
p. 48~49
강물의 몸을 만지며
그만큼의 부질없음을 받아들인다.
물살 여린 강에는
하루내 산 그림자가 스며 흘렀고
가으내 낙엽이 몸을 뉘었다.
소리 없이 깊어지는 세상의 수평 위로
비늘 돋는 저녁.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려다 지친 낚시꾼들은
휴일의 여유를 배낭 속에 챙겨 넣고 하나 둘
뒤꿈치를 감추려 애를 썼다.
얼굴 흰 가시내가 있어 사랑했었다.
한없이 게을러지고 싶은 걸음
노을처럼 붉히며 일어났을 때,
기억의 어두운 하늘마다 빛나는 별들
강의 깊이를 가늠하고 있었다.
산주름 주름을 다 돌아내리고도
채우지 못한 것이 많아 강물은
모두에게 가장 깊은 곳을 허락했다.
허리를 굽혀 손을 씻는 남자의 등줄기처럼
많은 것을 떠나보내고 나면
쉽게 휘어져 돌아설 수도 있는 것일까.
사랑했던 가시내는 얼굴이 희어
물 고인 손금 속으로 가라앉았다.
나무 그늘을 포갠 산그늘 짙어지고
땅 위 모든 그늘을 포개어오는 어둠,
모두들 뒷모습을 적시며 떠나고
바람만이 색 잃은 물 위에
지네의 발자국을 남겼다.
그렇게 부질없이 안아온 많은 계절을
단 한 번 제 몸에 가두지 못하고
겨울이면 얼어붙고 말,
강물엔
저녁내 노을이 잘을 담갔고
한밤내 별들이 막대처럼 꽂힐 것이다
P. 69
구름 그림자
태양이 밤낮 없이 작열한다 해도
바닥이 없으면 생기지 않았을 그림자
초봄 비린 구름이 우금치 한낮을 훑어간다
가죽을 얻지 못해 몸이 자유로운 저 구름
몸을 얻지 못해 영혼이 자유로운 그림자
해방을 포기한 시대의 쓸쓸한 밥때가
사랑을 포기한 사람의 눈으로 들어온다
P. 72~73
지하철의 노인
일생을 눈 감고 살아온 사람이
내 앞을 지나간다
그 지팡이 위태로워
잡아주고 싶지만
이미 더는 내려가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바닥에 닿아 있었다.
보이는 것
너머를
보고 싶어
안으로 깊어졌을
눈, 작은 몸 어디에서 녹아
풍금 소리를 만드는지
그가 지날 때마다 노랫소리 떨어져
지팡이가 눌러놓은 자리를 동그랗게 메우고 있었다.
계단을 오를 때나
구릉을 지날 때도
나는 발끝을 보지 않았다.
가야 할 곳은 언제나 멀리 있어
내 속에 노래를 키우지 못했다.
폭 크게 서둘던 내 걸음 잠시
찬송가 밑에 세워둘 때
앞발의 뒤꿈치가
뒷발의 앞코를 넘지 않으며
나아가는 풍금의 건반이 희다.
문득, 세상의 빛이 사라져
모두가 비명을 쏟으며 발을 섞어도
노인은 홀로 유유히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보이는 것
너머를 보면서
노인이 지나간다.
사람들은 비명을 안고 잠들어 있다.
※ 신용목 시인의 다른 시집
반응형
BIG
'북리뷰 > 문학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박준 시집 (87) | 2022.01.20 |
---|---|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황동규 시집 (49) | 2022.01.19 |
[세상의 모든 비밀] 이민하 시집 (33) | 2022.01.18 |
[다른 시간, 다른 배열] 이성미 시집 (20) | 2022.01.16 |
황동규 [꽃의 고요], 황동규 시집 (41) | 2022.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