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문학반

[세상의 모든 비밀] 이민하 시집

나에대한열정 2022. 1. 18. 08:51
반응형

이민하 <세상의 모든 비밀> 2015

 

 

이민하 <세상의 모든 비밀> 2015

 

 

 

이민하 시인, <세상의 모든 비밀>시집의 앞날개 부분 소개

 

 

p. 26~27
휴일의 쇼

사람들은 휴일을 사랑하고 나도 휴일이 좋아 연중무휴 휴일이다. 일요일과 월요일의 철책을 없애고 빈방 같은 휴일이 쌓인다. 사람들은 빈방을 사랑하고 나도 빈방이 좋아 천지사방 빈방이다. 빈방마다 따끈한 철가방이 배달된다. 불어터진 햇발을 씹고 입가에 묻은 어둠의 소스를 훔치면 낯선 시간 속으로 지금 막 이사 온 기분. 뼈를 끌러 내장이라도 쏟고 윤이 나도록 닦으면 처박혀 있던 핏물이 엎질러져 물걸레를 짜듯 째지는 기분. 사람들은 휴일에는 더욱 바쁘고 나도 휴일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쉬지 않고 지껄인다. 사람들은 빈방에서 더욱 요란하고 나도 빈방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그럴듯하게 꾸며댄다. 욕실을 해변처럼 꾸미고 거실을 동물원처럼 꾸미고 책장에는 앵무새들을 기르고 벽에는 구름을 발라 코끼리를 걸어둔다. 코끼리의 귀를 감아 괘종 소리를 울리면 시계추를 따라 앵무새들이 유행가를 부른다. 조련사가 필요해서 어느 날 나는 원숭이를 낳았다. 화창한 날에는 먼지 낀 실커튼을 추켜 올리고 낙타의 눈을 열어젖힌다. 그 속으로 지나가는 행인들. 그들을 붙잡으려고 나는 말을 부리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도 말을 달리는 연습을 했다. 검은 갈기의 흔들의자가 도착할 즈음 곡마단을 꾸릴 것이다. 관람객이 는다면 야근도 늘릴 참이다. 창고에 천막을 치고 극장처럼 꾸미는 건 겨울 직전의 일. 복도를 밤의 정류장처럼 꾸미고 찻잔을 가로등으로 기타를 트럭으로 부를 것이다. 나는 트럭 밑에 잠들어 있다. 원숭이가 트럭을 몰고 극장으로 달려간다. 나는 밟히면서 듣는다. 바퀴 소리가 멈추면 맨 처음의 조곡이 연주될 것이다.

 

 

P. 59~61
붉은 스웨터

한 올만 당기면 풀어질 듯
입을 막고 있어서 우리는 얼굴까지 빨개졌다

몸속에 둔 실마리를 들키지 않을 것처럼
가족과 이웃과 동료들에 엮여서
두껍고 따뜻하고 촘촘한 사람이 되었지만
손가락이 닿으면 파르르 떨리는

스웨터의 물결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손끝에서 맥박이 섞이고

눈을 가만히 닫고 있으면
물려 입은 옷처럼 타인의 냄새가 난다
조심조심 숨소리를 헤아리는 호흡이 틀니처럼 박혀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재활용되고 있었던 걸까
깨끗이 빨아 입어도 낡은 슬픔뿐

어둠이 벽에 기대어 앉아 있다
입가에 붙은 미소를 보풀처럼 떼어주며

스웨터보다 한 뼘 더 기어올라서
가느다란 목을 움켜쥔
검은 손은 내 것이 아닌데
당신은 내게 애원하는 눈빛이다

우리의 실마리를 쥐었다 놓았다
벌거벗은 잠자리까지 파고드는
어둠의 손아귀

바닥에 누워 풀썩거리던
한 사람이 밧줄 더미처럼 풀어지고 있었다
가볍고 뜨거운 핏방울이 한 코 한 코 솟구쳤다

어둠의 매듭이 묶이고 풀릴 때마다
핏물로 짠 스웨터가 몸속에서 뒤척거렸다
입을 닫아주어도 잠들지 않았다

 

 

P. 73
흑백사진

엄마는 밤새 빨래를 하고
할머니는 빨래를 널고 아버지는 빨래를 걷고
나는 옷들을 접고 펴고
동생은 입는다 덜 마른 교복
날이 새도록 세탁기가 돌아도
벽에 고인 빗물은 탈수되지 않고
멍이 든 두 귀를 검은 유리창에 쿵쿵 박으며
나는 계절의 구구단을 외우고
동생은 세 살배기 아들과 기억의 퍼즐을 맞추고
할머니는 그만해라 그만해라 욕실을 들여다보시고
엄마는 죽어서도 빨래를 하고
팔다리가 엉킨 우리들은
마르지도 않는 지하 빨랫줄에 널려
아버지는 나를 걷고
나는 동생을 접고 펴고
동생은 입는다 덜 마른 아버지

 

 

p. 90~91
육체의 비밀

눈을 감은 사람의 얼굴은 어디에 있나
눈꺼풀의 안쪽과 바깥

한 사람이 옷을 훌훌 벗는다면
부끄러움은 누가 뒤집어쓰나
벗은 몸의 안쪽과 바깥

당신은 깊은 잠에 빠져 있고
나는 당신 안에서 빠져 있는데
서로를 향하여 끝없이 멈추는 움직임 속에서

정지한 사람의 두 발은 어디에 있나
한 뼘과 천 길 사이

굳게 닫힌 눈과 입
실금이 간 얼굴로 시체처럼 누워
당신은 가장 가깝고

나는 가장 먼 곳에서
껍질과 수염을 벗겨내고 옥수수알을 씹는다
천 개의 알갱이를 입 안에서 터뜨리며
당신을 자꾸 귀에 대본다 깜깜한 백지처럼

입을 다문 사람의 목소리는 어디에 있나
입술의 안쪽과 바깥

배시시 눈을 비비며 마주 보는 당신은
멀리서 불빛을 보고 숙소로 찾아든 이방인 같다

모호한 발음으로 인사를 나눠야 할 것 같다
눈빛을 꼈다 켰다
유리문을 열고 닫으며

우리는 처음 만난 사람들 같다
가장 투명한 곳에서

 

 

p. 121~123
옛 맛

무엇이 마음을 이끌었습니까
가볍게 물 한잔을 권하겠습니다
맛에 취해 있는 한, 맛을 취할 수 없습니다
누구라도 젓가락을 들기 전 손가락을 듭니다
어제의 매운맛과 감칠맛에 대하여
손가락에서 툭, 놓치는 것이 있어도
맛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누가 이 맛의 전달자입니까
테이블 밑으로 포크를 떨어뜨렸을 때
재빨리 달려와 새것으로 바꿔 준 청년입니까
이물질이 묻지 않은 접시를 날라다 준 아가씨입니까
주문대로 제시간에 생선을 칼질한
위생모가 잘 어울리는 주방장입니까
글씨가 희미해진 차림표를 친절하게 읽어준 주인 여자입니까
누가 이 맛의 안내자입니까
손님을 가리지 않고 받아주는 미끄러운 유리문입니까
무심히 지나가도 오늘따라 눈에 띄는 간판입니까
현기증과 공복감이 혼동되는 대낮의 거리입니까
밤과 낮으로 떠밀려 다니는 하루 두 끼의 얼굴들입니까
그들 속에서 음식 냄새를 흘리는 체크남방입니까
그 냄새를 입은 적 있는 옛날 연인입니까
누가 이 맛의 주인입니까
그의 곁에서 메뉴를 배운 어린 숙녀입니까
그녀의 식탐이 처음 우려낸 미소입니까
그 미소를 아낌없이 뿜어주고 있는 옆 테이블의 여자입니까
테이블을 쾅 내려치는 창가의 남자는 모두의 시선을 훔칩니다
피가 흐르는 주먹 안에 고인 것은 무엇입니까
자, 여기는 누구의 기억 속입니까
그가 주먹을 쥐고 있는 한, 우리의 입은 정직합니다
서서히 퍼지는 그의 손으로 쓸어내리는 건 누구의 가슴입니까
다시 가슴으로 흘러드는 건
처음 그대로의 맛입니까, 처음 보는 맛입니까
숟가락을 잠시 내려놓으면 포만과 허기는 휴전입니까
누가 이 맛의 상속자입니까
줄을 서지 않아도
문밖으로 나가면 다시 차례에 끼어 있습니까
가볍게 물 한잔을 권하겠습니다
입가심을 하려고 고개를 젖히는 앞사람은
일어서는 사람입니까, 기다리는 사람입니까

 

 

p.132~134
세상의 모든 비밀

나는 옆집 아이의 태생의 비밀을 알고 있다
그 애 아빠의 정치적인 비밀을 알고 있다
왜 그들은 내게 입막음을 안 하나

하루아침에 미용실 여자가 미인이 된 까닭을.
편의점 남자가 시인이 된 까닭을. 그들이 손잡고 구청에 간 까닭을.
석 달 후 남자 혼자 구청에 간 까닭을 나는 알고 있는데

여자의 머리색이 남자의 정치색과 어울려
신발 속에 감춰진 짝짝이 양말처럼 아무도 모르게
호들갑을 피우는 오후

선박처럼 무거운 귀를 잠시 멈추고 잠이 오는 의자에 앉아
문맹인 나는 머리색을 바꾸고
색맹인 애인은 이별의 편지를 바꾸고

내 귀를 타고 밀입국한 사람들은
어떻게 빠져나온 것일까 반대편 귀를 향하여
얼굴을 뒤집고

지하철 남자의 의족이 지상의 물질 위로 떠오를 때
인어공주가 되는 이야기
아름다운 두 다리의 침묵에 대하여

진위 논란으로 시끄러운 세상에 대하여
칼의 입맞춤 대신 물거품이 되어 바다에 녹아버린
성전환자의 슬픈 동화 속에서
목소리를 가로챈 마녀의 기술처럼

목사의 안수기도에 섞이는 어떤 성분들
이를테면, 앞 못 보는 어둠의 눈을 번쩍 후려치는
어떤 선언들

늙은 소녀들은 아직 사랑이 넘치고
구걸하는 남자들은 눈물이 넘쳐서
기울지도 침몰하지도 않는
어떤 세계에서

흩어진 나의 비밀들은 어느 귀를 타고 흘러가는가
내가 같은 남자와 백번째 헤어진 날에 대해

당신은 지금 내 비밀 하나를 보관 중이다
혀처럼 얇게 저며진 물결 하나가 귓속으로 들어갔다
의도하지 않아도

언젠가 귀를 기울이는 쪽에서 
당신도 모르게 식은땀이 흐를 것이다

 

 

p. 153~155
어둠은 우리를 눈뜨게 하고

우산 말고 양철 지붕은 어때요
빗살무늬 우리 집을 빌려드릴게요
비가 그쳐도 꼬인 길은 펴서 말릴 수 없는데
내가 떠나도 식탁 위엔 쥐들이 꼬일까요
빈 상자 속의 고양이를 빌려드릴게요 네 마리나 있어요
손발이 맞는다면 굳게 닫힌 벽장을 빌려드릴게요
열쇠를 꽂아둘게요 반짝반짝
눈빛이 통한다면 어둠 속의 시집을 빌려드릴게요
접었다 폈다 할수록
손금처럼 선명해지는 유언들
죽은 엄마를 빌려드릴게요 예측 가능한 단 하루
죽은 엄마가 끓여주는 미역국을 빌려드릴게요
사십 년 묵은 핏물로 쓸 만한 게 있다면
항아리 같은 내 몸도 빌려드릴게요 아직 깨지지 않아서
겨울이 오면 이 집에서 난 쫓겨나요
집주인은 카페를 지을 거래요 이 골목엔 그런 카페가 셋이나 더 있는데
집주인들이 모두 카페 주인이 된다면
골목에서 잠은 사라져버릴까요 약속이나 한 듯이
카페 주인들이 어느 날 모텔 주인이 된다면
한 푼씩 모은 잠마저 탕진하는 날이 올까요
공복의 혀가 잠 못 드는 밤
데스크에서 퍼뜨리는
꽃 뉴스 말고 앵무새는 어때요
여린 주먹을 말아 쥐고 받아쓰기를 하는 아이들의 노동을 빌려드릴게요
담보로 잡힐 목숨도 없이 새벽 거리를 횡단하는
유령들의 국가를 빌려드릴게요 남아도는 재난을 떨이로 드릴게요
서로가 거울이 되어 하얗게 질리는
전쟁 같은 침묵 속에서
입만 열면 까르르 쓰러지는 애인을 빌려드릴게요
새로운 시작처럼 텅 빈 통장을 거저 드릴게요
똑, 딱, 똑, 딱, 한국어로 맴도는 시간 너머로
함께 넘었던 꿈의 국경을 덤으로 드릴게요
그 속에서 당신은 웃었던가요
칼바람이 꿈을 자르는 길 위에 서서
잠은 좀 잤나요 당신의 어딘가에도 나의 첫 페이지가 있나요
반응형
BI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