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문학반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황동규 시집

나에대한열정 2022. 1. 19.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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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2003

 

 

황동규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2003

 

 

 

p. 13
어떤 나무

다시는 세상에 출몰하지 않으려고
배에 돌을 달고 물 속에 뛰어든 사람
그 중엔 밧줄 풀어져
막 풀어진 눈으로
세상 구경 다시 한 사람도 있다.
안부 궁금하다.
한 오백 년 살며
몇 차례 큰 수술하고
사람 머리보다 더 큰 돌덩이 여럿 배에 넣고
넉넉하게 서 있던 나무
제주 애월에선가 만난 팽나무.
그 몸으로 어디 뛰어들어도
되떠올라 어리둥절할 일 없으리.
어느 날 돌덩이들만 땅에 내려
어리둥절하리.

 

 

p. 14
쨍한 사랑노래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조용히, 방금 스쳐간 구름보다도 조용히,
마음 비우고가 아니라
그냥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저물녘, 마음속 흐르던 강물들 서로 얽혀
온 길 갈 길 잃고 헤맬 때
어떤 강물은 가슴 답답해 둔치에 기어올랐다가
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그 흘러내린 자리를
마음 사라진 자리로 삼고 싶다.
내림 줄 쳐진 시간 본 적이 있는가?

 

 

p. 25
해마(海馬)

아무래도 나는 너무 환한 곳
사방이 물비누로 정갈히 씻은 본 차이나 같은
실하고 눈부신 곳으로 못 가리.
멸종 위기의 동물답게
막 어둡기 전 거리를 채 뜨지 못하고
짐말처럼 한세상 터벅터벅 걸어온 다리는
동그랗게 오므리고, 고개 약간 숙이고
겨울 저녁
뿔뿔이 제 갈 길 가는 사람들 위에 나직이
잘 뵈지 않게 떠서
혹 아는 이를 만나면 숙인 머리 더 숙이고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벗어나
가볍게 떠돌리.
느린, 늘인 걸음으로.

 

 

p. 29
흘러내릴 곳

아무리 새어 나가도 자꾸 늘어나는 서울역의 노숙자들
그들은 콘크리트 바닥에 누워 얼굴을 신문으로 덮는다.
신문 벗기지 마라. 얼굴이 지워져 있다.
텔레비 화면 속 시에라 레온의 자동소총 쏘는 초등학생들
그들도 주중엔 총을 놓고
얼굴 달고 학교에 간다.
무단 폐기물로 널려 있던 주민들도
하나씩 얼굴 해 달고 밭에 나가 괭이질을 한다.
아프리카 건기에 동트기 전
떠돌다가 모이는 별들.

신문지 밑으론 흐르지 않는다
아무것도.
흘러내릴 곳이 있어야지
혹 눈에 물이, 물이 고이더라도
흘러내릴 얼굴이······

 

 

p. 38
지상(地上)의 속모습

태풍 직전
바람 없음이 태풍의 눈이듯
그대 없음이 이 세상의 눈이다.
선창에 물이 들어왔다 나가도
매어 논 배들이 흔들리지 않는다.
파도 소리 하얗게 밀려들어도
축대 너머로 물보라가 뜨지 않는다.
도처에 그대가 없다.

바람이 간판들을 쓰러트리고
나무들이 타오른다.
말(言)들이 속으로 들어가고
말의 건물들이 타오른다.
비상계단 하나가 거짓말처럼 날아올라
지그재그로 하늘에 걸린다.
계단 끝에 그대 없음!
아 지상의 속모습.

 

 

p. 39
집보다는 길에서

집에서보다는
길에서 가고 싶다.
톨스토이처럼 한겨울 오후 여든두 살 몸에 배낭 메고
양편에 침엽수들 눈을 뜨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눈길을
혼자 터벅터벅 걸어 기차역에 나가겠다가 아니라
마지막 쑥부쟁이 얼굴 몇 남은 길섶.
아치형으로 허리 휘어 흐르는 강물
가을이 아무리 깊어도
흘러가지 않고 남아 있는 뼝대
그 앞에 멎어 있는 어슬어슬 세상.
어슬어슬, 아 이게 시간의 속마음!
예수도 미륵도 매운탕집도 없는 시간 속을
캄캄해질 때까지 마냥 걸어.

 

뼝대: 정선 언저리의 사투리이다. 그 고장에 가면 바위로 된 높은 벼랑들이 많은데 이를 뼝대라 부른다. 

 

 

p. 58~59
겨울 영산홍

겨울 아침 햇살 속에 베란다 영산홍 얼굴들이 달아오른 것을 보며
베그 4중주단이 간절히 연주하는 베토벤 후기 현악 4중주를 듣다
불타가 예수에게 말했다.
"저런 음악을 틀어놓고야
글이 되거나 그림이 되는 인간들,
누가 인간이 아니랄까봐······"
"허지만 결국 선생의 언행은
일단 한심한 인간이 되어봐야
제 삶이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보다는 일단 한심 속에 정수리를 담그는 것이 삶의 단초랄까."
음악에 귀 기울이다가 예수가 말했다.
"저 울음을 몸 속에 담고 버티는 소리를 들어보게.
저건 이미 한심 밑바닥까지 떨어져본 자의 소리가 아닌가."
영산홍으로 시선을 돌리며 불타가 말했다.
"허긴 죽음에 들켜 죽음을 공들여 만드는 자에게
떨어져보고 안 봄이 무엇이겠는가?"
고개를 끄덕이면 예수가 받았다.
"공들임을 빼면 인간이 과연 무엇이겠는가?'

 

 

p. 77
바다를 오르내리다

아 눈 높이에서 오르내리는 수평선
배는 파도 위에 꽃잎처럼 흩날리고
온몸에 바닷물보라를 맞으며,
병에서 나오고 싶어하는 술
모두 나오게 했어.
파도가 입술로 핥고 있는 섬들 무섭게 예뻤고
어떤 섬은 물보라 속에
송말(宋末) 선사(禪師)들의 수묵 추상화로 사라지고 있고
그 여백 속에서 어떤 섬은
파도에 걸린 물새가 되어 날개를 퍼덕였어.
배가 솟을 때면 같이 솟는 섬들.
한 섬 돌면 이번엔 파도가 혀로 핥는 섬.
발 밑에서 배가 헛딛은 발판처럼 사라진다 해도
차마 눈 돌치기 힘든 바다가 있다는 걸 첨 알았어
한번 들어서면
눈감고 온몸이
눈동자 되는 곳이 있다는 걸.

 

송말(宋末) 송나라 '송', 끝 '말' 선사(禪師) 고요할 '선', 스승 '사' : 선종의 조사를 가리키는 호칭, 승려 법계의 하나, 승계로서의 선사는 사찰의 주지 정도에 임명될 수 있는 위치. 이후에는 수행력이 높은 승려나 선종의 승려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

 

 

p. 84
밤 여울

아주 캄캄한 밤이 오히려 마음 편하다.
마음속이 온통 역청 속일 때
하늘에 별 몇 매달린 밤보다
아무것도 없는 길이 더 살갑다.
두 눈을 귀에 옮겨 붙이고
더듬더듬 걷다
갈림길 어귀에서 만나는 여울물 소리.
빠지려는 것 두 팔로 붙들려다 붙들려다
확 놓고 혼자 낄낄대는 소리.
하늘과 땅이 가려지지 않는 시간 속으로
무엇인가 저만의 것으로 안으려던 것을
자신도 모르게
놓아버리는 소리.

 

역청: 원유를 정제한 뒤 남는 끈적거리고 검은색의 점성을 가진 액체나 반고체의 석유화합물(고체의 아스팔트, 액체의 석유, 기체의 천연가스를 통칭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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