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문학반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박준 시집

나에대한열정 2022. 1. 20.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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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2018

 

 

박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2018

 

 

 

 

 

p. 9
선잠

그 해 우리는
서로의 섣부름이었습니다

같은 음식을 먹고
함께 마주하던 졸음이었습니다

남들이 하고 사는 일들은
우리도 다 하고 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발을 툭툭 건드리던 발이었다가
화음도 없는 노래를 부르는 입이었다가

고개를 돌려 마르지 않은
새 녘을 바라보는 기대였다가

잠에 든 것도 잊고
다시 눈을 감는 선잠이었습니다

 

 

p. 27
낮과 밤

강변의 새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떠나는 일이었다

낮에 궁금해한 일들은
깊은 밤이 되어서야
답으로 돌아왔다

동네 공터에도
늦은 눈이 내린다

 

 

p. 31
묵호

연을 시간에 맡겨두고 허름한 날을 보낼 때의 일입니다 그 허름함 사이로 잊어야 할 것과 지워야 할 것들이 비집고 들어올 때의 일입니다 당신은 어렸고 나는 서러워서 우리가 자주 격랑을 보던 때의 일입니다 갑자기 비가 쏟고 걸음이 질척이다 멎고 마른 것들이 다시 젖을 때의 일입니다 배를 타고 나갔던 사내들이 돌아와 침과 욕과 돈을 길바닥으로 내던질 때의 일입니다 와중에도 여전히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어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던 때의 일입니다 아니 갈 곳 없는 이들만 떠나가고 머물 곳 없는 이들만 돌아오던 때의 일입니다 잠에서 깨어났지만 한동안 눈을 감고 있는 일로 당신으로부터 조금 이르게 멀어져 보기도 했던, 더해야 할 말도 덜어낼 기억도 없는 그해 여름의 일입니다

 

 

p. 60~61
마음, 고개

당신 아버지의 젊은 날 모습이
지금의 나와 꼭 닮았다는 말을 들었다

잔돌을 발로 차거나
비자나무 열매를 주워 들며
답을 미루어도 숲길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나는 한참 먼 이야기
이를테면 수년에 한 번씩
미라가 되어가는 이의 시체를
관에서 꺼내 새 옷을 갈아입히다는
어느 해안가 마을 사람들을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서늘한 바람이
무안해진 우리 곁으로 들었다 돌아 나갔다

어깨에 두르고 있던 옷을
툭툭 털어 입으며 당신을 보았고

그제야 당신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으로 맞이하지 않아도
좋았을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p. 68~70
안과 밖

그 창에도 새벽 올까

볕 들까

잔기침 소리 새어 나올까

초저녁부터 밤이 된 것 같다며 또 웃을까

길게 내었다가 가뭇없이 구부리는 손 있을까

윗옷을 끌어 무릎까지 덮는 한기 있을까

불어낸 먼지들이 다시 일어 되돌아올까

찬술 마셨는데 얼굴은 뜨거워질까

점점 귀가 어두워지는 것 같을까

좋은 일들을 나쁜 일들로 잊을까

빛도 얼룩 같을까

사람이 아니었던 사람 버릴까

그래서 나도 버릴까

그래도 앉혀두고 한 소리 하고 싶을까

삼키려던 침 뱉을까

바닥으로 겉을 훑을까

계수나무 잎은 더 동그랗게 보일까

괜찮아져라 괜찮아져라

배를 문지르다가도 이내 아파서 발끝이 오므라들까

펼친 책은 그늘 같아지고

실눈만 떴다 감았다 할까

죄도 있을까

아니 잘못이라도 있을까

여전히 믿음 끝에 말들이 매달릴까

문득 내다보는 기대 있을까

내어다보면 밖은 있을까

 

 

p. 79


오늘은 지고 없는 찔레에 대해 쓰는 것보다 멀리 있는 그 숲에 대해 쓰는 편이 더 좋을 것입니다 고요 대신 말의 소란함으로 적막을 넓혀가고 있다는 그 숲 말입니다 우리가 오래전 나눈 말들은 버려지지 않고 지금도 그 숲의 깊은 곳으로 허정허정 걸어 들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쯤에는 그해 여름의 말들이 막 도착했을 것이고요 셋이 함께 장마를 보며 저는 비가 내리는 것이라 했고 그는 비가 날고 있는 것이라 했고 당신은 다만 슬프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숲에 대해 쓸 것이므로 슬픔에 대해서는 쓰지 않을 것입니다 머지않아 겨울이 오면 그 숲에 '아침의 병듦이 낯설지 않다' '아이들은 손이 자주 베인다'라는 말도 도착할 것입니다 그 말들은 서로의 머리를 털어줄 것입니다 그러다 겨울의 답서처럼 다시 봄이 도고 '밥'이니 '우리'나 '엄마' 같은 몇 개의 다정한 말들이 숲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 먼 발길에 볕과 몇 개의 바람이 섞여 들었을 것이나 여전히 그 숲에는 아무도 없으므로 아무도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p. 91
겨울비

비는 당신 없이 처음 내리고 손에는 어둠인지 주름인지 모를 너울이 지는 밤입니다 사람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광장으로 마음은 곧잘 나섰지만 약을 먹기 위해 물을 끓이는 일이 오늘을 보내는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한결 나아진 것 같은 귓병에 안도하는 일은 그 다음이었고 끓인 물을 식히려 두어 번 저어나가다 여름의 세찬 빗소리를 떠올려보는 것은 이제 나중의 일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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