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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운 <산책하는 사람에게> 2020
안태운 <산책하는 사람에게> 2020
시인 안태운, 1986년 전주 출생. 201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감은 눈이 내 얼굴을>이 있다. 제35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p. 14
목소리
풍경 소리가 들립니까. 바람이 불었는지. 아니면 무언가 부딪쳤는지. 너는 그곳을 바라보았는데 풍경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너는 풍경소리를 들려주고 싶어서 사람을 찾고 있었어요. 다시 바람이 불기 전에. 무언가 부딪치기 전에 사람을 찾아야지.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다. 하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정말 아무런 일도. 풍경 소리가 다시 들리지 않았고, 그러므로 너는 손가락으로 풍경을 건드려보지만 이상하게도 소리가 나지 않는군요. 소리가 없군요. 너는 네 목소리를 내봅니다. 네 목소리를.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리면서. 그렇다고 풍경 소리 같지는 않았습니다. 너는 네 목소리 뒤로 돌아 나가는군요. 이제 다른 소리들마저 다 뒤로 돌아 나가는군요. 이제 다른 소리들마저 다 뒤로 돌아 나가나요. 그러면 거기 누군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p. 15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움직임
너는 찾고 있다. 무엇이 너의 기억이 될 수 있나. 너는 어떤 것에 마모되는가. 너는 어떤 것에 잦아드는가. 너는 어스름에 머무르다가 어스름을 떠나고 있었지. 떠난 후 냇가에서 흐르는 소리를 듣고 있었지. 그러나 냇가가 버린 무음을. 원래 없었던 것들을. 무음에 관하여 네가 움직일 때면 헤엄쳐 오는 기억이 있나. 너는 찾고 있나. 이 냇가에서 기를 수 있는 것들을. 다 기르고 난 후의 일들을. 머무르다가 흔들리는 것들을. 이런 것들을 과거라고 생각할 수 있나. 기억이 되어 당분간 멈출 수 있나. 무음에 기대어 너는 냇가로 들어갔지. 네가 건질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움직임.
p. 55
산책했죠
산책했죠. 우산을 사러 가야지, 생각하면서. 비가 오고 있었으니까. 밖으로 나가니 그러므로 이제 필요해진 우산을 사야 할 거라면서, 나는 산책했죠. 그렇게 우산 가게로 향했습니다. 비는 내리고 있었고, 하지만 가게에는 마음에 드는 우산이 없었어요. 아무리 봐도 우산 같지 않았어요. 잠깐 우산 같은 게 무엇인지 골몰했지만 그랬음에도 어쩔 수 없었으므로 나는 가게를 나섰습니다. 우산 같은 건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할 수 없이 더 먼 곳에 있는 우산 가게로 향했어요. 우산 같은 건 무엇인지. 비는 내렸고 가게로 걸어가는 사이 비가 그칠까 봐 조마조마했습니다. 나는 이미 우산이 필요해져 버렸는데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산책했죠. 눈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비는 내리는 것 같았고. 나는 빗속에서 숨기도 하고 빗속에서 젖기도 했습니다.
p. 91
사위는 것들 사위어가고
사위는 것들 사위어가고 그렇게 오다니 그렇게 가다니 문득 돌아보면 어디서든 사위어가다니 나는 멈춰서 사위어가는 것들을 망연히 바라보게 되고
그건 무엇일까
그건 왜일까
훗날 깨닫게 될지는 모르지만 이토록 나는 거리감에 휩싸이다니 이렇게 문득 내 몸이라니 내 하루와 이틀이라니 사위는 것들 사위어가고
서서히 자라난다
자라서 나는 언제
나는 어디서
사위는 것들 사위어가고 나는 내 시간이라니 내 공간이라니
사위다: 불이 다 타고 사그라져 재가 되다. 불을 붙이는 것을 '사르다'라고 한다. '사위다'는 문학 작품에서 사람의 애틋한 마음을 표현할 때 자주 쓰이는데, 애가 끓고 속이 타는 심정을 표현할 때 '사위어가다'라고 한다.
p. 98~99
여름을 떠올릴 수는 있었지만······
여름이 오면 할 수 있었죠
무엇을 할 수 있나
정말로 무엇을 할 수 있었나 생각해보면
당신은 할 수 없었죠
그렇게 여름이 올 수 있다면
촛불은 부드럽군요
그것을 쥔 손도
손의 그림자도
그래서 누군가 손을 내밀면
당신은 그 손의 그림자가 되는 것 같군요
다 벗은 쓸쓸함만 돌아다니는 것 같군요
어디에 있지?
촛불은 어디서 돌아다니지?
그러다 당신은 봄을 응시하는군요
그러다 쓸쓸함은 사라지고
그 모든 것이 사라져서
여름은 없군요
여름도 없군요
할 수 없었죠
무엇을 떠올릴까 생각해보면
여름을 떠올릴 수는 있었지만······
p. 100~101
어느 주말에 이르러 침대와 의자
시간이 흐른다면
침대와 의자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 형태와 사용법이 낯설고 어려워지는 때가 온다면
침대를 혼자 들어올린 채 있다면
그러니까 두 팔로 네 다리를
어느 주말에 이르러 의자 위에 마냥 서 있는 중이라면
미래라면
나는 그 무수한 침대와 의자 속에서 무기력한 몸짓으로 보듬을 것이다
팔을 흐느적
어느 주말에 이르러 내가 움직일 수 없다면
의자와 침대가 나를 다독일 수도 있겠지
움직여보라면서
하지만 움직일 수 없다면 흐르는 시간 자체가 되어 볼 수도 있을 거라며
사물은 어려운 존재군요
시간이 흘러 나는 내게 메모를 남겨보았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랑해
나는 몰랐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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