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문학반

[낙타] 신경림 시집

나에대한열정 2022. 1. 22.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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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낙타> 2008

 

 

신경림 <낙타> 2008

 

 

p. 10
낙타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p. 13
고목을 보며

그 많던 꿈이 다 상처가 되었을 게다
여름 겨울 없이 자기를 흔들던 세찬 바람도
밤이면 찾아와 온몸을 간질이던 자디잔 별들도
세월이 가면서 다 상처로 남았을 게다
뒤틀린 가지와 갈라진 몸통이
꽃보다도 또 열매보다도 더 향기롭고 아름다운 것은 
그래서인데

내 몸의 상처들은
왜 이렇게 흉하고 추하기만 할까
잠시도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떠돌게 하던
감미로운 눈발이며
밤새 함께 새소리에 젖어 강가를 돌던
애달픈 달빛도 있었고
찬란한 꿈 또한 있었건만
내게도

 

 

p. 18~19
어쩌다 꿈에 보는

복사꽃이 피어 있었을 거야.
장마당 앞으로 길게 강물이 흐르고 강물 위로는 안개가 피어나고.
사람들은 모이고 흩어지면서 웅성웅성 뜻 모를 말들을 주고받고
나는 덜렁덜렁 사람들 사이를 어슬렁거리면서 즐거워도 하고 슬퍼도 했지.
어디선가 물새도 울었어, 아침인데도 닭들이 홰를 치고.
나는 노새였던가, 아니면 나귀였던가.

어쩌다 꿈에 보는 이것이 내 전생일까!

나는 나무가 되는 꿈을 꾸는 일도 있다.
낮이고 밤이고 여름이고 겨울이고 바람과 눈비에 시달리면서
안타까이 그 전생의 나만을 추억하고 있는 꿈을.
조금은 거짓되기도 하고 또 조금은 위선에 빠지기도 하면서
그것이 부끄러워 괴로워도 하고 또 자못 안도도 하던 전생의,
그것이 억울하고 한스러워 밤새 잠을 이루지도 못하던
그 전생의 나만을 추억하고 있는 나무가 되는 꿈을.

어쩌다 꿈에 되는 이 나무가 내생일까!

 

자못: 생각보다 매우

 

 

p. 27


내 몸이 이 세상에 머물기를 끝내는 날
나는 전속력으로 달려나갈 테다
나를 가두고 있던 내 몸으로부터
어둡고 갑갑한 감옥으로부터

나무에 붙어 잎이 되고
가지에 매달려 꽃이 되었다가
땅속으로 스며 물이 되고 공중에 솟아 바람이 될 테다
새가 되어 큰곰자리 전갈자리까지 날아올랐다가
허공에서 하얗게 은가루로 흩날릴 테다

나는 서러워하지 않을 테다 이 세상에서 내가 꾼 꿈이
지상에 한갓 눈물자국으로 남는다 해도
이윽고 그 꿈이 무엇이었는지
그때 가서 다 잊었다 해도

 

한갓: 다른 것 없이 겨우 (cf. 한낱: 기껏해야 대단한 것 없이 다만)

 

 

p. 29
먹다 남은 배낭 속 반병의 술까지도

에메랄드 깔린 대로는 아닐 거야,
장미로 덮인 꽃길도 아니겠지,
진탕도 있고 먼지도 이는 길을
이 세상에서처럼 터덜터덜 걸어가겠지,
두런두런 사람들 지껄이는 소리 들리고
굴비 굽는 비릿한 냄새 풍기는 골목을.
잊었을거야 이 세상에서의 일은,
먹다 남은 배낭 속 반병의 술까지도.
무언가 조금은 슬픈 생각에 잠겨서,
또 조금은 즐거운 생각에 잠겨서,
조금은 지쳐서 이 세상에서처럼.

 

 

p. 34~35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들리지 않아 아름답고 보이지 않아 아름답다.
소란스러운 장바닥에서도 아름답고,
한적한 산골 번잡한 도시에서도 아름답다.

보이지 않는 데서 힘을 더하고,
들리지 않는 데서 꿈을 보태면서, 그러나
드러나는 순간.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다움을 잃는다.
처음 드러나 흉터는 더 흉해 보이고
비로소 보여 얼룩은 더 추해 보인다.
힘도 잃고 꿈도 잃는다.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보이지 않는 데서 힘을 더하고
들리지 않는 데서 꿈을 보태면서,
숨어 있을 때만, 숨어 있는 것들은 아름답다.

 

 

p. 36~37
눈발이 날리는 세모에

하나는 십수년 징역을 살고
하나는 그가 세상에 두고 간 아내와 딸을 거두고 먹이고 가르치고
오랜 세월

하나가 창살 안에서 달을 보며 주먹을 쥔 그 숱한 세월
하나는 거리에서 비와 바람에 맞서 땅도 넓히고 집도 올리고
그가 두고 간 아내와 딸과 더불어

이제 세상에 나와 하나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며 목이 쉬어 거리를 누비고
뜻 없이 산 세월이 원통해 하나는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다가도

눈발이 날리는 세모에 마침내 마주 앉아 그들 술잔을 부딪힌다

자네 있어 나 든든하다면서
자네 있어 나 자랑스럽다면서

이 땅에 그들 친구로 태어나서
바람과 눈비 속에 형제로 태어나서

눈발이 날리는 세모에

 

세모: 한 해가 끝날 무렵. 설을 앞둔 섣달그믐께를 이른다.

 

 

p. 40~41
그녀의 삶

광부의 아내가 되었을 게다.
낙반으로 허리를 다친 아버지를 닮은
광대뼈 불거진 사내의 아내가.
탄가루 시커먼 울타리에 호박 심고
강냉이 심고 고추 심고,
아들 낳고 딸 낳고,
삼십촉 흐린 전등 아래서
남편의 떨어진 양말을 꿰매다가
문득 비벼보는 침침해진 눈.
더러는 남편을 따라나가
삼겹살에 소주도 한두 잔 기울이면서.
떠올려보았을 게다, 별이 되어 가슴에 박힌
그림자처럼 스쳐간 사람들의 모습을.
어떤 사람은 흐리게 또 어떤 사람은 진하게,
기쁨을 준 사람을 또 슬픔을 준 사람을.
호박잎 강냉이잎 고춧잎에
탄가루가 날라와 앉는 사이
오년이 가고 십년이 가고 이십년이 가고,
아이들은 자라고 남편은 늙고.
어떤 별은 아예 사라지고 어떤 별은
더 크고 밝아지고 세월 따라.
아이들은 객지로 가고 대처로 가고
마침내 남편도 가슴속의 별이 되면서.

행복했을 게다, 아니 불행했을 게다.
긴 세월 뒤 제 자란 주막 자리로 돌아와
제 어미처럼 쭈그리고 앉아서,
끝내는 스스로 제 가슴속의 별이 되면서.

 

대처: 大 큰 '대' 處 곳 '처' 사람이 많이 살고 상공업이 발달한 번잡한 지역

 

 

p. 50~51
용서

성당 앞 골목에서 아이들이 개미떼를 짓밟고 있다.
어떤 놈은 몸이 두 동강이 나고 어떤 놈은 머리가 땅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다리가 몽땅 떨어져나간 몸통만을 가지고 땅바닥을 허우적거리는 놈도 있다.
아이들은 더 신명이 난다. 조각조각 찢다 못해 가루가 되도록 짓이기는 녀석도 있다.
개미굴은 아예 까뭉개져 자취도 없다.

그 밤 나는 꿈을 꾸었다.
내가 개미가 되어 거대한 존재한테 짓이겨지는.
내가 사는 도시가 조각배처럼 흔들리고 큰 건물들이 종이집처럼 맥없이 주저앉는.
나와 내 이웃들이 흔들리는 골목을 고래의 뱃속에서처럼 서로 부딪치고 박치기를 하며 우왕좌왕하는.
우리가 사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우리의 존재와도 우리의 생각과도 우리의 사랑과도 그밖의 우리의 아무것과도 상관이 없는 그 거대한 존재를 행해, 오오 주여. 용서하소서, 끊임없이 울부짖는.
천년을 만년을 그렇게 울부짖기만 하는.

누가 누구를 용서하고, 무엇 때문에 용서하는지도 모르면서.

 

 

p. 114~115
초원의 별
(몽골에서)

닥지닥지 하늘에 붙은 별무리에서
낮게 떨어져내려온 저 별에
나 같은 사람 또 하나 살고 있나보다.
평생을 두고 해온 일 문득 부질없어
그 허전함 메우리라 이 먼 나라까지 와서도
이번에는 그것도 부질없어 저녁 한나절을
낮잠으로 보내는 나를 한밤중에 몰래
불러내는 것을 보면.

듬성듬성 초원에 핀 꽃들을 보게 하고
조랑말처럼 초원에서 뒹구는
날렵한 두 처녀 활기찬
웃음소리를 듣게 하는 것을 보면.

외진 장터에서도 후미진 산속에서도
찾지 못했던 나 같은 사람 또 하나
저 별에 살고 있나보다,
모든 걸 버리리라 이 먼 나라까지 와서도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는 나와 밤새
동무가 되어주는 것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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