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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식 <황금빛 모서리> 1993
김중식 <황금빛 모서리> 1993
p. 34~35
아직도 신파적인 일들이
한 여인의 첫인상이 한 사내의 생을 낙인찍었다
서로 비껴가는 지하철 창문
그 이후로 한 여인은 한 사내의 전세계가 되었다
우리가 순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한 사내의 전세계는 순식간에 생겼다
세계는 한없이 길고 어두웠으나
잠깐씩 빛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웃을 때는 입이 찢어지고
울 때는 눈이 퉁퉁 붓던 한 사내
그러나 우리가 순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한 사내의 전세계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표정의 억양이 문드러지고
아무리 움직이려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밤과 낮의 구별이 없어졌다.
과연 일부러,
도대체 일부러 한 여인이 한 사내의 세계를 무너뜨렸겠는가
자기도 어쩔수 없이, 혹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그런 말을 믿는다면
우리는 아무도 미워할 수 없으리
한 사내는 한 여인을 용서하였으니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는 죽음을 직시하게 되는가.
이제 한 사내는 한 여인의 창가에 있다
닫힌 세계는 그 스스로 열어보이기 전까지는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다
한 사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웅얼웅얼거리며 혼자서
한 여인과의 모든 대화를 끝냈다
깜짝 놀라 공기총 방아쇠를 당겼다
한 여인의 첫인상이.
p. 44
일관성에 대하여
시대가 깃털처럼 가비야운데
날개 달린 것들이 무거울 이치가 없다
나비가 무거울 이치가 없다
나비는 썩은 수박에도 주둥이를 꽂나니
있는 곳에서 있는 것을 먹으려면
쓰레기더미에 기생할 때가 있나니
먹고 산다는 것이 결국 기생한다는 것이 아니냐
남들이 버린 열정과 시든 꽃도 거기에 다 있나니
나비는 파리보다도 가비얍다
매 행동마다 필사적인 파리에 비하면
깊이도 없이 난해한 나비다
높이도 없이 현란한 나비다
나는 장자가 나비꿈을 꾸는 꿈을 꾸었다
자리를 뜨자마자 순결이 되는 나비
발을 터는 순간 결백이 증명되는 나비
내가 나비보다 무거울 이치가 없다.
p. 56~58
미드나이트 헤드라이트
다방 재떨이의 '오늘의 운세'를 보니까 "돈
낭비를 하지 마시오" 괘가 나온다거나 지하도
입구에서 즉석 복권을 긁어대거나 실내 야구장에서
만루 홈런을 치는 건 오락실에서 동전 하나로
한 시간을 버티는 건 내가 바라는 삶이 아니었다. 책에 손이 베여 피가 흐르고 창호지처럼
흡수했던 사상의 책을 팔아 약을 사먹는 것
삶은 내게 그런 게 아니었다 절대 아니었다
내게도 진리를 구하던 시절이 있었다
진리는 책상보다는 길거리에, 안보다는 밖에
있었으므로 동굴과 우물에서 나오려 밧줄을
던졌겠지만 이미 썩어가는 밧줄이었다. 나를
가두는 건 나 자신이지 껍질이 아니라고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껍질 속에서
웅크려 몽상하기도 했고 신문에 매일 나오던
누구의 환한 이마에 바늘을 꽂으며 저주를 하거나
한 여인 덕분에 세상의 뒷면을 알아차리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삶은 그런게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든 솜털 하나도 자유스럽지 못했다
나에게 삶은 그러 게 아니었다 아리랑
고개 너머 정릉 정도사 처마 밑
고드름이 녹다가 녹아 떨어지다가 모가지가 베여지면
아 그렇게 그날이 오면 죽은 것은 살고 산 것은
죽으리라 주문을 외고 푸닥거리를 했지만
그 시절은 물이 끓기 직전의 소란함이었을 뿐
총칼을 녹이거나 물을 수증기로 변화시키지도
못했다 혹시, 만약, 오리라던 그날은 오지 않았고
세상은 개선의 여지가 없으면서도 지금 세상보다
더 나은 세상 또한 없으리라는 암담함 때문에
내 자신이 변화되길 바랐다 체온이 3 ºC 만
올라다오 나는 天才가 되거나 狂人이 되리라
내가 퍼부은 저주와 욕설은 부메랑이었다
내 머리가 잘려나가고 급한 김에 숨은 쥐의
머리를 이어붙였더니 말을 할 때마다
찍찍 소리가 새어나왔고 사람과 마주치면
도망을 가게 되었다 환란의 시대여 어서
진군하라 나로 하여금 대낮의 어두운 면을
발견케 하고 불행에 몸담그는 기쁨을
만끽케 하라 나는 내 젊음을 감당하기 벅차다
라기보다는 이 젊음이 지긋지긋하다
나에게 삶은 그런 게 아니었다
충청남도에서 충청북도로
신동엽의 錦江을 건널 때
나는 정지해 있고
외부는 시속 100마일
나에게 삶은 그렇게 안팎이 다른 게 아니었다
시대를 잘못 만난 예언자들이
꼬리에 물을 적시고 있었다
질주해오는 헤드라이트들이 연이어
내 눈을 쏘고 달아나는 바람
나는 거듭 車線을 이탈할 뻔했다
不姙의 비유에 의하면 빛은
세상이 어두울수록 밝지만
세상은 어두운데 밝은 빛은 이제 성가시고
귀찮을 뿐이었다
나에게 삶은 그렇게 될 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天才(천재): 하늘 '천', 재주 '재'
狂人(광인): 미칠 '광', 사람 '인'
錦江(금강): 비단 '금', 강 '강'
신동엽의 금강: 시인 신동엽이 쓴 대하 서사시이다. 책 한 권에 달하는 장편의 시. 동학이 태동하고, 관리들의 횡포 속에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을 시적 언어로 담아냈다. 뮤지컬 <금강, 1894>로도 표현되었다.
車線(차선): 수레 '차', 선 '선'
不姙(불임): 아니 '불', 아이 밸 '임'
p. 63
아 아
자다가도 일어나 술을 마시는 이유는
경의선의 코스모스에서 치명적인
냄새를 맡았기 때문.
최초의 착란,
그 순간 지진이 있었고
붉은 태양이 시간이 흐른 뒤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던 그이가
세상 단 한 사람만을 미워하게 되었기 때문.
잊기에는 생이 짧다는 것을.
p. 98~99
우물 하나둘
욕심 같은 두레박으로 퍼내도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우물을 들여다보면
물에 비친 내 얼굴
퍼낼수록 불안처럼 동요하는 내 얼굴
가벼운 빗방울에도 일그러진다
그냥, 들여다보면
절망 덩어리조차 서서히 가라앉히는 우물인데
고개를 돌리면
또 다른 한 삶의 세상인데
우리는 자꾸 무엇인가를 퍼내려 한다
퍼낼수록 깊어지는 것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르며
부르면서도 자꾸 무엇인가를 퍼내려 한다
우물가 큰 그늘
드리운 버드나무의 밑동을 치니까
몸 전체가 쓰러진다
단 한 번 쓰러지면서 단 한 번 신음하는 버드나무를 보니까
사소한 일들이 사소해 보였다
잎새처럼 앙앙거리는 우리들이 정말 사소해 보였다
큰 그늘 드리우고
단 한 번 쓰러질 때까지 신음하지 않던 버드나무가
단 한 번 쓰러지면서
고통의 우물을 메꾸었다
고통의 밑바닥을 가는 사람만이 고통의 우물을 메울 수 있다면
우리는 삶을 운명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비록, 아무리 메꾸어도 메꾸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p. 101
황금빛 모서리
뼛속을 긁어낸 의지의 代價로
석양 무렵 황금빛 모서리를 갖는 새는
몸을 쳐서 솟구칠 때마다
금부스러기를 지상에 떨어뜨린다
날개가 가자는 대로 먼 곳까지 갔다가
석양의 黑點에서 클로즈업으로 날아온 새가
기진맥진
빈 몸의 무게조차 가누지 못해도
아직 떠나지 않은 새의
彼岸을 노려보는 눈에는
발 밑의 벌레를 놓치는 遠視의 배고픔쯤
헛것이 보여도
현란한 飛翔만 보인다.
代價(대가): 대신할 '대', 값 '가'
黑點(흑점): 검을 '흑', 점찍을 '점' 태양의 광구에 존재하는 영역으로, 주변보다 낮은 온도를 지니면서 강한 자기 활동을 보이는 영역. 대류가 이르어지지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낮은 표면온도를 지니고 어둡게 보인다.
彼岸(피안): 저 '피', 언덕 '안' 산스크리트어 파람(param)의 의역어. 강 건너 저쪽 언덕이라는 뜻으로 세속 세계를 뜻하는 차안(此岸)에 대해 종교적 이상의 경지, 깨달음의 세계를 의미한다.
遠視(원시): 뭘 '원', 볼 '시'
飛翔(비상): 날 '비', 빙빙 돌아 날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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