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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진 <사랑은 우르르 꿀꿀> 2017
장수진 <사랑은 우르르 꿀꿀> 2017
시인 장수진은 1981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연극과를 졸업했다. 2012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에 <이란청년>외 3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p. 16~17
극야(極夜)
신은 밤새도록 악마와 당구를 치고
잘못 맞은 적구가 당구대 밖으로 튀어 오르면
도시에 태양이 뜬다
딩···딩···
악마는 발가락을 까딱이며 알람을 울리고
두 팔을 길게 뻗어
잠이 덜 깬 자의 발에 구두를 신겨준다
우리는 걷고 또 걷고
사고팔고 사랑하고 오해하고
추락하고 추억하고
두 노인네는 낮의 당구장에 죽치고 앉아
끝없는 이야기를 나눈다
악마가 이름을 부르면
누군가 태어났고
신이 그 이름을 까먹으면
누군가 사라졌다
그들은 했던 말을 하고 또 하고
먹은 밥을 먹고 또 먹었다
집에 간다며 악수하고 헤어진 신과 악마는
길을 헤매다 우연히 다시 만나
서로의 이름을 바꿔 불렀다
아침은 오지 않고
쉰내가 풀풀 나는 어둠만
머리 위로 끝없이 쏟아졌다
극야(極夜): 다할 '극', 밤 '야' / 위도 68.6 º 이상인 지역에서 겨울 동안 어두워지는 현상을 말한다. 백야의 반대로 흑야라 하지 않는 것은 극지방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
p. 40
사랑, 셋(p. 33~40)
(일부발췌)
인간이여, 어디로 가는가
네가 내 발을 밟았을 때 나는 몸시 아팠노라
나는 고통으로 고립되어 이 세계를 잃었고
이제 너를 버리노라
p. 105~108
당신은 운 것 같아
수업이 끝나면 안 돼
교실 밖으로 나가 구름 도서관 위에서 몸을 던질 것 같아
당신은
상투적인 하루를 싫어하니까
그래, 죽는다면
잘 정리된 철학 서적 위에서 날아오른다면
조금은 다른 오후가 되겠지
누군가 당신을 보겠지
내가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돌아온 내가
무의미한 설거지에 지쳐
잘 가요, 또 오지 말아요
가난한 내가 가난한 자를 천대하는 마음으로
정말 죽고 싶어
술과 안주와 흘러간 가요 속에서, 돈 몇 푼 오가는 생을 깔보며
나는 말했지
노동이 끝나고 책을 보는 건 불가능해
전태일은 정말 위대하지 않아?
새벽 두 시쯤
나는 칼끝을 한 번씩 만져보았지
아무렇지도 않았고
호프집 이모는 매일 내게 뜨거운 찌개를 끓여주었어
김 해서 밥 먹어라
당신은 조금 운 것 같아
시리아의 난민과
타국을 떠돌다 죽은 친구의 친구를 생각하며
혼자 남은 노모와 쓸쓸히 죽은 아버지
간밤에 자두 씨를 삼킨 작은 개 때문에
세상은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아무리 시시덕거려도
구청과 싸우거나
독서모임에 나가 간신히, 몇 마디 한들
죽은 아이를 건네며 말이 없던
여인의 눈 속에서
헤어진 우리는 자꾸 마주칠 테니까
눈부신 아침에 고인 그날의 슬픔을
한 입씩
떠먹여주었으니까
p. 182~184
6백 년 전의 기도
오후의 공원에서
미지근한 빵을 먹으면 이내 분명해지는 것
살아 있다는 화사한 공포
분수대 안에서
동전을 던지며 첨벙첨벙 뛰노는 아이들
엄마는 저만치, 할머니는 무덤가에
집이 무너지기 전에
고아가 되기 전에
마지막 동전이 떨어지기 전에 잠들면 좋으련만
팡파르가 울리네
앳된 병사들은 작은 북을 치며 행진하고
폭격이 오려나 이 도시에
아무 이유도 없이
우리 오늘 죽으려나
아이야 이리 온, 누군가 우릴 위해 기도하고 있단다
14세기 이름 없는 섬의 수도원에서
6백 년 후의 후손을 위해 누군가 무릎을 꿇는다
소용없군요, 당신의 기도 당신의 무릎
오늘 이 언덕의 오래된 선물가게는
훗날 대학살의 시계탑이 될 테고
당신의 수도원은
역사상 가장 끔찍한 수용소가 되었으니
우리는 매일 죽어가며 다른 빵을 찾고
잠깐씩 백치가 되고
어쩔 수 없겠지요, 살아 있다는 것
하지만 나는 당신의 후손이 아닙니다
시간은 수직으로 흐르지 않아요
나의 침상에서 숨을 거둔 포로는 내게 오늘의 빵을 남겼습니다
p. 196
질문들
죽음은 어떤 걸까
어제 밥을 짓던 한 여인이
오늘 수만의 군중 앞에서
큰 소리로 선언문을 읽는다는 것은
그때 한 사람이
한 움큼의 태양을 손아귀에 쥔 채
군중 밖으로
영원히 사라진다는 건 어떤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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