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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내 무덤, 푸르고> 1993
최승자 <내 무덤, 푸르고> 1993
p. 11
미망(未忘) 혹은 비망(備忘) 3
생명의 욕된 가지 끝에서
울고 있는 죽음의 새,
죽음의 헛된 가지 끝에서
울고 있는 삶의 새.
한 마리 새의 향방에 관하여
아무도 의심하지 않으리라.
하늘은 늘 푸르를 것이다.
보이지 않게 비약의 길들과
추락의 길들을 예비한 채.
마침내의 착륙이 아니라.
마침내의 추락을 예감하며
날아오르는 새의 비상ㅡ
파문과 ㅍ문 사이에서 춤추는
작은 새의 상한 깃털.
미망(未忘): 아닐 '미', 잊을 '망' - 잊을 수가 없음
비망(備忘): 갖출 '비', 잊을 '망' - 잊지 않게 하려는 준비
p. 16
未忘 혹은 備忘 8
내 무덤, 푸르고
푸르러져
푸르름 속에 함몰되어
아득히 그 흔적조차 없어졌을 때.
그때 비로소
개울들 늘 이쁜 물소리로 가득하고
길들 모두 명상의 침묵으로 가득하리니
그때 비로소
삶 속의 죽음의 길 혹은 죽음 속의 삶의 길
새로 하나 트이지 않겠는가.
p. 23
未忘 혹은 備忘 15
이미 지나왔던 이 길,
이제 비로소 선택하리라.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길.
망막의 뒤편에 쌓인 응집된
추억들은 다시 한 올씩 풀려지고
기억 속의 들꽃들이 저 혼자 흔들리는 곳.
이제 처음으로 시작하는 길.
되돌아가는 길.
희망은 길고 질기며
절망은 넓고 깊은 것을······
p. 33
워드 프로세서
쓴다는 것이 별 것은 아니라고,
쓴다는 것에 아무런 희망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지.
그러나 이제 고백하자, 시인하자.
쓴다는 것, 써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더라면
내 삶은 아주 시시한 의미밖에 갖지 못했으리라는 것.
어쩌면 내 삶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으리라는 것.
오 쓴다는 것, 써야 한다는 생각에
내가 얼마나 높이높이 내 희망과 절망을 매달아놓았던가를
내가 얼마나 깊이깊이 중독되어왔던가를
이제 비로소 분명히 깨달을 수 있겠구나.
내 익숙한, 잘 나가는 달필을 버리고
원고지를 버리고 노트를 버리고
글자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자꾸만 목이 말라
더듬 더듬 떠듬 떠듬 처음으로 워드 프로세서를 치고 있는 이 밤에.
p. 40
중구난방이다
중구난방이다.
한없이 외롭다.
입이 틀어막혔던 시대보다 더 외롭다.
모든 접속사들이 무의미하다.
논리의 관절들을 삐어버린
접속이 되지 않는 모든 접속사들의 허부적거림.
생존하는 유일한 논리의 관절은 자본뿐.
중구난방이다.
자기 함몰이다.
온 팔을 휘저으며 물속 깊이 빨려 들어가면서
질러대는 비명 소리들로 세상은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없이 외롭다.
신앙촌 지나 해방촌 지나
희망촌 가는 길목에서.
중구난방(衆口難防 무리 '중', 입 '구', 어려울 '난', 막을 '방') 여러 사람의 입을 막기 어렵다. 는 뜻으로 막기 어려울 정도로 여럿이 마구 지껄임을 이르는 말
허부적거림: 허우적거림의 방언(강원, 전남)
p. 46
마흔
서른이 될 때는 높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지.
이다음 발걸음부터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끝도 없이 추락하듯 내려가는 거라고.
그러나 사십대는 너무도 드넓은 궁륭 같은 평야로구나.
한없이 넓어, 가도 가도
벽도 내리받이도 보이지 않는,
그러나 곳곳에 투명한 유리벽이 있어,
재수 없으면 쿵쿵 머리방아를 찧는 곳.
그래도 나는 단 한 가지 믿는 것이 있어서
이 마흔에 날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
궁륭: 활이나 무지개같이 한가운데가 높고 길게 굽은 형상 또는 그렇게 만든 천장이나 지붕 / 유의어: 돔
p. 51
너에게
네가 왔으면 좋겠다.
나는 치명적이다.
네게 더 이상 팔 게 없다.
내 목숨밖에는.
목숨밖에 팔 게 없는 세상,
황량한 쇼윈도 같은 나의 창 너머로
비 오고, 바람 불고, 눈 내리고,
나는 치명적이다.
네게, 또 세상에게.
더 이상 팔 게 없다.
내 영혼의 집 쇼윈도는
텅 텅 비어 있다.
텅 텅 비어,
박제된 내 모가지 하나만
죽은 왕의 초상처럼 걸려 있다.
네가 왔으면 좋겠다.
나는 치명적이라고 한다.
※ 최승자 시인의 다른 시집과 산문
2022.01.11 - [북리뷰/문학반] - 최승자 [즐거운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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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30 - [북리뷰/문학반] - [쓸쓸해서 머나먼] 최승자
2021.12.27 - [북리뷰/문학반] -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시인의 산문집, 그만 쓰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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