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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연옥의 봄> 2016
황동규 <연옥의 봄> 2016
p. 11
그믐밤
여행 도중 받은 아끼던 제자의 부음.
벌써 가는 나인가 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별이나 보자꾸나, 민박집 나와 언덕을 오를 때
휴대폰 전짓불이 나갔다.
냄새로 달맞이꽃 무리를 거쳐
반딧불이만 몇 날아다니는 관목 덤불을 지났다.
빛이 다가오는가 했더니 물소리였다.
불빛 낮춘 조그만 방같이 환(幻)한 여울을 건넜다.
기다렸다는 듯 하늘에서 별이 하나 떨어졌다.
걸음 멈추고 아는 별들이 제대로 있나
잊혀진 별자리까지 찾아보았다.
더 내려오는 별은 없었다.
땅으로 숨을 돌리자 풀벌레 하나가
마음 쏟아질까 가늘게 울고 있었다.
환(幻): 변할 '환'
p. 16~17
살 것 같다
49일간 하늘이 이리 찌푸리고 저리 찌푸리다
언제 그랬냐는 듯 미간(眉間)을 펴고
오늘은 아침부터 밝고 가벼운 구름장들 날리고 있다.
살 것 같다.
열흘 전인가 문득 환해진 저녁 약수터로 올라가다
물먹은 흙에 숨어 있던 나무뿌리에 걸려 엎어지고 나서
아예 생각 뒤편으로 제껴왔던 언덕길이
슬그머니 마음 한가운데로 되돌아왔다.
살 것 같다.
그동안 비 들이치는 우산 받고 빗소리 속을 걷거나
와이퍼 고속으로 돌려야 얼핏얼핏 앞이 보이는 차를 몰거나
비 그쳐도 온몸에 습기 차 가던 길 잊고 망연히 서있거나
제대로 한눈팔지도 못한 눈까지 지끈지끈.
끝 무렵엔 산다는 게 무겁게 매달리는 저울추였지.
이제 무거운 추 떨어졌으니 홀가분해진 서부영화의 늙은 악한처럼
총알구멍 뚫린 맥주통 문 앞에 세워논 살롱 앞에서 얼씬대다
엉뚱한 총탄에 맞더라도
회환 같은 것 없이 환히 비틀거리거나
맥주통에 두 손 얹은 채 생뚱맞게 서 있을 거다.(2013. 8.)
미간(眉間): 눈썹 '미' , 사이 '간'
p. 22
안 보이던 바닥
윤나게 닦인 아파트 엘리베이터 바닥에
갈색 나방 하나 던져져 있다.
날개 반쯤 펼치다 말고
바닥에 바싹 엎드려 쪼그만 머리 앞에 뱉어논
미세한 분비물이 얼룩처럼 그려져 있다.
살아서 마지막으로 내쉰 호흡 같다.
마지막 숨 내뱉으며 그의 망막은
이 세상의 무엇을 담았을까?
바람벽처럼 막힌 엘리베이터 문이었을까?
붙어보려다 떨어지고 붙어보려다 떨어진
엘리베이터 거울의 빛나는 사각(四角)이었을까?
추운 날 버스에 오르는 순간 안경알 흐려지듯
죽음에 들며 그의 망막
눈 감는 일 도와주듯 그냥 흐려졌을까?
사각(四角): 넉 '사', 뿔 '각' 네 개의 각, 네 모퉁이에 각이 있는 모양
p. 24~25
몸이 말한다
2012년 10월 5일 금요일, 하루아침에 쌀쌀해진 날
노령자 무료 독감 백신 맞으려 동네 병원에 갔다.
이왕 오셔서 기다리신 김에
4만 원짜리 폐렴 백신도 맞고 가시라는 의사의 말에
얼씨구 이런 게 바로 시간 절약!
허지만 저녁 병원 문 닫을 무렵부터 몸 오슬오슬 추워와
노령자에게 겹으로 백신 놓아준 의사, 돌팔이라 욕하며
새벽 2시까지 끙끙 앓다 간신히 눈 붙이고
아침에 생각해보니
내가 1년 4개월째 윗니 여럿 임플란트를 하고 있는
부실한 몸의 임자인 줄 의사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맞다, 엊저녁 너는 헛발질을 했어, 몸이 말했다.
지난여름 정신 얻다 뒀는지 모를 더위 두 번이나 먹었는데
이제 감기 몸살하고도 인사 한번 나눠야 않겠나.
빨리 가라고 자동차에 매질 않지만
제갈 물린 말은 채찍을 들어야 말처럼 달린다.
아픔의 지문(指紋) 묻어 있지 않은 삶의 구석이 어디 있는가?
기쁨의 문설주에도 아픔의 흔적?
타일레놀 계속 삼키는 네가 보기 싫어
나는 오늘 저녁 동네 치킨집에 갈 거다.
지문(指紋): 손가락 '지', 무늬 '문'
문설주: 문짝을 끼워 달기 위하여 문의 양쪽에 세운 기둥
p. 56~57
마지막 날 2
원한다고 될 일은 아니겠지만
사방에 녹음 넘칠 때 가고 싶다.
초여름 농사철 막 끝난 후
조금 한가해진 신작로를 걷다 가고 싶다.
녹음이 자연의 본색(本色)이라서가 아니다.
겨울밤, 낮에 물고기 잡은 얼음 구멍에서
크고 작은 두 별이 도란대며 나란히 헤엄치는 모습처럼
자연의 품을 더 살갑게 보여주는 것도 있지 않은가?
냄새 자욱한 밤꽃이 가실 무렵
모든 추억의 냄새가 녹음처럼 다 비슷비슷해질 때,
우회도로 난 후
길 한가운데까지 쳐들어온 자갈과 풀에 신경 주지 않고 걷다
갈림길에서 그만 길을 잃는다.
두 길이 양옆에서 춤추듯 설렌다.
평생 한 길 취하고 다른 한 길 버리는 일 하고 살았으니
마지막 한 번쯤 한꺼번에 두 다 취해볼 수 있지 않을까?
p. 73
마음보다 눈을
내 마음은 저 붉고 둥근 해 넘어가기 직전,
아직 빛이 남아 있는 하늘 한 조각을
돌돌 말아 몸속에 간직하고 싶다.
이 빛마저 사라지면
지난해보다 전깃불 두 배로 켜야 하는
덜 어둠으로 더 어둠을 밝히는 밤이 오리라.
허나 조금 전 신문에서 글자 하나 잘못 읽고
이름 제대로 달고 다녀! 내뱉은
내 속의 어둠이 더 컴컴하다.
방금 발 헛디뎌 휘청거린 저 보도블록 파인 자리도
내 속보다는 덜 파였다.
47년 만이라는 추위 속에서
카페인 파내버린 커피 사러 슈퍼에 가면서
누군가 촌스럽게 한참 투덜댔다.
그가 파인 보도블록을 슬쩍 피하자
다른 누군가가 다독였다.
'마음보다는 그래도 눈을 믿게.'
p. 88~89
풍경의 풍경
풍경으로 끝나지 않는 풍경이 있다.
그동안 마음속에 들어와 자리 잡았던 대부분 풍경들
옛 사진처럼 누렇게 바래다
뒤로 제껴진 추억들이 되었다.
입대 조금 전 초여름 저녁
도무지 풀리지 않는 마음의 응어릴 안고
부석사에 올랐지.
저 멀리 지평선 빙 둘러 엎드린 산들,
풀리지 않는 건 풀리지 않아 좋다는 듯 잠잠히 엎드린 산들,
지척의 범종소리, 지구를 한 번씩 들었다 놓던.
지금도 마음 어디 둘지 몰라
여기 두리번 저기 두리번댈 때
넌지시 눈앞에 뜨곤 한다.
저 멀리 지평선 빙 둘러 잠잠히 엎드린 산들,
범종 뒷울음으로 하늘을 한 겹 또 한 겹 덧칠하던 일몰···
어, 마음 얻다 놨지?
먼 산 위로 별이 하나 돋는다.
마음 있던 자리가 종소리 떠나간 자리처럼 넓다.
p. 102~103
마음 어두운 밤을 위하여
세상 사는 일, 봄비 촉촉이 내리는 꽃밭이기도 하고
피톤치드 힘차게 내뿜는 여름 숲이기도 하지만
모르는 새 밝아지는 단풍 길
나무들이 따뜻이 솜옷 껴입는 설경이기도 하지만
간판 네온사인 앞쪽 반 토막만 켜 있는
눈 내리는 폐광촌의 술집이기도 하다.
방 한쪽만 밝히는 형광등 불빛 아래
도토리묵 한 접시와 반쯤 빈 소주병
그리고 술잔 하나 달랑 놓고 앉아 있는 사내,
창밖에 눈 내리는 기척
그 너머론 신경 쓰지 않는다.
눈바람에 꼬리가 언 채 들려오는 밤기차 소리,
영월로 나갈 차인가
아니면 이 거리에 코 박고 잘 차인가,
이래도 좋고 저래도 그만인 소리엔
마음을 얹지 않는다.
들징슴이 달려와 등 비벼대듯 문짝 덜컹덜컹 흔들던 눈바람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지고
가까이서 뉘 집 갠가 혼자 한참 컹컹 짖다 만다.
형광등이 슬그머니 꺼졌다가 다시 단출한 술상을 내놓는다.
이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떨치기 힘든 것은
이런 뜻 없는 것들!
허리를 바로 세우며 사내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그래도 세상의 꼼수가 안 통하는 게
바로 이 저체온 슬픔, 이런 뜻 없는 것들이 아닐까.
p. 104~105
반짝이고 만 시간의 조각들
나도 모르게 왈칵 가슴에 안겨졌던 벅찬 젊음은
어디 주체 못 하고 마냥 안고 떠돌기도 한 젊음은
품에 안았던 느낌마저 내놓고 가더라도,
겨울 오후 햇빛, 건물 내부를 온통 눈부신 빛으로 만들어
나도 빛의 일부인 양 황홀히 녹았던 시에나 대성당 추억 같은 것도
자진해서 반납하고 가더라도,
별 볼 일 없이 반짝대다 마는 삶의 사금파리들까지
치우고 가라고는 않겠지.
희부연 봄 하늘에 약간 서쪽으로 기운 해
노란 유채꽃밭에 노랑나비 흰나비들 모이고
꼬리 긴 오목눈이 한 떼 약속한 듯 한꺼번에 와르르 날아오르는,
기차는 뵈지 않지만 철길이 알맞은 곡선으로 휘돌고
젊은 남녀가 손잡고 철길을 걷다
둑 아래도 감쪽같이 사라지는,
부는 듯 안 부는 듯 산들바람 속에
날벌레들 공중에 박힌 조그만 눈들처럼 떠 있는 ···
여기 어디에 빗자루를 대겠는가?
p. 109~111
삶의 본때
어머님, 백 세 가까이 곁에 계시다 아버님 옆에 가 묻히시고
김치수, 오래 누워 앓다 경기도 변두리로 가 잠들고
아내, 벼르고 벼르다 동창들과 제주도에 갔다.
늦설거지 끝내고
구닥다리 가방처럼 혼자 던져져 있는 가을밤,
베토벤의 마지막 4중주가 끝난다.
창을 열고 내다보니 달도 없다.
마른 잎이 허공에 몸 던지는 기척뿐, 소리도 없다.
외로움과 아예 연 끊고 살지 못할 바엔
외로움에게 덜미 잡히지 않게 몇 발짝 앞서 걷거나
뒷골목으로 샐 수 있게 몇 걸음 뒤져 걷진 말자고
다짐하며 살아왔것다.
창밖으로 금 간 클랙슨 소리 하나 길게 지나가고
오토바이 하나 다급하게 달려가고
늦가을 밤 치고도 투명하게 고즈넉한 밤.
별말 없이 고개 기울이고 돌고 있는 지구 한 귀퉁이에
아무렇게나 처박혔다 가리라는 느낌에 맥이 확 풀리거나
나이 생각지 않고 친구들이 막무가내로 세상 뜰 때
책장에서 꺼낸 손바닥 따갑게 때리던 접이부채를 꺼내
이번에는 가슴을 되게 친다.
외로움과 외로움의 피붙이들 다 나오시라!
무엇이 건드려졌지? 창밖에 달려 있는 잎새들의 낌새에
간신히 귀 붙이고 있던 마음의 밑동이 빠지고
등뼈 느낌으로 마음에 박혀 있던 삶의 본때가
몸 숨기다 들킨 짐승 소리를 낸다.
한창 때 원고와 편지를 몽땅 난로에 집어넣고 태운
외로움과 구별 안되는 그리움과 맞닥뜨렸을 때 나온 소리,
'구별 안 될 땐 외로움으로 그리움을 물리친다!'
몸에 불이 댕겨진 글씨들이 난로 속을 뛰어다니다
자신들을 없는 것으로 바꾸며 낸 소리.
p. 154
연옥의 봄 1
같이 가던 사람을 꿈결에 놓쳤다.
언덕에선 억새들 저희끼리
흰 머리칼 바람에 날리기 바쁘고
샛강에선 물새들이 알은체 않고
얼음을 지치고 있었다.
쓸쓸할 때 마음 매만져주던 동네의 사라진 옛집들도
아직 남아 있었구나! 눈인사해도 받아주지 않았다.
기억엔 없어도 약속은 살아 있는지
아무리 가도 닿지 않는 찻집으로 가고 있다.
왕십린가 청량린가? 마을버스 종점인가?
반쯤 깨어보니 언제 스며들었는지
방 안에 라일락 향이 그윽하다.
그대, 혹시 못 만나게 되더라도
적어도 이 봄밤은 이 세상 안에서 서성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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