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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일 <립싱크 하이웨이> 2021
박지일 <립싱크 하이웨이> 2021
p. 28
못질하기 좋은 해안가
숲 없고 민박 없고 도로도 없다. 나는 그저 못질하기 위해 태어난 망치다. 어디 절실함이라도 만들어내기 위해 이 순간 태어난 나는 망치다. 나는 처음으로부터 멀어진다. 사방에 깔린 것이 모래니 내려칠수록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런 나를 기록하는 네가 있어 오늘 해안가로 충분하다. 밀려오는 파도 있으니 밀려가는 파도 있을 것이고 나는 당연한 것만 말하고 싶고 당연한 것이라도 말하고 싶다 제발. 이 순간 나는 너밖에 몰라. 너를 사랑한다. 상투적인가? 질문의 답은
눈 내린다. 네 몫이다. 나는 허공에서 시작하여 바닥에서 끝장나고 싶다. 이것은 눈에 관한 이야기 아니고 지금 이 순간 성실하게 망치 내려치는 나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고 너의 기록에 따라 나는
자세 고친다. 무릎 비껴 치고 오른쪽 두 걸음 옮겨 어깨 내리치는 망치. 계속하여 파도 밀려온다. 목적 없어 죽어도 끝이 없고 끝장내도 죽음이 오지 않는다.
p. 146~147
종로 가구거리 들어서며
다짐했죠, 내가 사랑하는 것들 내 방에 들여놓지 않겠다고. 그런데 고양이라니? 나는 분명 청과물 코너 앞에서 수박값 천 원만 깎아달라 실랑이 중이었는데 이게 무슨
고쳐 쓰겠습니다. 뭐 어려운 일이라고요. 고양이 울음 소리 나를 깨우는 새벽입니다. 나는 내 방 침대에 누워···
다시 쓸게요. 아무래도 고양이는 내가 깨운 것 같습니다.
하나씩 밝혀지는 캠퍼스 창문, 새벽 두리번거리는 이웃의 얼굴, 나는 굴뚝에서 끓어오르는 연기, 잠깐만
끓어오르는 연기라니? 시티 투어 중인 내가요? 머리카락 흩뜨리는 바람과 함께 경복궁, 창덕궁 다 돌고 이제 막 창경궁 입구에서 단체 할인 요구하는 내가요?
저 굴뚝은 몰라 그을음. 나는 서울대학교병원 지나치며 생각합니다. 무럭무럭 연기가 점점 고양이를 희미하게 아니 감깐, 고양이라니, 지겹습니다. 나는 레토르트 식품 종량제 봉투에 담으며 포인트 번호 부르는 중이라고요.
나는 점점 녹아내리는 어깨였다가 동시에 마모되는 손바닥이었다가, 생크림 케이크, 물결무늬, 나는 고양이의 축 처진 수염
됐습니다. 또 고치겠습니다. 이 고요하고 거룩한 새벽 나는 나를 두드리면서, 하루치의 새벽, 다시 하루치 새벽 끌었다 밀었다 이 도시 아무래도 공갈빵적인···하
공갈빵이라니요? 나는 다시 나를 두드립니다. 도시 천장 울려 치는 나와 도시 지붕 내려치는 나로 이 새벽 깔끔하게 구분 가능하다면 내가 뭣 하러 잠까지 설쳐가며
거리, 연인들, 분수대와 매일 예술품 갈아치우는 전시장. 이 도시는 세계에서 몇 번째로 아름다운 도시중얼중얼중얼 그러니까 해설사 양반, 산책 허락하지 않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랍니까?
p. 151
후보 선수 없는 팀은 출전할 자격 없다
나는 네가 띄워놓은 알루미늄 풍선. 전신주 너머 헤매는
가오리연이라도 좋아.
빛이 내 얼굴 흔들 때마다 환호성 터져 나왔다. 헤이,
이곳을 봐. 알려주겠다 아래에서
위 내려다볼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고정된 장면 필요해. 네가 내 발목 묶은 타래 감고 또 풀어내면서 논두렁 홀로 서 있는 장면.
심장을 더 흔들어줘, 움켜쥐어도 좋아. 필요한 건 타래 풀어가는 손일까. 타래
감아가는 손일까. 약간의 악력 필요한 순간 살다 보면 도래하기 마련이지만 마이너스
마이너스. 빼야 할 힘 빼지 못해
실 끊어낼 가위 여태 내 찾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고정된 장면 필요해. 모두 떠나버린 논두렁 단 한 번만이라도
산사나무 끝없이 너 에워싸며 자라나고, 저화질 홀로그램 속
주인공, 너는 공중의 연 꽝꽝 대못 하면서
고정된 내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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